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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Apr 07. 2021

소설 같은 이야기 3

남편의 결혼

한 달여를 이혼해 달라고 조르는 남편에게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세 딸들을 앉혀 놓고 의논을 했다.

큰 애는 대학을 졸업했으니 서울 가서 직장을 구하면 됐고, 우선 일 할  곳도 정해져 있었지만 대기업으로 입사서류를 넣고 있던 중이었고, 둘째는 대학을 지원하는 문제로 부산에 있는 대학을 성적에 맞춰 가고 싶은 대학을 알아보고 있었다. 막내는 고등학교 입학을 준비해야 하는 과정에 있는 마음이 어수선한 상태에서 갈피를 못 잡고 시달리고 있으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셋 중에 큰애와 막내는 요즘 이혼 가정도 많지만 2년 뒤에 모여 살면 되니 우선 우리가 먼저 올라가서 살고 있으면 안 되겠냐고 한다. 그러나 둘째는 절대로 이혼해 주면 안 된다며 반대를 한다. 큰애와 막내는 할아버지와 워낙 많이 부딪치며 살다 보니 숨통 막혀 온다며 할머니와 함께 살지는 안 했어도 할머니의 부재로 인해 할아버지 때문에 더 힘들다며 우리끼리 살기를 원했다.

둘째는 애초부터 그런 일을 왜 꾸미느냐며 화를 냈다.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냥 살아가면 되지. 이제 와서 꼭 가짜 이혼까지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냐며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정이 많은 둘째는 할머니 할아버지 하고도 무던하게 잘 지내는 아이였다. 늦게 귀가한다며 턱도 없이 야단치는 할아버지한테 싫은 소리를 한마디 정도 할지언정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급한 것은 대학을 정해서 원서부터 접수해야 하는데 애 아빠라는 사람이 딸의 대학은 신경 쓰지 않고 그러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그런데 자꾸만 지원 대학을 부산이 아닌 지방으로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 애보다 더 낮은 성적의 애들도 부산에 있는 대학에 지원을 한다는데 왜 자꾸 연고도 없는 지방의 대학을 알아보는지 이해가 안 갔다. 왜 그러느냐고 따지면

"알지도 못하면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대학의 교수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했더니 전주에 있는 대학에 원서를 넣으면서 안정권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 먼데로 보내냐고 따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성적이 그것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평소에 애들 공부는 알아서 하는 주의였고 한 번도 공부하라는 말은 하지 않고 키웠다. 공부 외의 것에 신경을 더 써주는 엄마로서 지냈다. 미술전시에 데려가고 박물관을 다니며 음악 연주회에 가야 한다면 보내는 엄마로서 공부하라고 학원으로도 내 몰지 않았다. 공부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며 함께  비디오 빌려 영화 보고 만화책을 으며 울고 웃기도 하면서 늘 책은 가까이하게 했다.  시어른들의 식사를 때에 맞춰해드려야 하기 때문에 남편이 우리를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주말도 영락없이 하루 세끼 차려야 하고 시동생이나 시누이 가족들이 들리면 난 꼼짝없이 그들을 위해 주방 봉사를 해야 했다. 늘 그래 왔으니까. 아주 당연하게 부모님 뵈러 온다는 구실엔 나의 희생이 그만큼 따라야 했다.

 

 몸은 힘들어도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고 살았다. 내 어머니 세대가 그렇게 살아오셨으니까.

매일 이혼을 하자고 다그치는 그에게 그렇게 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사실 더 컸는지도 모른다. 20대 때 원래의 밝고 명랑한 나, 혼자 인사동 갤러리를 돌며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거나 여행을 다니며 자유분방하던 나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기도 했다. 중년의 여자가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감옥 같은 이 집에서 나야말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결국 남편에게 손을 들고 약속은 꼭 지키라는 당부를 하고 서울로 갔다.

생활비는 예전처럼 그대로 주겠다. 변하는 것은 없다. 월급 카드도 갖고 올라가서 살아라. 주말마다 올라갈게!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올라갔다. 둘째는 전주에 있는 대학으로 가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고, 막내는 서울의 고등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보내고 싶은 학교 에 반 지하 빌라를 구해서 이사를 했지만 교육청에서 그 학교는 결원이 없어서 마을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배정이 되었다.

