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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Apr 09. 2021

소설 같은 이야기 5

의심하지 못하는 나의 병

 큰 딸과 둘째는 부산에서 며칠 보내고 와서는 저희들에게 남편이 한 얘기를 전해준다.

"아빠가 회사에서 받는 월급을 맞춰 준다고 부산 와서 아빠 일을 도와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 큰 애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큰 애는 그 당시 SK의류 사업본부에 공채로 들어갔다. 지금은 없어진 브랜드인데 중저가 의류매장 강남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의류사업본부라고 해서 대단한 것인 줄 알았는데 결국은 매장에서 판매 영업을 하고 있었으니 제 아빠 말에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지만 애들에게 무엇을 강요한 적이 없다. 큰 애는 대학 졸업도 했는데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이래라저래라 간섭하기는 싫었다.

그리고  둘째가 말한다.

"엄마, 아빠가 전주에서 방값 나가고 자취하면서 학교 다니는 것보다 아빠 있는 대학에 편입시켜 준다고 오라네. 교직원 자녀는 등록금도 안 들어간다니까 부산으로 옮길까?"

"그럼 처음부터 부산에서 지가 근무하는 학교에 원서를 넣지. 전주까지 보냈다가 오라는 것은 뭐야?"

"그건 그 여자랑 결혼도 해야 하고 내가 같은 부산에 있으면 방해가 될 테니까 그런 거 아니었을까?"

애들은 순하고 착해서 막내를 데리러 갔다가 오히려 제 아빠가 저희들에게 솔깃한 제의를 하니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이 느껴져 흔들리는 것 같았다. 엄마랑 헤어지는 게 가장 마음에 걸려 고민하는 것 같아 보여, 난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좋겠다. 둘째는 공부를 계속해야 하니까 인제대학으로 가는 것은 좋은데 김해에 있는 대학까지 다니려면 괜찮을까 그것이 걱정된다고 했다. 의과대학은 부산에 있지만 일반대학은 김해에 있기 때문이다. 자취하는 방값과 등록금을 남편이 내주고 있었는데 부산에 함께 지내면 절약이 될 것 같아 그런 계획을 세웠는가 보다.

서로 떨어져 지내겠지만 별일이야 있겠나. 가장 어린 막내가 걱정이 되어

"어떻게 해준다는 거야? 독일로 유학 보내는 것은 사실인 거지?"

남편과 얘기를 나눌 수는 없으니 아이들을 통해 대략 얘기를 듣는 수밖에 없어 갑갑하기는 하지만 제 자식인데 해주겠지 생각했다.


  막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병원을 다닐 때 큰 딸은 이사를 가자고 했다. 아직 기한이 안돼서 이사를 할 수가 없다고 하니

"수영이가 아픈 것이 이 반지하 방 공기가 나쁜 곳에서 살아서 아픈 것 같아, 밝은데로 이사 가자"고 적극적으로 권했다.

큰 애의 말을 들으니 좋지 않은 환경 때문에 막내가 갑자기 아픈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어서 생전 처음 살아보는 반지하 방이 기가 막히기도 했고, 큰 살림을 대부분 이삿짐센터 차에 그대로 돌려보내고 당장 필요한 것만 방에 옮겨 살던 비참함에 남편과의 일도 통탄할 일이었고 정신이 없는 와중인데, 딸은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자기만 믿으라며 방을 보러 다녔다. 얼마 후에 볕이 잘 들고 환한 방을 구했다면서 계약금을 달라고 해서 맡겼다. 그리고 집주인에게는 이사하겠다고 얘기를 전하고 기한이 되기 전에 나가는 거라서 새로 들어올 사람의 복비를 내야 한다고 하여 복비까지 주고 보증금을 받아 큰 애에게 줬다.

그리고 역삼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빌라 5층이라서 햇빛은 사방에서 들어왔고 방도 넓고 환해서 살 것 같았다.




