어떤 순간은 너무 아름다워서 그냥 흘려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순간의 기억을 카메라 렌즈에 맡긴다거나 몇자 안 되는 일기로 담아내기엔 그 어느 것도 온전치가 않다. 모든 게 완벽했던 기분과 색채와 냄새를 내 몸의 일부로 흡수해냈다.
시간이 흐르면 강렬했던 그날의 냄새도 조금씩 옅어지겠지만, 아릴 만큼 그리워지겠지만,
찬란했던 그 여름 공기는 가장 부드러운 살결을 쓸고 지나가 결정적인 순간에 내 인생을 뒤바꾸기도 할 것이다.
여행 일기를 쓰고자 하면 늘 망설여진다. 이날은 무얼 했고, 누굴 만났고, 기분이 어땠는지를 세세히 적다 보면 자꾸만 무언가 빠트린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모든 게 새롭고 날 것인 공간이 나의 모든 신경에 와닿기 때문이다. 그간의 인생엔 없었던 새로운 자극들을 글로 써내리자니 표현이 안될 수밖에. 어떨 땐 아무 기록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자세한 기억을 남기기도 한다. 인체의 감각은 그 어느 사진이나 글보다 정확하다.
애리조나 어딘가의 사막스러운 길을 접어들며 나는 일부러 휴대폰을 보지 않았다. 어차피 신호는 약해져 있었다. 내비게이션에는 도로 표시조차 사라졌고 길 위에 다른 어떤 생명체나 자동차도 보이지 않았다. 달리는 창밖으로 연속되는 사막의 풍경을 곱씹었다. 모래 반 하늘 반인 사막을 달릴 때는 시간의 속도를 알 수 없다. 시간이 빨리 흘러 기대 속의 그랜드 캐년을 어서 보고 싶으면서도, 다시 보기 어려울 이 풍경을 더 진득이 즐기고 싶기도 했다.
꽤 장거리의 이동을 하며 차안의 공기가 텁텁해질 무렵 푸른 나무가 한 두 그루씩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분 엘크를 아세요? 이제 창밖을 잘 보셔야 해요. 운이 좋으면 엘크를 볼 수도 있을 거예요."
현존하는 최대의 사슴 엘크.
"특히 보기 어려운 게 숫엘크에요. 뿔이 있는 아이들이 숫놈인데 뿔 양옆으로 1미터가 넘을 정도이니, 얼마나 큰지 상상이 되지요?"
열심히 엘크를 찾는 사이 우리는 그랜드 캐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벌써 뿔 없는 엘크는 두어 마리 발견한 터였다.
눈을 감고 몇 발짝 걸어 한순간에 맞이한 그랜드 캐년은 황홀경이었다. 사진을 어떻게 찍어도 눈앞의 아름다움을 전부 담아내지는 못했다. 아름다운 순간에는 역시나 소중한 사람들이 생각났고, 나는 남자친구에게 사진을 전송하려 휴대폰을 들고 팔을 뻗어댔다. 신호가 약해 사진 한 장을 보내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얼마간의 현재를 희생하고 있는 그에게 나의 행복한 감정이 얼마나 어떻게 전해질 지는 미지수였다. 그가 나의 행복을 응원해주지 않을까봐 걱정했다면 아마 우리가 미숙한 사랑이었거나 사랑의 타이밍이 안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지는 해를 뒤로 하고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바베큐와 갖가지 술에 지각비로 산 주전부리들을 곁들여 저녁상을 만들었다. 공기 좋은 곳에서 술을 마시면 취하는 줄도 모르고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느 긴 저녁이었다.
