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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Sep 23. 2023

나보다 훨씬 잘난 뮤즈

  "칠칠이는 누구 닮은 걸까?" 소리를 자주 들어왔다. "도대체 누굴 닮은 거야!"라면 안 좋은 뜻을 품은 거겠지만 모두들 순진무구한 의도에서 물으니 나도 웃고 만다. 가족, 친척, 친구, 지인 등등 가족 얘기가 나왔다 하면 매번 듣는다. 내 특별한 이력으로는 <산부인과 마지막 생명>이 있다. 2001년 4월 신생아실에 아기는 나 홀로였고, 우리 모녀가 퇴원하면서 산부인과는 폐업하였다. 언니도 이곳에서 태어났는데 출산할 몸이 아닌 엄마가 또 오는 바람에 담당 선생님이 주시하셨으니 배려를 받았던 거라 생각한다. 이런 까닭에 "산부인과에서 애가 뒤바뀐 거 아니야?"라는 망상은 불가능하다. 얼굴부터가 두 집안을 골고루 닮아서 망상해 봤자 이래저래 의미 없기는 하다.


  책을 멀리하는 부모님 아래에서 책벌레로 자랐다. 예술에 일절 관심 없는 가족 사이에서 손으로 꼼지락거리며 무언가 만들어 내기 일쑤였다. 우리 가족은 글쓰기도 질색팔색한다. 불화가 발생하면 문자로 소통하려는 둘째에 타자 치기 싫어하는 가족들은 골머리를 꽤나 앓았다. 가끔 첨삭용으로 부려 먹으니 쌤쌤이라고 본다. MBTI 얘기를 하자면 언니는 F에서 T로 바뀌었고 엄마는 F이며 아빠는 왔다 갔다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본성(T 혹은 F)'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극T는 아닐지언정 세 사람은 올곧게 T만 나와야 한다. 감성적(감정형)인 건 나뿐이다. 한 번은 서럽게 울고 있는데 언니가 "도대체 왜 우는 거야?" 물었다. 언니 때문이었기에 하다 하다 비꼬는 줄 알고 눈물이 뚝 멎었다. 언니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은 거였다. 엄마랑 아빠는 언니보단 좀 더 상냥하게 나오되 이유 먼저 묻는 건 똑같다. "아이구 왜 울고 그래~"가 아니라 "왜 우는지 말해보렴"이라는 반응이 싫어 눈물을 숨겼던 그간의 세월이여....


  그렇다고 "칠칠이는 가족 중 아무하고도 안 닮았네"라는 결론이 나올 순 없다. 멍멍이가 내 막내 타이틀을 양도받으며 가족으로 편입해서다. <사랑하면 닮는다>의 산증인이 우리 둘이다. 내겐 득 될 게 없는 고백 같다마는 생김새는 물론 편식, 고집, 작은 간덩이 등 여러모로 똑같다.... 멍멍이는 요구 사항이 있으면 짖지 않고 낑낑 우는데 나에 한해서만 지나치게 다. 내가 외출하는 날엔 얌전히 잠만 잔다고 한다. 집에 낯선 손님이 놀러 오면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 "낑낑" 말고 "ㄲ....ㅇ" 하고만 울어도 내가 알아들으니 우는 것도 멋대로다. 동시에 가족들에겐 화를 안 내면서 내게는 앙칼지게 굴 때도 있어 휘둘리기 일쑤다. 남들에게 멍멍이는 순둥이 그 자체인데 내게는 까다로운 도련님이다.  




  2020년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수업을 들으며 멍멍이와 부쩍 가까워졌다. 2년을 집구석 콤비로 있던 까닭에 멍멍이가 날 의지하는 게 심해졌다. 눈물샘 마를 일 없을 줄 알았건만, 멍멍이 케어하느라 울 틈이 없어 눈물이 줄어들었다. 멍멍이로 인해 감정 표현이 다양해진 것도 눈물이 멎는 데 기여하였다. 멍멍이가 우리 집에 굴러오면서 꽉 막혀 있던 내 감정을 시원하게 뚫어주어서다. 가족들과 나의 차이로는 표출 방식도 있었다. 갓난쟁이일 때부터 얌전하기만 했는데 날이 갈수록 말수가 줄어들고 눈치를 보는 탓에 어른들이 걱정도 했다. "칠칠이 같은 성격이면 꽉 묵혀 두고만 있을 거야. 안 터트렸다가는 쟤 큰일 나" 소리에 엄마는 터트리라고 종용도 했다. 응원에 힘입어 표출해 봤다만 '사고형' 엄마는 내게 맞는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돌아오는 건 위로나 격려가 아니라 물음표였다. 걱정되는 마음에 더 캐물어 대면서 조언을 하려 한 거겠지만 어린 내겐 도리어 감정을 티 내면 안 되는 압박처럼 다가왔다.


