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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Apr 08. 2021

소설같은 이야기4

또다시이산가족

지난 연말부터 그 사람이 이상하기는 했다.

어느 주말 아침에 남편은 갑자기

"오늘 태환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자. 오랫동안 뵙질 못했는데." 하며 준비하라고 한다.

태환씨는 남편의 사립 국민학교 동창이며 소위 남편의 불알친구다. 서울서 치대를 졸업하고 대전에서 개업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님 홀로 계셔서 내려와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치과를 맡아서 하고 있다.

대전에서 내려왔다며 어느 여름날 수박 한 덩이 달랑달랑 들고 들어와서 속으로 한참 웃었던 생각이 난다. 모습은 사장님 풍채로 퉁퉁하고 둥글둥글한 모습인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수박은 너무 작아 달랑달랑 흔들렸기 때문에 그랬다.

그 집에 들어서니 미리 약속이라도 했는지 그들 부부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고, 안방에 계신 어머니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돋보기를 쓰고 두꺼운 성경책을 읽고 있던 노부인께서는

"철이 왔나? 그래 잘 지냈드나?" 하시며 우리 애들의 큰절까지 다 받으시고는 나가 보라 하시는데 남편이

"어무이 저희도 교회 나가려고 예" 하는 것이 아닌가? 오잉? 이게 뭔 소리?

머릿속이 번개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든다. 집안이 얼마나 시끄러워지려고 이러나. 어머님이 다니시는 성당에 나를 데리고 나가려고 하실 때 본인은 바쁘다며 손사례를 치며 거절했고, 나에게는 원하는 대로 하라면서도 남편이 안 가는데 다닐라고? 했다.

시누이와 시동생 가족들은  어머니의 바람으로 모두 교육을 받고 영세를 받아 가톨릭 신자이다.


돌아오는 길에 의논도 없이 교회 간다고 해서 마음 상한 것은 아니냐고 묻는다. 나야 기독교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일은 괜찮다고 하며 아버지와 형제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물었다.

"상관없지 않냐? 종교는 한 가족이라도 똑같을 필요가 있니? 우리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지."

어머님이 살아생전 그토록 큰 아들을 가톨릭에 입문시키고 싶어 하셨는데 왜 이제서 교회로 간다는 것인지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다.

 일요일 아침에 우리를 데리고 친구가 다니는 부전동에 있는 **교회로 갔다. 친구랑 친구 와이프는 잘 왔다며 성경책을 선물하고 우리를 새 신자 석에 앉혔다. 그들은 다섯이나 되는 온 가족이 그들로 인해 교회로 인도되어 만면에 웃음을 띄며 좋아했다.

 예배가 시작되고 찬송을 하게 되면서(큰애와 둘째는 부산에서 기독교 재단인 중학교를 나왔다.) 아이들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도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찬송을 하게 되니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격하게 올라 울음이 터지려는데 세 딸이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몇 소절 부르지도 못하고 저렇게 우는지 이해가 갔다. 그런 우리를 보고 뒤에 앉아 있던 친구 와이프는 은혜받았다며 좋아해 줬다. 무슨 뜻인지 몰랐고 그저 낯선 사람들 틈에서 많이 울은 것이 부끄러워 얼굴을 똑바로 들기가 어려웠다.




 그때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던 교회였지만 매주일 새 신자 교육을 한 달 동안 받다 서울로 오니 교회는 다녀야겠어서 아는 동생과 의논했다. 큰 교회를 다녀야 한다며 근처에 사는 언니뻘 되는 사람을 소개해 주어 큰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처음엔 주일마다 우리를 태워 가곤 하다 교회버스를 시간 맞춰 이용하게 되었다.

남편이 우리에게 가장 잘한 것은 교회에 데리고 갔던 것이라며 스스로 위안을 하며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둘째는 전주에 있어서 함께 갈 수는 없었지만 막내와 함께 다니며(큰 애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직 잘 모르는 하느님에게 매달리며 기도 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고립무원, 우두망찰, 이런 단어 외엔 생각이 안 난다. 아무도 구해 줄 수 없는 무인도 같은 곳에 우리가 버려진 것 같다. 정신이 혼미하고 얼떨떨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에서 겨우 정신줄을 잡고 그나마 우릴 알아보는 사람 없는 곳에서 신에게 속사정을 토로하며 기도하는 일만이 유일하게 내게 위안이 되었다.

