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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단 Jul 04. 2024

식민정치를 끝내고 읍면자치를 허하라

대전에서 나고 자란 나는 사실 읍면이란 개념을 잘 몰랐다. 사람이란 본디 살다 보면 본능적으로 공간에 대한 인지능력이 생기고 자기통제가 가능한 생활공간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줄 안다. 거기에는 물리적 거리와 정서적 관계, 제도와 시스템 등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02년부터 옥천신문에서 일하면서 시골 농촌의 공간성을 경험했고 그것은 정말 ‘새로움’이었다. 보통 읍면에는 학교와 면사무소, 보건지소, 파출소, 농협 등의 공공기관과 상가가 밀집되어 있는 면소재지가 있다. ‘메인스트리트’의 공간적 역사성은 오래됐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곳에서는 매 오일장이 서서 서로 구할 수 있는 것을 구했고 교환했으며 저잣거리의 이야기들이 맴돌면서 일종의 정치도 이뤄졌다. 사실 ‘텃세’라는 것은 한 공간에서 부딪치고 싸우고 즐기면서 만들어지는 다소 배타적인 공간적 정서 상태로 그것이 나무랄 만한 일은 아니다. 나름의 보호 장치였고 보이지 않는 지역의 규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들은 이런 제어되지 않는 공동체성을 지독히 싫어했다. 동학농민혁명의 기원도 사실 읍면 공동체성에 기반하고 기인했다. 공동체 안에서 만나고 겪으면서 쌓인 신뢰는 급속하게 혁명의 기운이 퍼져나가도록 도왔다. 사실 읍면은 행정이란 ‘체계’와 주민들의 공동체성이 발현되는 ‘생활세계’의 최전선이다. 이 최전선에서는 아직도 전투가 쉴 새 없이 벌어지고 있으며 주민들 정서에 반하는 관료들은 사실 ‘왕따’를 당하고 암묵적으로 퇴출되기도 한다.


독재정권은 단단한 풀뿌리 공동체가 위협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해방 이후 반짝했던 읍면자치제를 아예 없애버렸다. 1995년 지방자치가 부활할 때 한 단계 더 높은 ‘시군자치’로 만든 이유도 다 이런 것들이 바닥에 깔려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는 물리적 거리, 정서적 관계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리라 확신한다. 자주 얼굴을 보지 못하고 이야기 한번 건네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미디어의 힘은 강해지며 이미지 정치와 소수 엘리트들의 과두정이 반복될 것이다. 사실 누군가 그랬듯이 선거는 과두정을 민주주의로 포장하는 ‘당의정’ 같은 것이다. 필부필부, 갑을병정의 정치가 되려면 진짜 생활세계에서의 정치, 자치가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이제까지 해온 정부의 꼬락서니를 보면 이런 것을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알면서 방해하는지도 모른다. 정부는 ‘시군자치’와 ‘단위마을’, ‘권역단위’ 사업과 정책을 표방하면서 읍면을 분열시키고 해체해왔다. 현재 시군자치에서는 생활세계의 읍면은 정말 하부조직이다. 읍 중심의 군행정은 농촌의 가장 기본단위인 면을 고사시키고 있다. 또한 단위마을 중심의 사업, 권역별 막대한 예산이 투자되는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같은 경우도 면 안에 마을을 하나둘로 쪼개서 분열과 갈등이 있게 만든다. 면에 사는 사람들은 본인들을 ‘옥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이원 사람’, ‘청산 사람’, ‘안남 사람’이라고 부른다. 면세가 강할수록, 지역 정서와 자존감이 높을수록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지역자치를 제대로 혁신하려면 한 단계 낮은 읍면자치를 허하라. 읍면장을 직접 직선제로 뽑고, 평범한 사람들이 읍면의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주민참여예산제를 대폭 확대하여 읍면에 주민들이 직접 논의하여 쓸 수 있는 공적기금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러면서 자치의 구심을 조금씩 아래로 옮기고 교육, 문화, 경제, 정치 등 모든 분야를 스스로 관장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주 말미에 끝난 동이면 이장학교 마지막 강사로 등판한 제주대 신용인 교수도 이와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적극 공감한다. 이제는 ‘국가처럼 보기’에서 벗어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는 작은 공간(객관적 면적은 결코 작지 않다)에서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작은 것들의 정치’가 발현되었으면 한다. 식민정치가 종식되고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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