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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Apr 06. 2021

소설 같은 이야기 2

내 무덤을 팠지

 폭력적인 시아버지는 바람도 자주 피워서 남편은 이복 쌍둥이 형제까지 있었다.

그런 여러 가지 들이 부산에 있는 대학에 가지 않고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것은 부모를 떠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부산 의과대학에 들어갈 성적은 되었지만 서울의대엔 들어갈 수 없어서 수의과 대학을 지원하고 수의과 대학을 졸업했다. 어릴 때 동물을 좋아해서 소동물을 많이 키웠는데 공부에 지장이 있다고 못 키우게 없앴다고 한다. 그래도 어찌어찌 학교 앞에서 병아리 한 마리 사다 애지중지 키워 중닭을 만들어 놓으니 엄마가 잡아 아버지 몸보신을 시켜준 것에 충격을 먹은 뒤에 그때부터 수의과 대학에 들어갈 생각을 했다고는 했다.


  절친이 미팅 때 만난 학생인데 대화가 잘 통할 거라면서 함께 만나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되었다. 마침 성산대교가 건설되느라 자취하던 서대문구 현저동 일대가 헐리게 되어 이사를 해야 하는데 수원에 있는 학교(그 당시 서울 농대와 수의과 대학은 수원에 있었다.) 가기도 쉽고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본교에 가기도 좋은 길목에 있는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겠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고 나니 혼자 자취하는 서울대생인 그에게 부모님은 집에 행사가 있어서 음식이 풍성하면 불러서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셨다. 부모님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중에는 부산의 4인방이라고 함께 다니는 친구들까지 불러서 대접 아닌 대접까지 하는 친절을 베푸시는 것이 아닌가?


 유신시절에 데모다 뭐다 쫓아다니기도 하면서 이래 저래 배를 곯았을 거라면서 아버지는 걸핏하면 그를 부르셨다. 아마도 재수하고 있던 남동생의 공부에 도움이 되기를  은근히 바라셨던 것은 아닌가 했다. 그렇게 자주 집에 오게 되고 친구와 함께 만나 시간을 보내다 헤어지던 어느 날 핀치히터가 되면 안 되겠냐는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 실연을 당하고 시름에 잠겨 있는 내게 그가 한 말이다. 야구에서 대타가 안타를 치는 경우가 많다면서 친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다니던 잡지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던 중이라 취직이 문제였지 남자 친구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한 동네서 살기 때문에 피하긴 힘들었다. 그렇게 인연이 된 우리는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밀어붙이는 그 사람으로 인해 시댁의 어마 무시한 반대 속에서 얼떨결에 결혼을 하고 말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2년 동안 해부학 교실의 조교를 했는데 지도교수가 간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자 다른 지도 교수가 오면서 라인이 달라지니 '학위를 받고 부산으로 갈래, 아님 학위 안 받고 남을래?' 부산의 모 의대 해부학교실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 해부학 교실의 지도교수가 자기 동문이며 친구라 했다. 의대 해부학 교실로 가기 위해 종로에 있는 서울의대에서 한 학기 동안 cadaver(시체) 해부 실습 연수를 했다.

    그런 와중에 부산의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과 맏아들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 그때 서울에 남아 학교 아닌 일반 제약회사에 얼마든지 입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모 의약품 회사에서 자리를 만들어 놓고 차도 주고 상당히 높은 급여를 주겠다고 제안이 들어와서 고민할 때에, 천지 분간을 못하는 어리숙한 나는 부산에 있는 대학으로 가고 부모님하고 함께 살자고 했다. 남편을 교수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부모는 다 우리 부모 같은 줄 알았고, 형제도 다 내 형제 같은 줄 알던 나는 바보 중의 바보였다는 것을 부산에 가서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깨달았지만 되돌릴 수 없으니 최선을 다해 사는 일 밖에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서울 한 곳에서만 사는 것보다 부산에서 살면 나중에 글을 쓸 때 글의 소재가 풍부해질 거라고 걱정하는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 수십 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내 무덤을 내가 팠지.


