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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Apr 09. 2021

소설 같은 이야기 6

소진이 엄마가 찾아오다.

 겉으로는 평화가 온 것처럼 보인다.

무슨 사연이 있어 강아지 한 마리와 매일 돌아다니는지 시골의 작은 동네에서는 이상한 듯 바라보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4차원의 나는 그저 내면의 세계로만 파고 들뿐이다.

 CD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내게 막내는 그때 좋아하는 LZZY와 Emma Shapplin의 음반을 부산에서 보내줬다. 평소에 George Winston의 피아노 음악만 듣다가 팝페라 가수들의 음악을 들으니 새로운 음색이기도 했고 오페라 아리아가 많아서 정신적 만족도가 높아져서 좋았다. 그래서 책 읽기와 음악은 나를 구원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하다. 노는 날에는 시골길을 구석구석 돌아보며 시골의 정취를 감상 아닌 감상을 했으며 산정 호수로 올라가 호숫길을 한 바퀴씩 돌다 내려왔다.

어느 날은 호수를 바라보다가 이곳에 빠져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물에 비치는 물그림자를 뚫고 들어 갈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호야가 발로 툭툭 건드리며 안으라 한다. 잠시 호야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에만 골똘해서 주의를 잊었다가 깜짝 놀라 품에 안고 겁먹은 듯한 호야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호야. 다시는 안 그럴게.' 속마음을 눈치 차인 것 같아 호야에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으스러질 듯 끌어안고 힘 빠진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매일 밤 이부자리를 펴고 누우려 하면 아이들이 떠올라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 그럴 때마다 호야는 어쩔 줄 몰라하며 흐르는 눈물을 혀로 핥아주며 울지 말라는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 사람은 애들을 제 곁으로 불러 내릴 때 했던 말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돌변한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간간이 아이들이 전해 주는 소식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막내에게는 독일에 유학을 가면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니 네일 아트를 배우라고 했고, 위에 애들에게도 네일 샵에서 일을 하라고 했다. 둘째에게 편입해주겠다는 학교 얘기는 형편이 좋지 않다며 두 번 다시 꺼내지 못하게 했으며 울며 겨자 먹기로 애들은 엄마에게 미안해서 오지도 못하고 자식 노예가 되어 일을 하고 있었다.

걸핏하면 한국이 좋다고 새 장모라는 여자가 들어와 극장식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바다가 좋다며 바닷가에 놀러 다니느라 애들이 밥을 먹는지 굶는지 안중에도 없었다. 약속한 급여도 해주지 않을 뿐 하루에 1만 원씩 지급해주면서 먹이고 재워주니 자신이 할 일은 다하고 있다는 식으로 행동한단다. 미친 거 아냐?

막내는 미성년이라서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두 애들은 더 이상 못 있겠다며 집을 나와 둘이서 방을 하나 얻어 나갔다는데, 나갈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21세기에 이런 사람? 교수 출신인 애 아빠가 할 짓이야?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주택에서 살았는데 기름보일러라서 아낀다며 그들이 나갈 때 겨울인데 보일러를 켜지 못하게 안방 문을 잠가 아이들은 찬물에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해야 할 정도였고, 둘째가 전주 자취방에서 가져온 일회용 가스레인지에 남아 있던 쌀로 밥을 짓고, 라면을 끓여 먹으며 지내야 했다. 친구들이 김치며 반찬을 가져다줘서 한동안 해결을 하다가 둘째가 제 아빠를 설득해서 방한칸 마련해 둘은 독립을 한 것이다.

눈물 없인 들을 수가 없는 딸들의 어처구니없는 삶이 전부 내 잘못인 것 같아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사무실에서의 일은 힘들지 않았다.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다고 해서 도와주는 차원에서 하는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는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나에게는 지인이 구세주 같았다.

사장은 의정부에 살고 있어서 가끔 들렀으며 같이 일하는 사람 하고만 교류하기 때문에 무난하게 일상이 돌아갔다. 다만 함께 일하는 파트너가  짧은 기간에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그래도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마땅치 않을뿐더러 서울에 가도 지낼 곳이 없으니 묵묵히 일을 했다. 사장인 지인이 새로 들어온 아줌마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했는지

"예전의 영부인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현재가 중요하지." 했다.