 

 아이들과 나는 차츰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베이비시터 일은 계속하고 있었고 이제는 파트타임보다 수입이 더 많아야 했다. 오래 일 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했는데 마침 한 곳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아기 엄마가 인터뷰하고 나더니

"소진이가 이모를 잘 따르네요. 이모님 인상이 순하게 보여서 좋아요." 하면서 18개월 된 여자 아이를 돌봐주게 되었다. 딸만 셋을 키웠기 때문에 여자아기를 돌보는 일은 편했다.

아침에 일찌감치가서 소진이를  밥도 먹이고 옷을 갈아 입히면서 어린이집 등원시키고 하원 할 때까지 집에서 아기 먹을 음식도 장만해 달라고 한다. 하원 시켜서 씻기고 저녁 만들어 먹이고 나면  부부 중 누구라도 퇴근하여 들어오면 일이 끝나서 퇴근을 한다.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몸을 혹사시켜야 견뎌낼 수 있는 나날이라서 아기에 관련된 일만 해야 하지만 눈치껏 어른들 반찬도 만들어 주고 할 수 있는 집안일까지 해주곤 했다.

소진엄마는 유명 법정대학을 졸업하고 듀퐁사 다니다 퇴사를 하고 개인 회사를 차려서 승승장구하는 것 같아 보였다. 소진 아빠는 KTX 만드는 곳에서 근무했는데 프랑스 테제베 건설한 회사의 한국지사에서 일한다고 했다. 둘 모두 외국어에 능했고 우스개 소리 같지만 내가 있을 때 싸워야 한다면 영어를 하면서 싸웠다. 재미있는 부부다.


 몇 개월 동안 별 일 없이 시간은 흘렀다.


 그동안 부산에서 한 공간에서 시어른들과 살면서 두통과 편두통 몸살 기운에  하루라도 진통제 없이 살아갈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애들하고만 살게 되니 두통약 복용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스트레스였나 보다.  둘째가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그 날은 학교에 엄마가 참석하는 행사가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아 엄마가 또 아픈가 보다. 혹시 학교 오는 길에서 쓰러졌나 살피며 집에 왔다고 한다. 체력이 달리고 매일 열이 나서 아스피린을 상시 복용했다. 20년 넘게. 아이들도 숨죽여 살다가 이젠 제대로 숨을 쉬고 사는 것 같았다.

 여늬 집 아빠들처럼 애들과 슬렁슬렁 어울려 재밌게 놀아 준 적도 없는 사람, 왠지 농담하며 장난치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장난이 조금 심해진다 싶으면 정색을 하고 애들과 싸우려 든다거나, 특히 막내는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 할 말이 막히면 그때서야 "나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야"하며 어쩌다 속내를 보이기도 했다. 부모, 어른이 언행일치가 안되면 아이들은 크게 실망한다. 자신이 너무 잘 났다고 생각을 하는지 늘 각을 세우고 덤비는 사람같이 보였다. 그런데 밖에서는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다. 남들에게는 너무 친절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 일색이고 한 번씩 부부 동반 동창회에 참석하면 친구들은 남편을 보고 "만 남편의 적"이라고 한다. 와이프를 어찌나 끔찍이 위하는지 소문이 자자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에 능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들은 모른다. 함께 들볶이며 살아 보면 다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누가 아랴.


부모 앞에서는 언제나 "네. 네." 예스 맨이었고 돌아서면 내 앞에서 부모의 불합리함에 대해 불평만 일삼았다. 한 번도 아니라고 따지지도 못하면서 자기는 그저 착한 아들 효자로만 있고 싶어 했다. 어려운 일은 내게 떠밀었으며 방패막이도 되어 주지 않았다. 내게 형제들과는 늘 물과 기름처럼 돌게 했다. 형제들에게 딱 할 만큼만 하게 했고 친절하거나 정을 나누는 것처럼 보이면 그들이 돌아간 뒤에 왜 그러느냐고 볼멘소리로 따져 물었다. "왜 사이좋게 지내면 안 돼?" 하면 그러지 말란다. 맞이로서 힘들게 할 일은 다 하면서도 좋은 소리는 별로 듣지 못한다. 남편은 내가 가족 중 누구 하고도 친해지는 것을 싫어했고 오로지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저만 의지하고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무슨 쓸데없는 열등의식인지 원.


내가 사위들에게 원하는 것은 별로 없었다. 시부모와 딸 사이에서 운전을 잘하기만 바랬다. 딸이 곤란하지 않게 소위 커버를 잘 쳐주라는 것이다. 남편이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야 아내가 편한 것이기 때문에.

