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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Apr 05. 2021

소설 같은이야기 1

모지리 중의 모지리

칼퇴근을 하던 그 사람이 매일 늦는다.

해부학 실습이 없는데도 늦게 들어오는 이유를 모르겠다. 전화를 해보면 주위가 시끄럽고 어수선 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해부학 실습이 있는 날엔 cadaver(시체)를 놓고 학생들과 실습하는 강의라서 20여 년 동안 새벽에 퇴근하였고, 평소에는 땡 하면 들어오는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퇴근한 집에 내가 없으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그 날은 부부싸움이 일어 나는 날이기도 하다. 남편이 퇴근 전에 찬거리 준비하느라 시장에도 다녀올 수 있는데 혼자 다녀왔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함께 다녀오면 되는데 왜 혼자 갔다 왔냐고 화를 내서 얼른 다녀와 저녁 지으려고 그랬다는 말에 화를 불같이 냈다. 이해를 못했다. 보통의 주부들은 남편이 오기 전에 시장을 다녀와 저녁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매일 늦는 것이다.

 몇 년 동안 방광암으로 투병을 하던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속이 허해서 그런가 보다 라며 오히려 편하게 마음을 먹어 보려 했지만 홀로 계신 시아버지로 인해서 나와 애들은 힘들었다. 방패막이가 되어 주시던 시어머님도 안 계시니 애들에게 사사건건 간섭하는 시아버지의 행동에 아이들과 나는 숨 막히는 나날이었다.

시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에도 워낙 까다롭고 일일이 심부름시키는 버릇 때문에 곁에 누구라도 있길 꺼려했다.  어머님 조차 교사로 있는 시누이 집에 살림해주고 주말마다 오시고 방학에는 가끔 가시더니 아예 외손주들 키워 준다는 핑계로 집에는 드문드문 오셨다. 시아버지와의 결혼 생활이 얼마나 힘드셨으면 막내인 시동생 결혼시키고 이혼할 생각을 하셨다는 말씀까지 하셨을까?

그러니 나만 꼼짝없이 시아버지의 온갖 시중을 들어야 하는 처지였다. 어머님이 곁에서 해야 할 일들까지 내 차지가 된 것이 몇 년 째였는데 이젠 그 어머님조차 안 계신데 남편마저 밖으로 도는 느낌이다.

 



시아버지는 우리에게는 평생 어려운 분이다. 독재자이며 황제처럼 살고 싶어 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인 데다가 특전대 출신이었던 것을 자랑하신다. 당신 마음에 안 들면 어머님도 사정없이 들고 있던 낚싯대로 때려서 상처 난 머리를 몇 바늘 꿰매기도 했고, 야구 보는데 옆에 있는 물건을 수시로 달라고 심부름시키는 아버지에게 볼멘소리로 한마디 했다고 대학생이던 시동생과 두 재비 하고 격투기를 벌일 정도로 격한 성품이시다.  허리에 차고 있던 벨트를 뽑아 애들을 때렸다는 그때는 가정 폭력이라는 단어 조차 낯설 때여서 시누이, 시동생은 늘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그러나 머리가 크고 대학생이 된 그들이 차츰 할 말은 하는 사이가 되었고, 자주 얻어맞던 큰 아들은 결혼을 했으니 손은 안 댔으나 며느리가 보는 앞에서 지나가다 손질하던 낚싯대를 건드렸다고 시어머니를 낚싯대로 치고, 작은 아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데 나중에 아침 밥상머리에서 시아버지께서 초등 2학년인 막내에게

"너는 장차 뭐 할 거고?" 물어보셨다.

"화가 될 거예요." 그림을 잘 그리기도 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막내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함을 치시며

"그림 그리겠다고?" 돈도 안 되는 쓸데없는 짓 하려고 한다며 애를 울렸다. 그러면서 싱크대 앞에 있는 나를 향해 소리치신다.

"애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게 부모가 할 일이 아니고 바르게 가도록 가르쳐야지 너는 뭐 하는 거냐?"

 "애들 크면서 꿈이 열두 번도 더 바뀌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어리잖아요. 고등학생도 아닌데."

그런데 내게 쫓아와 나를 치시는 게 아닌가? 애들 똑바로 교육 못 시킨다면서.

그것을 본 막내가 울면서 학교에 갔고 몇 시간을 울었는지 급격한 스트레스로 시력이 급격히 단시간에 나빠져 안경을 맞춰야 했다. 막내는 지금도 그때 얼마나 울고 눈이 부었었는지를 얘기한다.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고서야 학교에서까지 그렇게 울은 줄 알았다.