나이도 한참 어리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가 나보다는 훨씬 대가 차 보였다. 내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차별 대우를 받기라도 한다는 듯이 한마디 던졌다. 그 한마디가, 헉! 비수처럼 내 가슴에 와 꽂힌다. 그녀의 뼈아픈 말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곱게 철없이 살아왔었나, 나를 돌아보게 하는 한마디였다.

 이곳은 포천의 한 마을의 작은 시외버스 터미널 매표소이기 때문에 창구에서 표만 팔면 되는 일이라서 사람들과 직접 대하지 않아서 좋아서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강원도 방면과 산정호수로 가는 버스, 서울로 나가는 버스들이 전부 이곳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마치 중요한 요충 지대 같았다.


 요즘은 모든 터미널에서 전산으로 처리하지만 그때만 해도 승차권을 사서 버스를 타기 때문에 수작업을 했다.

마을은 경기도 북부권이라서 몇 발짝 가지 않아서 강원도 철원 땅과 경계선이고 군부대가 많아서 주말이 되면 면회객들이 많이 들고 난다. 평일엔 조용하다가 주말이 되면 산정호수에 들리는 관광객이 찾아오기도 하고, 가을 명성산 억새 축제는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인파가 몰려들어 그때는 사장도 나와서 함께 일을 해야만 했다. 한철 장사처럼 억새 축제가 끝나고 나니 다시 평온한 나날이 지나갔다.

 

 서울에 있을 때 운전면허를 따 놓았는데 살펴보니 도로 연수를 받아야 하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억새 축제가 일주일 끝나고 수입이 몇 배가 되었다며 좋아하는 사장에게 보너스라도 지급하라고 하니 선뜻 지급해 주며 뭐 할 거냐고 묻는다. 도로 연수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 그 방면으로 소개를 해주어 연수를 받고 시험에 합격을 했다. 부산에서 운전을 배우고 싶었지만 운전을 남편이 못하게 했다. 첫째는 운전을 할 줄 알면 시아버지를 낚시터에 데려다주게 된다. 둘째 우리나라는 아직 운전문화가 미성숙해서 차 끌고 나가면 남자들한테 욕먹는다. 셋째 운전할 줄 알면 차를 갖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안된다며 말렸다. 결국 경기도에 와서 운전면허증을 게 되었다. 어려운 일을 해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애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속은 끓어 넘치지만 호야랑 조용히 보내면서 휴무날이 일요일이면 서울로 나가 다니던 교회로 가 예배도 드렸다. 각 구역마다 앉는 자리가 있어서 알려준 대로 그곳에 가서 앉았다. 예배 마치고 나니 처음에 우릴 교회에 차에 태우고 다니던 언니가 반가워하며 소식을 묻는다. 일하고 있다니까 월급은 어떻게 하냐고 해서 집을 마련해야 해서 적금을 들었다고 하니 구역 식구들하고 계를 하니까 적금을 깨서 계를 들으라고 한다. 사실 시어머니는 계를 좋아하셨다. 자식들 돈을 불려 주는 것은 계만 한 것이 없다며 계를 들으라고 했는데 남편이 '엄마에게 계 같은 거 절대로 들지 마!'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형제 중 유일하게 우리만 계를 들지 않았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날 더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계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 보지 않았던 契. 그 계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뭐에 씌었는지 언니 말대로 매달 50만 원씩 계좌에 돈을 부쳤다. 은행은 적금 만기까지 기다렸다가 찼지만 계는 붓고 있다가 필요한 달에 받아 갈 수가 있다는 말에 혹한 것 같다. 어찌나 달변인지 그 언니 얘기를 듣고 있으면 어려운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서울에 있을 동안 구역 식구라고 나름 잘 챙겨줬던 언니이기도 했고, 반포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이라 믿었다.

 매월 계를 부어 나가면서 목돈이 생기면 허름한 방이라도 하나 구해서 애들을 불러야지 하며 꿈에 부풀었다.