나는 술상에 앉은 사람들 중 가장 어렸지만 나이가 가장 무서운 나이였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대학생활을 후회 없이 보내야 한다는 강박과 20대 후반을 지나 서른이 된 나는 무엇이 되어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늘 함께였다. 누군가는 철저한 계획 하에 차곡차곡 30대, 40대를 준비하고 있지만 나는 당장을 마음껏 즐기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어차피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즐거운 현재에 대한 기회비용이었던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사회인이 되었을 때 누구나 할 법한 후회를 나는 하고 싶지 않았다. 게으르면서도 완벽하고 싶은 성향은 정신을 피곤하게 한다. 그러나 간혹 게으른 사색으로부터 나를 건져주는 ‘유레카’의 순간이 온다. 서로 나이, 직업, 사는 곳이 전부 다른 사람들 속에 있으면 나를 중심으로 했던 비교 기준은 옅어지고 편견 없이 상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감사하게도 그날 함께 술잔을 부딪혔던 사람들은 자신을 일부러 숨기지도, 상대를 쉬이 평가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자연스레 옆 캠핑카에 있던 사람들과 술상을 합쳤다. 초저녁에도 하늘은 까맸고 흘러나오는 노래에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술이 좀만 더 들어가면 저도 춤출 수 있을 것 같아요 하하.”
“여기 아무도 누가 뭘 하는지 신경 쓰는 사람 없어요. 같이 춤 춰요!”
나는 미친 척 춤을 추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들어 앉을 곳을 찾았다. 모닥불 앞에서는 술병을 돌려 잡으며 각자 여기에 온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대하고 인생 첫 해외여행을 왔다며 앳되고 설렌 표정을 한 동갑내기도 있었고, 유학 중인 딸을 보러와 여행 중인 가족도 있었다.
“우리도 중학생짜리 아들들이 있어요. 지금쯤 엄마 아빠 집에 없다고 열심히 게임하고 있겠지?”
어느 40대 부부가 호탕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저분들은 아주 멋진 부부셔요. 두분 다 의사로 일하시다가 그만두고 미국 일주를 하고 계신다고 했죠?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셨어요?”
“병원 일도 참 보람차지만 우리들한테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손잡고 그만뒀어요. 여행을 마친 후에는 같이 의료봉사를 다닐 생각이에요. 제 옆에 아내가 뜻을 함께해줘서 가능한 일이었고요. 정말 제 아내는 백점짜리 아내예요.”
“하하 맞아요. 이 사람이랑 결혼하고 지금까지 쭉 서로를 백점짜리 아내, 남편이라고 소개한답니다.”
그들은 맞잡은 손을 들어올려 보였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모닥불의 감성인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담배 피우러 가는 언니를 따라 걸어갔다.
“우리 막내 왜 울었어? 남자친구 보고싶어서?”
“음… 그런건가? 언니는요?”
“난 장거리 연애하다가 얼마전에 헤어졌어. 미국에서 일하다 보니까 연애는 뒷전이 되더라고. 디자인 하는 일이 여기서는 적자생존이야. 경쟁에서 살아남으면 계속 가는거고 아니면 한국에 돌아가는거지. 전남자친구는 날 기다려준다고 했는데 결국 서로 죄책감만 쌓이다가 끝나버렸어.”
“그렇구나… 후회되지는 않아요?”
“후회돼. 그치만 지금은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어. 게임 디자이너가 되는 게 내 꿈인데, 여기서 몇 년만 더 버티면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모닥불이 없는 곳엔 별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고개를 들고 한참을 바라보니 별들이 쏟아질 만큼 많았다. 내 가슴 속엔 낯선 자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리저리 뒤엉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하산했다. 왼쪽 창밖으로 숫엘크가 보였다. 그것도 두 마리나! 어제 밤의 진한 여운과 더 진한 숙취로 인해 정적을 유지하던 차 안이 시끌해졌다.
“이야 숫엘크를 두 마리나 보다니 여러분 운이 좋아요. 더 운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우리 가는 길 옆에 얌전히 서있었다는 거예요. 어떨 땐 거대한 엘크가 도로 위를 가로막고 서있어서 몇 시간 동안 차들이 못 움직일 때도 있다니까요.”
참 이상하다. 눈에 불을 켜고 뿔난 엘크만 찾았는데, 그 황홀함도 잠시 길을 가로막힐지도 모른다니.
“무섭죠? 앞으로 남은 여정 동안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그치만 지금처럼 이렇게 엘크들이 길 옆으로 예쁘게 서 있는 행운도 있어요. 그저 기다리는 거예요. 아름다운 엘크가 나타나기를, 길이 다시 트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