 시아버지의 바람기를 잠재우기 위해 시어머니는 동네 친구의 남편은 착실한 공무원인데 낚시가 취미라면서 "영철아버지 낚시를 하라 카면 어떻캤노?"

"낚시?"

"낚시를 취미로 돌리면 바람도 안 피울 거 아닌가 ?"

그래서 낚시 도구를 갖춰주고는 취미를 낚시로 돌려서 바람은 끝냈다고 한다. 시부모가 거주하는 방은 낚시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진열장 안에 바다낚시와 민물낚시에 관한 낚싯대와 부속 물건들, 텐트까지 가득해서 놀랐는데 집에 오는 손님들은 그것을 보고 한결같이 놀랐다. 낚시점인 줄 알았다고.

 부산에 내려간 초창기에는 추자도, 사량도, 마라도니 멀리 바다낚시를 주로 다니셨는데 그때는 감성돔, 우럭, 노래미, 솔뱅 이등 종류도 갖가지 쿨러에 가득 채워서 갖다 놓으면 생전 만져 보지도 않았던 생선 장만한다고 한나절이 다 가도록 비 늘치고 내장 발라내고 했다.

다른 집은 낚시를 다녀온 사람이 전부 갈무리한다던데 우리 집은 다녀온 것으로 끝이 났으며, 낚시터에서 며칠씩 묵힌 빨랫감까지 일거리가 태산이었다. 낯선 곳으로 시집을 가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살림을 한다고 힘은 힘대로 드는데 반찬까지 싱겁고 달착지근한 서울 음식하고 판이하게 달라서 친정에서 순한 음식으로 즐겨 먹던 명태 계란국, 마늘종 볶음 등을 만들면

" 이걸 음식이라고 했냐? "

" 이건 서울식이라 그런가 보네" 하시며 어머님이 중간에서 얼버무려 주시곤 했다.

사실 어머님은 아버님이 바람도 많이 피우시고 하니 마음을 잡아 보려고 매일 시장을 봐 와 아버님 들어오실 시간 맞춰 냄비 밥에 입맛에 맞게끔 반찬을 바로바로 해드렸다고 한다.

자신이 잘못을 해 놓고도 가장이라는 지위를 통해 부인이며 자식들을 꼼짝 못 하게 부렸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기분 상하는 말 한마디라도 한다면 그 길로 밥상을 둘러엎어 버리는 일이 보통 일상사였다고 한다. 그렇게 평생을 사셨던 분이니 무엇인들 마음에 들었을까? 하지만 나는 시아버지랑 결혼한 것이 아닌데?

         


 할 말은 하고 살던 친정과 달리 이 집은 시아버지 눈치만 보고 할 말도 못 하고 사는 집이었다.

오죽하면 부모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갔을까? 중학생일 때 부부싸움을 지켜보다가 엄마가 아버지한테 두드려 맞으니 아버지의 팔을 잡아 뿌리친 것을 오히려 아들더러 잘못했다고 빌라고 했다는 엄마이지만 항상 엄마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맞다가 허리뼈가 나가 옆집 아저씨가 엄마를 업고 접골원으로 달려갔었다는 얘기는 전설처럼 들렸다. 그런 아버지를 싫어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머니가 안 계신 집에 들어와 아버지와 대면하기 싫어 저는 저대로 밖으로 돌고 있다가 생각해 낸 것이 아버지를 동생에게 보낸다는 것이었나 보다. 그러려면 내가 부산에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

말은 무조건 나를 위한 일이라고 했다.

"20년이 넘도록 사람답게 살지 못하지 않았냐. 수족이 멀쩡할 때 사람답게 살아라. 똑똑한 막내 서울 가서 공부시키자. 큰 애는 서울에 취직해서 다니고, 여기 있을 필요가 없잖아."  

남편의 말이 한 편으로는 솔깃하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런데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의 도리가 있는 것이지.  그런 내게 더군다나 형식적인 이혼을 하자는 것이다. 남편의 제의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내가 2년 뒤에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옮길 테니 형식적으로 이혼 서류를 만들어 아버지를 설득하고 너는 서울로 올라가. 이혼을 한다고 하면 서울 갈 수 있어, "

"안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러다 진짜 이혼이 되면 나랑 애들은 어떻게 해."