서울 생활이 시작되고 주말만 기다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주말에 그는 오지 않았다. 전화 통화도 어려웠다.

결혼해서 사는 동안 남편 말만 듣고 살아온 것이 큰 일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과 어려운 문제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져 버렸다. 남편만 기다리고 그저 살림만 할 줄 아는 여자로 변해 있었다니 그 총명했던 나의 실체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주말에 온다 했으니 평일엔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예전에 알 던 분들을 만나보며 타진을 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고, 신문사에서 쟁쟁하던 분도 구조 조정으로 나와 계셨고, <직원 구함> 팻말을 보고 들어 가서 면접을 보았지만 적지 않은 나이였고 받아 줄 곳은 없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에 띈 베이비시터 모집 현수막을 보고 저걸 해야겠다. 딸 셋을 키웠으니 애들 돌봐주는 일은 당장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교육을 받고 보건소에서 혈액검사 등 기본 검사를 하고 보건증을 받고 바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주말은 피해서 평일에만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며 지냈다.




그가 결혼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ㅇㅇ씨 결혼식 했다고 **씨가 다녀와서 우리에게 얘기해 줬어. 어떻게 된 일이야?"

"나도 몰라. 그럴 리가 있나? " 믿고 싶지 않았다. 창피하고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지? 그 생각만 났다.

하늘이 노래지고 가슴은 쿵쾅거린다. 결국 이렇게 하려고? 이것이 수순이었나? 그런 줄도 모르고 애 아프다고  전화했을 때 그렇게 매몰찼던 거구나. 어쩌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날 위한다며 그야말로 날 꼬셨지만 사람이 품은 생각은 어느 정도 표정이나 행동에 표출이 되기 때문에 짐작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주말마다 온다던 남편은 그동안 딱 한 번 와서 밥 한 끼 먹고 갔다. 전주에 있는 딸이 올라오는 날에 다녀갔으면 했는데 불쑥 왔다가 가 버린 게 끝이었고 막내가 아파서 전화 한번 했다가

"내가 의사도 아닌데 나더러 어떡하라고? 왜 나한테 전화했냐?"며 고함을 치는 바람에 놀래서 전화를 끊고는 망연자실했다.

사춘기의 막내가 이 일을 견디어 내기에는 워낙 힘든 일이어서 마음의 병이 온 것인지 쓰러졌다. 학교에서 쓰러졌다고 연락이 왔고 친구들이 부축해서 데리고 왔다.

남편이 의대에 몸 담고 있기도 했지만 새로 생긴 한의대에 해부학 강의를 하기도 했지만 병원 가는 것을 싫어했고 자기가 가족의 주치의 노릇을 해왔다. 남편이며 애들 아빠이니 당연히 애가 아파서 전화했는데 그동안 자신이 행했던 일을 싹둑 잘라먹으며 욕을 하고 끊어 버리는 것이다.


 우선 막내의 담임을 만나 결석 최대 일수를 알아보고는 사정 얘기를 한 뒤에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이제 나는 없다. 우선 막내부터 낫게 해야지. 아픈 아이 앞에서 나는 다시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누구보다 해맑고 건강하던 아이가 쓰러질 정도로 아프다면 보통일이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방배동에서 동물병원을 하는 고교 동문이자 대학 동창이 호야 진료로 유일하게 만나는 사람이었는데 막내의 일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고 친구가 돌변한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고 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친정 식구들에게도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어 피했다. 애들이 보고 싶어서 오셨던 엄마는

"피죽도 한 그릇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말랐냐? 서방은 한 번 안 오니?" 하셨지만 바빠서 못 온다고 얼버무렸다. 그때 살이 너무 빠져서 체중이 42kg 정도 나갔는데 유일하게 의지하며 만나는 지인 동생이

"언니 뼈만 남아서 두 눈만 살아 있는 것 같아. 무슨 일 있어?" 하며 의아해했다.

