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곯아떨어진 몇 시간 동안 멍멍이가 무슨 짓을 한 게 빤했다. 반나절이 지나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멍멍이가 얼굴을 좌우로 털어대는데 심상치 않은 냄새가 나는 게 아닌가. 서둘러 양쪽 귀를 확인했더니 역시나! 신나게 긁은 흔적이 역력했다. 한때는 병원 가면 귀가 깨끗하다고 칭찬도 들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귀청소도 통하지 않는다. 멍멍이도 이러면 혼나는 걸 알아서 모두가 잠든 으슥한 시간에만 귀를 후빈다. 그 때문에 소위 '깔때기'라 불리는 넥카라를 씌우고 자는 게 필수이다. 아무래도 답답할 테니 아침에 일어나면 넥카라 먼저 빼주는데 하필! 비몽사몽 한 정신일 때 빼줬다가 나 홀로 3시간은 더 잠들었다. 그 사이 멍멍이는 귀를 긁어댔고 상처까지 나버렸다.
속상한 마음에 한숨을 팍팍 쉬면서 귓구멍 세정을 시작하였다. 멍멍이는 귀가 덮여 있어서 통풍이 잘 안 된다. 안 그래도 거슬리는데 뭘 자꾸 발라대니 귀청소가 끝나면 얼굴을 바닥에 깔아뭉개며 화풀이 한다.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이 날따라 안 그랬다. 내가 미간 주름 대신 팔자 눈썹을 취해서 멍멍이도 반항심이 가라앉았나 보다. 서로가 서로를 안쓰러이 쳐다보며끝내곤멍멍이는신나 했다. 산책 나갈 시간이기는 했다. 멍멍이를 보며 또 한 수 배웠다. 당장의 빡침에 휘둘리지 말고 다가올 행복에나 집중하라.... 팔짝팔짝 매달리는 멍멍이를 안고 멍수레(* 강아지용 유아차)에 태운 후 곶감을 챙겼다. 산책길에 들를 곳이 있어서다.
'토토 할아버지'네로향했다. 토토 할아버지는 슈퍼 겸 복권방사장님이시다. 아기 고양이 토토를 보기 위해 줄기차게 갔던 게 2021년 가을~겨울의 일이다. 원래 복권 사랑 아빠의 단골집인데 반려동물 출입이 자유로워서 할아버지는 나보다도 우리 집 멍멍이를 먼저 아셨다. 그러다 토토의 존재를 알고 나서는깜찍함에 혈안이 되어 나도 방문했다.사랑둥이 토토는 한겨울에 자취를 감췄다. 실종 전단지를 붙이고 당근마켓에 공유도 하고 이리저리 다녔지만 찾지 못하였다. 토토가 사라지니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와 우리 집 멍멍이로 인해 할아버지가 토토를 더 그리워하실까 봐 선뜻 발길이 나서질 않았다. 아빠의 목적은 애당초 복권뿐이니 아빠는 계속 갔는데 할아버지가 어느 날부턴가 페레로로쉐 초콜릿을 내밀며 내게 갖다 주라 하셨단다.
마냥 초콜릿만 받아먹을 순 없어 2022년 추석에는 할아버지 드리려고 호박떡을 샀다. 이땐 나, 아빠, 멍멍이 셋이 함께 방문하였다. 할아버지는 무얼 줘야 하나 고민하셨고 "아이고 참, 과자 한 봉지나 주셔요"라는 아빠에게 박카스 한 상자를 떠안기셨다. 아빠가 안 받는다며 헐레벌떡 나오는데도 따라오셨다. 단골과 사장의 소동이라 생각하였다. 이게 벌써 1년 전의 일이다.돈이 없다며 한동안 방문을 멈춘 아빠는, 지난주말에 페레로로쉐 초콜릿과 함께 귀가했다.추석도 다가오겠다, 자연스레 토토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지난번엔 추석이 우연히 겹친 거였다. 학교 근처에 유명한 떡집이 생겼다기에 들렀다가 토토 할아버지 몫도 사 온 거였다. 이번에는 아예 추석용 선물을 고민했으니 곶감이괜찮아 보였다.