 



둘째와 막내는 그런 와중에도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부분 장학금을 타게 되었다. 방학 때마다 올라와 편의점 알바를 해서 등록금에 보탠다고 시급이 더 높은 밤 알바를 했다.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지냈다. 한창 꿈의 나래를 펴야 할 시간에 편의점 아르바이트한다고 밤새워 일을 하고 돌아와 낮에 잠깐 눈을 붙이는 그런 생활을 하고 다시 전주로 내려가곤 했다. 막내는 정신과 약이 무기력해지고 얼굴이 부석부석해지는 부작용이 있어 보여 그 뒤로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막내는 지금에서야 얘기지만 어린 마음에 자신 때문에 부모가 이혼했다고 생각을 했단다. 왜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했냐고 하면 보통의 아이들은 아빠의 그런 행동에서 그런 상처를 입는다고 하면서 지금은 아빠가 사이코패스였구나! 한다.


 소진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아파트 옆 동으로 이사를 오셨다. 나를 볼 때마다 소진이랑 이모랑 궁합이 잘 맞는 모양이라며 밥도 잘 먹고 잘 진이가 잘 자란다고 좋아하셨다. 할머니가 오셔도 진이가 이모만 찾고 자기를 데면데면 대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동물하고 애들은 나를 좋아했다.

 그런데 소진아빠가 외국계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니 온 가족이 영국으로 나가서 1,2년 있게 된다며 진 엄마가 얘기를 꺼냈다. 소진모는 돌아오면 이모님께 연락을 드릴게요. 하며 마지막 날 일을 한 뒤에 아쉬운 이별을 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베이비 시터 일이 익숙해서 괜찮기는 한데 수입이 적어서 아무래도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둘째가 겨울 알바를 해서 모은 돈 일부를 강아지를 분양받겠다고 한다. 가정견으로 새 학기에 맞춰 내려 갈대 가지 예방접종까지 다 맞추도록 한 다음에 분양받아 예쁜 요크셔테리어 토이종 호야를 데려왔다. 2학기부터는 기숙사를 이용하지 않고 하숙을 했는데 점점 밥을 새로 해주지 않고 하루 종일 꽂아 놓은 밥솥의 밥을 주고 반찬도 부실해져서 자취를 해보겠다고 한다. 그러면 강아지라도 곁에 있어야 덜 외로울 것 같다길래  편한 대로 하라고 아이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나중에 내려가서 필요한 가전제품을 사주고 올라왔다. 성격이 좋아서인지 객지에서 온 친구들이 많아 늘 함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 친구들과는 지금도 서로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서울, 이천, 가평, 천안 등지에서 전주로 왔으니 타지에서 서로 의지하며 돈독해졌으리라. 생명공학과를 다녔는데 적성에 맞는지 재미있어하며 올 때마다 엄마에게 새로운 분야의 곤충학, 식물학 등의 얘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둘째는 학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휴학을 하게 다.


막내가 겨울 방학이 되자 아빠에게 잠시 다녀오겠다며 허락을 구한다. 막내는 제 아빠랑 언니들과는 달리 조금 친했다. 나이가 어릴 때 애 아빠가 되서인지 또 말을 냉소적으로 하는 타입이라서 그런지 위의 두 딸들 하고는 잘 못 지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말을 뜬금없이 함부로 해서 딸들이 상처를 입을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장에 탈이 나서 설사 때문에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가는 딸에게

"쟤 산부인과에 가야 하는 거 아냐?" 라며 함부로 말한다. 예민한 나이의 애가 어떻겠는가?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말리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위의 애들하고는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상태에서 막내를 가리키며

"지금 이 나이가 딱 수영이를 키울 나이인가 보다."라고 그렇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 막내랑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지냈다.

만나고 오라고 보냈다. 그런데 내려가서 전화로 한다는 말이

"엄마, 아빠가 독일로 유학 보내 준대. 어떻게 할까?"

"정말 보내 준대? 엄마 형편에 유학을 보내주지는 못하고, 네가 유학이 가고 싶으면 가야지."

독일 뮌헨 대학에 교수로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곳으로 유학을 보내겠다고 막내에게 곧 보내줄 것처럼 말했다. 그 통화 후에 막내가 올라오지 않으니 큰 애가 알바하고 있는 둘째를 데리고 부산으로 가서 막내를 데려 오겠다며 내려갔다. 그사이 나는 지인이 경기도 포천에 있는 사무실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고 해 그쪽으로 가서 일을 하기로 했다. 애들도 함께 놀러 가서 밥도 먹고 온 적이 있어서 애들도 다 아는 곳이다.

 

며칠이 지난 후에 막내는 오지 않고 호야를 데리고 큰애와 둘째가 포천으로 왔다.  (다음 계속)


*그림: 화가 임지민 님.


*본문에 사용된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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