사실 사람들에게 남편이 시집살이 그만 하라고 우리를 서울로 보냈다고 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남편을 자상한 남편이며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냐며 칭찬 일색이었다. 나의 알량한 자존심에 떳떳하게 이혼한 것도 아니어서 뭐라 말도 못 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는 심정이기도 했다. 지 무덤 지가 팠지!


 막내에게 엄마로서 할 수 있는 말은

"공부 안 해도 돼. 우리 시골 같은 데 가서 살까? 일단은 병원부터 가서 치료받자"

 병원에 데려가서 아프다는 가슴 때문에 심전도, 뇌파검사까지 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며 청소년이 겪는 성적 때문일 수 있다며 정신과를 소개해 줬다. 요즘은 감기 걸렸을 때 내과 찾는 일처럼 정신의학과를 찾지만 그때만 해도 정신과에 다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우선 내 아이가 어떻게 아픔 것인지 알아야 하니 이것저것 갈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정신과에서는 막내가 우울증인 것 같다며 나와도 상담을 했다.  어머니도 우울증이니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내가 이겨 낼 수 있다며 막내의 처방만 받아 약을 지었다.

이제부터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 애들을 지키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막내가 이런 줄도 모르고 오지 않는 남편만 바라고 있었단 말인가? 내 속은 타 들어갔지만 애들 앞에서 내색은 할 수 없었다.

남편은 서서히 생활비도 끊어 버리고 급여 카드를 보내 달라고 했다. 갱신을 해야 한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또 애를 정신과에 데려가면 어떡하냐고 따졌다. 나중에 결혼할 때 힘들지도 모른다면서. 너나 잘하세요!



 

막내를 데리고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가장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리스트에 적었다.  공부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어 하루에 한 가지씩 둘이 놀이 공원에도 가고 박물관에도 다니면서 그냥 놀았다. 엄마는 딸이 중요하지 공부 잘하는 사람 필요 없다는 말을 해줬다. 그동안 딸은 학교 도서실에서 밤늦게 까지 공부하면서 항상 막차를 타고 왔다.  

23년 만의 서울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너무 많이 변해서 내가 살던 서울이 아니라 완전 다른 도시에서 사는 것 같았는데 말로만 듣던 강남 한 복판에서 학교를 다니는 내 딸이 겪을 고통은 짐작도 못한 못난 엄마였다.

부산이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인데도 반애들은 시골에서 왔다며 무시를 했고, 학원도 안 다니고 과외도 받지 않는 아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온통 성적 얘기뿐이어서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또 제 아빠가 나온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 그래야 아빠한테 복수하는 거라고 생각을 했단다.

그동안 급식이 맛이 없다며 애들에게 주고 점심도 굶으면서 지냈다고 이야기를 했다. 엄마의 처지가 저를 신경 써 줄 형편이 안된다고 생각해서  혼자 아픔을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다.


 둘이서 정동진 여행을 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막내는 매일 제 아빠가 출근하는 길에 학교를 데려다주어서인지 아빠랑 정도 많이 들었고 제 언니들보다는 의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막내는 어렸을 때부터 논리적으로 말을 잘했다. 언니들도 어쩌다 말다툼을 하면 하도 잘 따져서 이긴 적이 없다. 위로 언니들이 있어서 눈치도 빨라 엄마가 싫어하는 행동은 안 했고 무엇이든 제 손으로 하는 독립적인 아이였다. 그런 딸이 마음의 병을 얻어 이렇게 아픈데 엄마인 나는 그동안 무얼 했다는 말인가? 자책감이 들었다. 최대한 막내딸의 마음을 풀어 주고 몸이 좋아지도록 신경을 썼다.

그렇게 엄마와 딸은 시간 날 때마다 연극을 보러 가기도 하면서 마음을 추슬렀다.