난 수년 동안 경제 활동도 안 해 본 데다가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만 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사실 몰랐다. 깜깜했다. 전 빌라에서 받은 보증금 그대로 주고 이사 들어왔다고만 생각하고 애들하고 살아야 하는 일에만 집중해서 일자리 구하고 일하러 다녀야 했어서 큰 딸만 믿고 큰 딸이 하자는 대로 했다.

한동안 나사가 한 개쯤 풀린 것처럼 살았다는 기억이 될 정도로 난 너무나 허술하게 세상을 살았다는 것을 나중에 또 깨달았다.

"너희가 부산에 가면 집은 어떡하지?"

 큰 애가 집은 내놓고 보증금 받으면 엄마에게 보내주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다음에 이삿짐을 내가 일하는 사무실로 가져왔고 2층의 빈 사무실에 옮겼다. 사정이 딱해진 내게 지인이 편의를 봐주어 많이 고마웠다. 그리고 애들은 호야만 내게 남기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학교를 퇴직하고 동물병원을 차린 애들 아빠는 집에 고양이를 몇 마리 두고 있었나 보다.

호야는 페르시안 고양이가 많이 있어서 같이 있을 수가 없고 산책시킬만한 환경이 안되어 호야가 고생을 했단다. 엄마에게 맡기는 것이 미안하지만 호야를 위해서는 엄마랑 있는 것이 낫다고 다. 호야는 날 좋아하기도 했지만 나도 워낙 호야를 좋아하고 애들도 없는데 호야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둘째는 마음이 어땠을까?

 

 방배동 살 때 주말에 둘째랑 호야가 와서 지내다 가고 나면 막내가  많이 허전해한다고  큰애가 올블랙 잉글리시 코커스패니얼을 얻어와 키웠다. 코코라고 이름을 지어 부르며 정성으로 키웠는데 그 애를 막내가 엄청 좋아했다. 그 녀석은 어찌나 산만한지 케어하기가 엄청 힘든 쾌활, 발랄, 최고의 활동적인 강아지였다. 코코는 날씬하고 예쁘게 생겼는데 특히 눈이 깊은 호수처럼 빛나는 눈을 가진 아가씨로 멋지게 자랐다. 밤마다 근처 공원에 데려가 달리기도 시키고 놀아 주고 했는데 몰티즈랑 산책 나온 아저씨 한 분이 코코가 너무 멋지게 생겼고 탐이 나는 강아지라며 욕심을 냈다. 고민 끝에 우리의 형편상 힘들기도 하고 좋아하는 아저씨에게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는데 코코 입장에서 보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는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이 되었으니 코코를 다시 데려다 키울 수가 없었고 호야만 잘 케어하기로 했다.

그렇게 호야랑 나는 포천에서 하루 24시간을 함께 붙어 지냈다. 호야랑 함께 지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근처에 산정호수가 있어서 시간 날 때마다 호야랑 산책을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밤낮으로 걷는 일로 시간을 보냈는데  더군다나 시골에서는 볼거리도 없었거니와 휑한 마음에 무얼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겠어서 그냥 사무실에서 단순하게 하루 일하고, 하루 놀고, 노는 날은 산책으로 소일했다.

나 자신 초라해서 친구들을 만난다거나 친정에 부모님을 뵈러 가지 못하고 지냈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냥 이 한 몸 어디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뿐이어서 가끔 잘 지내고 있다는 연락을 드리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역삼동 방 보증금이 오지 않았다.

큰 애 말로는 집주인이 아직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다리다 못해 휴무일에 앞에 있는 애견 샵에 호야를 잠시 맡기고 서울에 나가 역삼동 빌라 주인을 만나 보려고 했지만 큰 애가 다 알아서 한 일이라 내게는 전화번호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한 번쯤 계단에서 집주인과 마주쳤을 때 큰애가 "우리 엄마세요" 말만 하고 인사하려는 나를 그럴  필요 없다며 등을 밀어 집으로 들어가게 했다.

 "아니 왜 인사도 못하게 해?"

"엄마가 상대 안 해도 돼. 내가 다 알아 하잖아."

그랬다. 그렇게 넘어갔다.