그 해 겨울 한통의 문자가 왔다.

"이모님 지금 어디 계세요? 만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소진 엄마였다. 영국에서 돌아왔나 보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나? 하며 있는 곳을 얘기했다. 만나러 오겠다며 찾아왔다. 산정호수의 찻집에서 만나 반가운 해후를 했다. 씩씩하고 대찬 여장부의 모습은 여전했다.

영국에서는 언제 돌아왔느냐고 인사의 말문을 열었는데

"우리 영국 못 갔어요. 소진 아빠 일이 잘 안돼서 못 가고 소진이는 시어머니가 봐주셨는데 맨날 코코 이모만 찾아요." 소진이랑 지낼 때에 코코를 몇 번 본 아이는 언제나 날 코코 이모라고 불렀다.

"소진이 많이 컸지요?" 동글한 얼굴이 쌍꺼풀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해서 첫인상이 엄청 예쁜 아기였는데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다.

"네. 많이 컸어요.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돌봐 주시는 동안 반찬이 입맛에 안 맞는다며 밥도 잘 안 먹고 저녁에 저희 부부가 늦으면 엄마 아빠 오면 밥을 먹겠다며 과자 먹고 기다리다 잠이 드는 날이 절반이에요. 그래서 이모님께서 괜찮으시면 소진이 다시 돌봐 달라고 부탁하러 왔습니다" 밥을 얼마나 잘 먹는 아이인데 밥을 굶고 과자만 먹었다니 믿을 수가 없다.

"네 그렇군요. 저도 소진이 보고 싶어요."

"이번에는 출퇴근하지 마시고 주말엔 저희가 있으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상주해주시는 걸로 하셨으면 해요. "

참으로 신께서는 때 맞춰서 갈 곳을 정해 주시고 살게 해 주시는 분이구나. 신기할 따름인 것을 또 한 번 느꼈다. 올 수 있으면 언제까지 와줬으면 한다는 말을 하고 소진 엄마는 떠났다.


그동안 매표소의 시제가 몇만 원 빈다고 사장하고 낯을 붉히며 말다툼을 한 뒤에 껄끄러워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도 당장 움직 일수 있는 형편이 안되어 벙어리 냉가슴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터였다. 교대자가 다시 바뀌어 20대 중반의 아줌마였는데 자꾸만 사고가 터졌다. 그런데 나를 걸고넘어졌나? 사장이 싫은 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버선목이라야 뒤집어 보이지. 내가 아무리 이렇게 산다고 그깟 몇만 원에 손을 대냐며 싸움을 했다. 억울해도 나는 을이었고 지인은 갑인 사장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아는 사람이 더 어려운 것이다. 잘못하면 좋은 관계도 나빠질 수 있어 그동안 조심스럽게 살아왔는데  다 내 맘 같은 줄 알고 살아가는 내겐 적지 않은 시련이기도 하다.

앗! 얼마 전에 짐 정리를 하며 들고 다닐 수도 없는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핸드백을 어루만지다가 지퍼를

열어보니 3만 원이 나왔다. 돈을 넣어놓고 1년여를 잊고 지낸 것이다. 맨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나날들을 보내다 보니 잊었나 보다. 공돈이 생겼다며 매점 아줌마와 교대자에게 피자를 사줬는데 딱 3만 원이 빈다는 것이다. 참으로 절묘하기도 하지. 오지랖도 넓지. 내 형편에 무슨 피자를 쏘고 기분을 내냐?


없던 정까지 있는 대로 다 떨어졌어도 형편상 오도 가도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신께서는 내게 자비의 손을 내밀어 주신 것이다.

이젠 매표소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아도 되었고 사장에게도 의심받으며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큰소리치며  호야와 떠났다. 하지만 사장도 고마운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안다. 때가 되면 오해도 풀리겠지. 결국 몇 개월 뒤에 사장은 전화로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고 가끔 주말에는 일을 부탁하기도 했다.

사람은 다 살게 마련인가 보다. 여기서 1년 정도 있었지만 나쁜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신을 돌아보며 새로 살아나가야 할 힘도 길러진 것 같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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