  이 속에서 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렇게 결혼 생활을 했다. 정신착란증까지 올 것 같은 상황까지도 갔었던 기억이 난다.  밤만 되면 혼자서 옥상에 올라가 울곤 했으니까. 요즘은 우울증이라는 병명도 있지만 그때는 걸핏하면 왜 살고 있는지 이러려고 부산까지 내려왔나. 친한 친구가 장남은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결혼 안 하고 막내인 남자만 고르던 것이 생각났다. 제사는 매달 한 번씩 있었고 친인척이 모였다 가면서 당숙들께서

"욕보았다" 하시면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고생했다는 말인지 욕을 하는 것인지 뜻을 알기 어려워 당황도 했다. 일 년에 여덟 번의 제사 음식과 두 번의 명절 손님 치르기를 하면서 명절에 서울은 멀다면서 한 번도 친정에 보내주지 않는 시어른들 밑에서 불평 한마디 못하고 살았다. 대신 아이들이 크면서 방학엔 친정으로 내뺐다. 서울 구경시켜줘야 한다는 명목을 앞세워서.


 딸을 낳았다고 빈껍데기라는 말을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시아버지는 내 딸을 보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빈 껍데기라고 하셨다. 하늘이 노랬다. 그런데 박차고 나오지 못하고 그냥 참고 살았다. 결혼은 다 그런 것인 줄 알았다. 다 그러그러 살아가는 것이라고 현대인이면서 조선 여인처럼 살았던 것이다.

친정아버지는 첫 딸인 나를 안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일을 시작하셨다던데. 우리 아버지와 같은 나이이신 시아버지 사고는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힘들어도 그 사람이 나름 잘 챙겨 주었다. 부모 노릇이 서툴지만 나름 아빠 노릇도 잘하려고 했고 부산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으니 자기가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되기도 했거니와 결혼 때부터 부모가 그래서 자기 말만 듣고 살라고 했나 보다 이해하며 오직 남편이 하자는 대로 하며 살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길을 몰라 곤란해하던 러시아 여자 둘을 도와줬다고 하며 연구실에서 차도 마시고 갔다는 얘기를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당시 부산에는 나이트클럽 같은 곳에 러시아 여성들이 취업을 많이 하고 있던 때였다. 건강 검진받으러 왔는데 가정의학 검사실이 학교 2층에 있으니 학교 앞에 있는 병원 건물로 들어가면 헤매기 일 수긴 했다.

보통 주말엔 애들하고 책방에 가던가 그동안 밀린 잠을 잔다던가 하던 사람이 전화 한 통 받더니 그대로 나갔다. 도와줘야 한단다. 한국의 기획사 나쁜 사람들이 외국인이라고 불이익을 준다며 자기가 중간에서 소통이 되도록 해야 한다나. 무슨 일을 도와준다는 것인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그런 제 아빠를 보던 큰 딸이

"혹시 아빠 바람난 거 아냐?"

"뭐라고? 그런 말 하면 못 써!"

" 아니 저번에 티브에 러시아 여자들 나온 것 보며 우리가 안 좋게 얘기하니까 너희들보다 예쁘다며 화냈어"

러시아 여자들이 많이 들어와서 유흥가에서 취업을 하고 안 좋은 소문이 많이 나기도 하던 대였고, 도움이 필요한 여자들도 한 명은 나이트클럽의 무용수며 한 명은 매니저라고 했다.

그래도 설마, 집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던 사람이다. 나를 혼자서는 꼼짝도 못 하게 하는 사람이며 또 바람을 피워도 비슷한 사람과 피우는 것이지 나이트클럽의 댄서 매니저와 무슨 바람?

난 남자 여자가 바람을 피운다면 비슷한 레벨끼리 피운다고 생각했다. 대학의 교수인 사람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았다.


매일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못 먹는 술도 가끔 하고 들어 왔다. 실습 끝나고 학생들하고 마셨다고 말을 하면 그대로 믿었다. 학교 일이라는 게 강의도 강의지만 대학원생들의 논문까지도 봐줘야 해서 일이 많았다. 늘 바쁜 사람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어느 날,

"애들하고 서울 올라가 살면 어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버님 혼자 게시고 그럴 형편이 안되잖아."

"아버지는 ㅇ철이한테 모시라고 하고."

혼잣말로 'ㅇㅇ이 아빠가 잘도 모시겠다.'며 가능성 일도 없는 이야기라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슨 날벼락이야? 여태 살아온 세월이 흡족하진 않았어도 애들 잘 키워 공부 뒷전인 큰애 그래도 전문대학 졸업했도, 둘째 대학, 막내 고등학교 들어가야 하는데 어떤 변화도 싫었다. 또 서울 가서 살만한 여력도 없었다. 집 값이 부산하고 천지 차이 나는데 어떻게 옮길 수 있어. 꿈도 꾸지 못하지만 아버님은 어떡하냐고?

(다음 계속)

  

*그림: 화가 임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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