언젠가 지나는 길에  큰애가 한 부동산 사무소를 가리키며  계약했다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번지와 빌라 이름을 대며 집주인과 통화를 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왜 그러시냐. 함부로 가르쳐 드릴수 없다는 소장에게 순간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돈을 빌려준 친구가 얼마 전에  501호에 이사 왔다고 해서 찾아가니 없어서 그런다고 하니 주인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주인에게 전화해서 사정 얘기를 하니

" 그 집 사람들 이사 갔어요. 월세도 몇 달치 안 내고 밀렸는데 없어졌어요" 한다.

"월세요? 전세 아니었어요?"

"전세 아녜요. 월세 150만 원이에요"

엄마이면서도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간도 크지 월세 150만 원인 집에서 어떻게 살 생각을 한 거야?  딸이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거지?

엄마가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을 눈치라도 채면  큰 애가 나쁜 맘을 먹을까 봐  그것만이 걱정이 되었다.

둘째에게 전화를 해서 잘 있냐고 안부를 물으며 살던 집 보증금에 대해 주인에게 들은 얘기를 전해주며  큰애가 알면 혹시 잘못 생각할 수도 있으니 당분간 말하지 말라고 했다.

도대체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회사도 잘 다녔는데 무슨 일에 연루라도 된 것인가? 갑자기 이사하자고 하더니 돈이 얼나마 어떻게 필요했길래 엄마와 동생들을 속이는 일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기운 빠지고 어깨가 축 늘어져 포천 사무실로 다시 돌아와 애견샵에 호야를 데리러 갔다. 그곳 약국의 약사 딸이 운영하는 애견 샵인데 일찌감치 서울에 있는 애견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해서 부모가 애견샵을 차려 주었는데 야무지게 일을 하고 있었다. 마침 호야를 너무 좋아해 줘서 금방 친해졌다. 다른 집 맏딸은 이토록 자신의 가게를 차려 일도 잘하고 있는 데 나의 큰 딸은 무슨 일을 벌여서 사고를 치고 나를 떠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우울했다. 부모가 가정을 바로 세우지 못해서 내 딸이 그렇게 된 것 같아 자책이 심하게 들었다.

서울 생활을 하자니 돈이 많이 들어서 월급으로는 힘들어 대출업체에서 대부라도 받아 갚지 못해 곤란을 겪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혹시 사채라도 빌려 써서 그쪽에서 보낸 사람들에게 협박이라도 받았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큰 애에게 전화해서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살이라도 할까 봐 가장 겁이 났다.


남편은 큰 딸보다 두세 살 정도 위인 러시아 여자와 살기 위해서, 교수직도 팽개쳤다. 교수 만들기 위해 부산까지 내려가 시집살이를 하면서 온갖 정신적, 육체적 힘듦을 참아 가면서 노력했는데, 20년 동안 교직 생활을 청산하고 일시금으로 연금을 받아 동물병원을 차렸으며 아파트 팔아서 일부 올려 보내준다고 약속을 하고는 그 여자에게 네일숍을 하나 차려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십 원짜리 한 장 올려 보내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관심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나만 숙맥같이 몰랐다.


부산에 있는 친구의 남편이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데 그들에게 네일숍 인테리어 견적을 내달라고 연락을 했다고 한다. 뻔뻔도 하지!

한 번은 재홍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희 엄마 부산에 내려오셨어?"

"아니? 우리 엄마가 왜 부산에 가셔?"

"식사 한 번 하자고 하니 장모님 내려오셔서 안된다고 하던데?" 하, 장모? 수월하게도 장모 소리가 나오네?

이상하다고 전화기 너머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친구가 훤히 보인다. 하지만 내 입으로 아무런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큰애에게 일을 도와 달라는 것이 네일숍의 일이었나?

도대체 애 아빠라는 사람이 딸들을 감언이설로 불러들여 겨우 네일숍의 일을 맡겼나? 더러운 인간 같으니라고. 그나저나 둘째는 언제 편입이 되어 학교를 다니게 될는지, 막내는 언제쯤 독일로 나가게 될는지 모든 게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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