  해결책을 찾아낸 건 멍멍이였다. 내가 힘들다 해도 자긴 배고프니 밥 달라 해야겠고, 해야 할 일이 있다는데도 자긴 심심하니 놀아야겠고, 화났다 해도 자긴 기분 좋으니 뽀뽀해야겠고.... 강아지들의 습관으로는 '엉덩이 밀착' 있다. 엉덩이끼리 밀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엉덩이를 남에게 붙이고 보는 거다. 얼굴, 팔뚝, 다리, 발 가리지 않고 자기 궁딩이 무조건 들이대고 본다. 강아지로서 지닌 버릇일 텐데 이 순간에 사람인 나는 사르륵 녹아버린다. 이전까지 마음이 화-악 풀리는 경험은 한 적이 없었다. 감정은 쌓여만 가는 줄 알았는데 멍멍이 옆에선 싹 비워지니 "그래 멍멍아, 내가 원한 건 이런 거였어!" 깨달았다. 어쩌다 한 번 얻는 횡재가 아니라 하루에 수십 번 겪는 일이어서 꺅꺅거릴 때마다 엄마는 "저것들, 또 난리 났네" 지겨워한다.


  궁딩이만 밀착시키는 게 아니다. 무릎 위로도 잘 올라오고 가끔 배 위에도 누워 숨 못 쉬게 한다. 멍멍이가 중히 여기는 궁딩이를 내가 베개 삼아도 가만히 있는다. 나갈 일이 있으면 얼른 안으라고 신호를 보낸다. 멍멍이를 들어 올리는 순간과 멍멍이가 날 믿고 점프하는 순간이 일치할 때 그리 희열을 느낄 수 없다. 원래는 지나친 계획형이었다. 시간 낭비를 극도로 싫어하였고 목표를 이루는 걸 가장 우선으로 두었다. 계획은 하루마다 리셋되기에 휴일은 무의미했다. 멍멍이는 이런 날 못 봐주겠는지 쉼의 미덕을 알리려 했다. 지난 학기 월요일엔 낮 12시에 수업이 끝났다. 후다닥 집에 오면 2시가 채 되지 않았고 멍멍이는 한낮 귀가에 무척이나 신나 했다. 그런 멍멍이를 얼싸안고 뛰쳐나갔다. 걸음이 느린 멍멍이와 천~천히 꽃구경을 하면 1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멍멍이가 좋아하는 골목 어귀에서 머문 시간들은 그 어떤 계획보다 가치 있었다. 여전히 계획에 통제받는 성향이지만 멍멍이 덕에 유동적으로 굴기도 한다.




  멍멍이와 함께 있어야 하니 카공, 독서실 등은 사치다. "ㄲ...ㅇ" 소리가 나면 말벌 아저씨마냥 몸을 일으킨다. 며칠 전에는 계획을 제때 못 마친 바람에 날서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노트북을 보고 있는데 귓가가 간지러운 게 아닌가. 평소의 신호와 달리 "ㄲ..." 무척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멍멍이가 얌전히 있는 시간은 내가 노트북 볼 때로 한정되어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눈치 보면서 운 거였다. "왜 울어?" 묻지 않고 "아이구 그랬어~!~!" 안아주면서 노트북 전원을 껐다. 한참 놀아주고 나서야 멍멍이는 개운하다는 듯 다시 잠에 들었다.


  풍경, 휴식, 감정은 건강한 창작의 필수 요건인 듯하다. 그러니 멍멍이는 창작을 도와주는 뮤즈(무사)다. 가만히 앉아 머리싸맨다고 영감이 나오진 않는다. 멍멍이와 함께 자연에 녹아드는 시간엔 구상이 떠오르기도 하다. 이제는 감정의 못이 넘칠 일도, 메마를 일도 없어졌다. 멍멍이가 내 못의 수질까지 관리해 주어서다. 내 못에는 더 이상 고독하고도 쾌쾌한 냄새는 나지 않는다. 상쾌한 냄새와 함께 멍멍이 특유의 꼬리꼬릿한 냄새도 난다마는 이렇게 동기화되어 가는 게 좋다.


  온갖 비유를 남발해 대는 시초도 멍멍이다. 멍멍이가 우리 집에 왔을 때, 강아지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이라 온 세상의 요인을 대입하게 되었다. 멍멍이는 술빵 같다. 특히 눈코입이 콕콕 박혀 있는 게 더욱 술빵처럼 보이게 한다. 정수리 부분은 곱슬기가 덜해서 민들레처럼도 보인다. 자그마한 이빨은 쌀알을 꽂아둔 거 같다. 꼬불꼬불한 털은 덩치와 어우러져 새끼 양 닮았다. 자고 일어나 털이 눌려 얼굴이 납작해지면 너구리처럼도 보인다. 조동아리 부분이 툭 튀어나와 있어서 곰을 연상하기도 한다.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털밖에 보이지 않는다. 멍멍이의 모(毛)는 흰색인데 특이하게 중간중간 금색도 섞여 있다. 들판과도 같은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그 어떤 명승지도 필요 없어진다.


   뮤즈라 소개했지만 정작 내 자신이 뮤즈를 담아낼 그릇이 못 되기는 한다. 나보다 더 잘난 뮤즈에게 질투가 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멍멍이가 오면서 없어진 거로는 비교와 질투가 있다. 멍멍이는 나를 다른 견주와 비교하지 않는다. 이렇게 대인배 같은 멍멍이와 있으니 멍멍이를 포함해 세상 누구를 질투하겠는가.


새벽에 놀아달라고 시동 거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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