당연히 아빠와 가려했는데, 하필 나와 멍멍이 둘만 있는 날에 곶감이 배송 왔다. 수령 즉시 냉동 보관이라 하여 고민 끝에 멍멍이를 안고 곶감을 챙겨 갔다. 그렇다고 아빠 대신 멍멍이에게 시킬 순 없는 노릇이라 쭈뼛쭈뼛 다가가 인사드렸다.할아버지는 곶감을 보시기도 전에 내 팔을 팍 치시면서 "잘 살았냐!" 하셨다. 순간 멍멍이가 공격으로 받아들이곤 흥분하는 바람에 다 같이 놀랐다. 할아버지는 "멍멍이 때리려고 한 게 아니라 쟤 때리려 한 거야~" 해명하셨다. 저는 왜요...! 그러곤 작년의 박카스보다 2배 크기의 비타오백 상자를 꺼내셨다. "산책 중이라 무거워서 못 들고 가요" 버벅이며 말하는데도 "알아서 들고 가!" 하셨다.단골은 아빠이고, 나는 나름의 어사(어색한 사이)니 곶감만 슥 드리고 나오려 했다. 토토 할아버지는 코앞 거리도 배웅하시며,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멍멍이에게 연신 사과하셨다.
3.4kg 멍멍이와 6kg멍수레에, 멍멍이보다 무거운 비타오백 상자가 더해졌다. 비타오백이라도 집에 갖다 놓고 싶었지만 집으로 향했다가는 멍멍이가 단단히 삐질 거였다. 멍멍이는 짜증 나는 일은 참아도, 한 번 삐지면 오래간다. 다시 나올 거라고 설명할 방도가 없어서 비타오백을 수레 밑칸에 넣고 나아갔다. 멍멍이와 둘이 산책하려면 멍수레가 필수다. 멍멍이가 산책을 거부하던 시절, 갈 때는 안고 올 때만 걷게 하는 연습을 했었다. 산책을 좋아하게 되고 나서도 이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하고만 있으면 안 걸으려 한다. 멍수레가 생기고 나선 장점과 단점이 확실해졌다. 장점으로는 갈 때 힘을 덜 들이고 멀리 갈 수 있다. 단점으로는 올 때 한 손엔 줄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수레를 끌어 참~ 번거롭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에서 비타오백이 더해지니 멍수레가 묵직해졌다. 한 손에 줄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끙끙 수레를 끌며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 없는 4층이기 때문이다.... 멍멍이는 뒷다리가 약해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할 수 없다. 9kg 왕복 8층 정도야 거뜬해진 지 오래나 체감 14kg에 육박하는 새로운 무게는 어려워 보였다. 멍멍이는 무조건 내가 끌어안겠지만 대신 비타오백 다 깨트리고 수레는 굴러가고 허리도 박살나는끔찍한 상상에... 멍멍이와 비타오백 먼저 데리고 갔다. 멍멍이를 집에 두면 이제 6kg의 수레만 남은 건데 나 혼자 내려갔다가는 복도 떠내려가라 울 게 빤해서 멍멍이를 도로 안고 내려갔다. 수레에 태운 후 9kg를 번쩍 들고 다시 올라갔다. 상체 운동과 하체 운동을 톡톡히 한 셈이다.
내가 토토와 놀 동안 할아버지는 우리 집 멍멍이를 예뻐하셨다. 할아버지와는 별다른 말을 섞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와 할아버지가 합세해서 토토를 찾던 나날이 있기에 괜히 날 보시면 토토가 진하게 떠오르실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는 다정하신 목소리시다. 마지막으로 들은 것도 상냥하신 어투의 "오랜만이야~" 였기에 그리 앙칼지게 말씀하실 줄 몰랐다. 할아버지의 색다른 반응에 웃음이 났다. 오랫동안 안 뵈었는데도 알고 지낸 세월이 있으니 어색함의 자리는친밀한 서운함이 차지했나 보다. 애당초 마냥 어색한 사이였으면 나도 '토토 할아버지' 대신 '사장님'이라 불렀을 테다. 단순 한때의 손님에 그쳤으면 공짜로 초콜릿 받을 일도 없었을 거다. 토토 생각에 잠긴 건 할아버지가 아니라 나였다.
할아버지가 많이 늙으신 것 같다는 내 말에 아빠는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21년도에는 주에 서너 번, 22년도에는 몇 달에 한 번, 23년에는 아예 안 간 나와 달리 아빠는 꾸준히 가서 그런 걸 테다.나는 표정을 잘 못 감추는 편이다. 괜히 내색하는 일 없도록 종종 찾아뵈면서 할아버지 변화에 내가 익숙해져야겠다. 초콜릿도 죄송해 하면서 먹는 게 아니라 웃으면서 먹어야겠다. 설에는 비타오백보다 더 큰 선물을 들고 갈 테다. 할아버지는 내게 토토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에게 멍멍이 누나(* 아빠는 멍멍이 아빠). 토토와 멍멍이가 맺어준 소중한 인연을 놓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