다시 학교에 가겠다고 할 정도로 몸은 좋아졌다. 가슴에 오던 통증도 없어졌으며 어지럽던 것도 차츰 나아졌다. 먹기 싫은 급식 대신에 매일 도시락을 싸줬다. 도시락 뚜껑을 열면 매일 기쁨과 탄성이 나오도록 해줬다. 우선 예뻐야 하고 맛이 좋아야 한다는 나의 지론대로 열심히 도시락을 만들어 줬다. 막내는 차츰 기운도 차리고 반 아이들이 너희 집은 매일 잔치하니? 하고 말을 한다며 내게 전해준다. 막내에게 온 정신을 집중해서 케어하는 동안에 둘째가 가끔 주말에 올라와서 왜 아빠가 안 오시냐고 한다. 우리는 둘째에게 남편의 결혼 사실을 말 않기로 했다. 혼자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데 상심하고 힘들 거라고 우리만 알고 지내기로 했던 것이다.


한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어 기숙사 물건을 전부 택배로 올린 다음에 둘째가 올라왔다. 2학기에 다시 신청을 해서 통과되어야 기숙사 생활이 가능한 시스템이어서 일단 짐을 빼는 것이다. 우리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 못 챌 둘째가 아니어서  얘기 끝에 사실을 알게 된 뒤에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차례 통곡 아닌 통곡을 했다.

둘째는 자기만 아무것도 모른 채 편히 지냈다고 그것이 마음 아프다며 펑펑 울었다. 엄마랑 언니, 동생이 얼마나 마음 아팠겠냐며 하염없이 우는 바람에 우린 그동안 애써 참아 왔던 슬픔의 덩이를 주체 못 하고 또 넋 놓고 울었다.



 애들이 모르게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밤마다 동네 골목을 샅샅이 돌며 내게 일어난 일을 부정하고 싶었다. 두꺼운 안경을 낀 남자를 마주치면 남편인 줄 알고 놀래기도 했고,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나면 남편 목소리로 들리는 환청을 여러 번 겪기도 했다. 부부가 다정히 걸어가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미친년처럼 밤이고 낮이고 걷고 또 걸으며 보낸 날들이 헛웃음이 났다. 이렇게 살면 뭐하나, 잘못한 일도 없이 배신을 당했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결국엔 이렇게 살아서 뭣하나, 위에 둘은 성인이 되었으니 막내만 대학에 들어가면 나는 이 세상을 하직하리라.


 시간을 내어 무료 변론을 하는 가정법률 상담소에 찾아가 남편과의 문제를 상담을 했다. 이혼무효 소송을 할 수 있는 기간이 끝났고, 서류상으로 협의 이혼을 했기 때문에 위자료를 받을 수는 없지만 소송을 해서 남편 앞으로 재산이 없는 것으로 나오면 월급을 차압하는 방법으로 양육비는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애들 아버지인데 그렇게 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무지에서 온 피해를 나만 겪는 것이 아니라 내 딸들이 고스란히 겪는다는 것이 가장 가슴이 아팠다.  이혼 서류도 생각해 보고 구청에 제출하라고 했는데 바로 제출했으며 3개월이 지나길 기다려 온 가족이 모여 러시아 댄서 매니저와 선상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이다.

 변호사의 말을 듣고 소송을 해볼까도 생각은 했지만 소중한 딸들이 증언을 위해 법정을 드나들게 되면 애들의 입장이 염려되었다. 단 몇 시간 만에 땅! 땅! 땅! 망치를 두드리며 끝날 일이 아닐 것 같아서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애들에게 아버지 노릇도 안 하는 철면피 같은 그 사람의 민낯을 세상에 밝혀야 할까 고민하는 순간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면 그때 소송을 하고 싸움을 했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뼈 맺힌 후회의 날을 맞았던 것이다.

아버지와 같이 살기 싫은 본인의 마음은 숨기고 나를 핑계 삼아 그렇게 시나리오를 짜고 둘째를 부산에 있는 대학에 안 보내고 이산가족을 만든 것은 그의 계획에 들어 있었던 것 중의 하나였다. 모든 것은 몇 년이 흐른 뒤에 알게 되었다.

이혼하면서 위자료와 많지도 않은 재산 분할하기가 싫어서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워 그렇게 한 것이었다.


약속했던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이 남자와는 영원히 남남이 되었다. (다음 계속)

 





*그림 :화가 임지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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