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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Feb 07. 2024

국어사전을 여는 마음


  육아를 하다 보면 특정 시기마다 꼭 사야 할 것만 같은 아이템이 있다. 소근육발달을 위한 원목 교구라던가, 어린이 전집, 과목별로 종류도 다양한 문제집, 엄마 욕심으로 받게 하고 싶은 수업 같은 것들. 국어사전도 그런 아이템 중 하나였다. 학교에서 사용하기 전, 집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써보고 싶었다. 그러나 두껍고 비싼 데다 몇 번 펼쳐볼지 말지 모를 사전을 덜컥 살 수는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어린이 잡지를 구독하며 사은품으로 받게 되었다. 이거야 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부푼 마음으로 택배를 기다렸으나 딸은 사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혼자 책을 읽게 되면서 내가 읽어주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함께 단어를 찾아보거나 알려줄 일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잡지라도 즐겁게 읽는 게 어디야 하며 애물단지가 된 커다란 사전은 책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그 위로 먼지가 눈처럼 소복이 쌓여갔다.


  지루한 시간이야말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바닥을 뒹굴거리며 심심해를 외치던 아이는 어느 날, 비밀스레 꽂혀 있는 사전을 발견했다. 스스로 꺼내든 국어사전은 새로운 장난감이자 판도라의 상자가 되어주었다. 단어 옆에 그려진 세밀화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무료함을 달래기 충분했다. 이때다 싶어 사전 찾는 법을 알려주었다. 물론 처음부터 단어를 잘 찾아낸 것은 아니다. 누가 더 빨리 찾나 혹은 이 단어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 질문하며 함께 찾아보았다. 서툴고 느리더라도 참고 기다렸다. 그렇게 아이는 사전과 조금씩 친구가 되었다. 소파 옆 손 닿는 곳에 올려두고 심심할 때마다 단어를 찾았다. 엄마, 이 단어 무슨 뜻인지 알아? 엄마, 오늘은 내가 이런 단어를 찾았어. 아기새가 노래하듯 딸은 사전을 열고 수많은 단어를 소리 내어 읽었다. 개중에는 처음 듣는 단어도 있었고, 뜻을 잘못 알고 있는 단어도 있었다.


  '흠'이라는 글자 하나에도 다양한 단어가 있다. 흠뻑, 흠썩, 흠씬, 흠칫 등등. 사전을 열 때마다 아름다운 우리말, 눈부신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새뜻하다, 찬연하다, 찬찬하다, 희붐하다. 나의 수첩에도 기억하고 싶은 말들이 늘어갔다. 이 빛나는 말들을 조심조심 이어 붙여 아름다운 글을 써야지. 한 글자 한 글자 수첩에 눌러 담았다. 그러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글을 써온 지난 시간 동안 사전과 동떨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할 것. 그 단어가 적절하게 쓰이고 있는지 정확한 의미를 찾아보고 고민할 것. 대체할 만한 다른 단어는 없는지 찾아볼 것. 그러기 위해서 사전을 곁에 두고 수시로 열어 볼 것. 유의어, 반의어까지 찾아보는 과정을 게을리하지 말 것.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사전을 가까이할 것. 그저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 바빴을 뿐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스스로 열어본 사람이 있었다. 귀엽고 동그란 아이의 말 주머니는 겨울 내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는 중이다. 아이가 내뱉는 아름다운 단어들이 내게 말한다. 더 많은 단어를 마음에 차곡차곡 담아두라고. 사전을 마음껏 탐험하며 너만의 문장을 만들어가라고. 방학은 여전히 길고, 돌아서면 집안일이 쌓이는 숨 막히는 나날이지만 아이와 사전을 여는 시간만큼은 다른 차원에 머무는 기분이 든다. 우리는 사전을 열어보며 각자의 단어와 문장을 만든다. 입춘이 지나고 겨울이 끝나간다. 봄이 오면 딸과 나의 마음에는 어김없이 작은 새싹이 고개를 내밀겠지. 우리만의 단어, 우리만의 글이 싹 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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