"아니 2년 뒤에 합치는 거잖아."

"안돼. 이혼이라도 하면 딸들 결혼할 때 안 좋아." 그랬다. 딸을 가진 엄마는 행여라도 딸들에게 불행이라도 닥칠까 봐 가장 염려되는 일이었다.



그런 말이 오고 간 뒤에 그 사람은 더욱 침울해졌고 매일 한숨이었다.

얼굴은 굳어졌고 눈만 마주치면 날 설득하려고 했다. 온갖 감언이설로 나를 달랬다. 자기를 못 믿느냐면서

2년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나보다도 나 자신을 더 잘 알고 나를 대해 준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정말 남편 말대로 하는 게 옳은 것인가? 아니야 그럴 수는 없는 거지. 어떻게 견뎌온 결혼 생활인데 한순간의 실수로 영영 이혼을 하게 되면 나와 딸들은 어떻게 되는데?

매일이 지옥이었다. 자신의 말을 안 들어준다고 생트집을 잡기에 이르렀다.

아주 가끔 나의 동선에 의문을 제기하며

"남천동 아파트 ㅇ동 앞에서는 왜 갔냐? 거기는 현지처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는데? 조방 앞 건널목에서는 같이 서 있던 남자는 누구냐? ㅇㅇ백화점에서 어떤 남자랑 얘기했다던데 누구냐?"

"남천동은 달맞이에서 하는 글 모임에 함께 갈 사람 만난다고 갔고, 조방 앞에는 ㅇㅇ사진관에 가족사진 찾으러 갔다가 지하철 역으로 오는데 건널목 건너려고 신호대기 중에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겠지. 백화점에서? 아! 문화센터 실장이 순회하다가 만나서 인사 나눴는데? 이런 거 다 누가 얘기해줘? 미행했어?"

남천동에 사는 ㅇ교수, 병리학실 ㅇ기사가, 학교 여직원 등이 나를 보고 얘기를 전했다고 해도 의처증이 있는 사람처럼 나에게 따진다는 사실이 이 사람이 정 떼려고 별 짓을 다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가끔 성지곡 수원지에 가서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산을 걷다 돌아오는 나에게 한다는 말이

"그 근처에 여관이 많다더라. "

"그래? 허긴 그렇네."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했는데 이건 뭐지? 날 뭘로 생각하는 거야? 이상하네?

성지곡 수원지는 부산에서 유일하게 동물원과 공원이 백양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중턱에 수원지가 있어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고, 산책을 하고 싶으면  가끔 가서 머리를 식히기도 하는 곳이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라서 그런가 주변에 모텔이 많긴 하다.

 그리고 며칠 후에

"왜 아저씨들이 쓰는 향수 냄새가 자꾸 나는 거야?" 한다.

"그래? 난 향수 안 쓰는데? 뭐지?"

골똘히 생각하니 백화점에 갔다가 랑콤 매니저가 샘플 준 것을 화장대에서 보고 향수 좋아하는 둘째가 한 번 뿌려 본 일이 생각이 났다. 사실대로 얘기했더니 입을 다문다.




 학부형들과 오랜 친분으로 매달 모임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날이 있는데 꼭 전화를 해서는 구경도 잘하고 맛있는 거 먹고 오라는 자상한 남편의 면모를 과시한다.  같이 간 사람들은 속없이 다들 부러워한다. 그렇지만 나가 있어도 늘 가시방석 저녁 준비로 부리나케 돌아와야 하는 일이다. 시아버지 저녁식사 준비 때문이라도 저녁시간까지 바깥에 있을 수 있는 형편은 사는 동안은 불가였다. 등단을 하고 살고 있는 자치구에 예술위원으로 위촉이 되어 가끔 백일장 심사라든가 문화 행사에 참여하는 일도 낮에만 가능한 일이다. 밤에 혹시라도 있게 되면 만반의 저녁 준비를 해놓고 나가면서 딸들에게 부탁을 해놓고 갔다가 얼굴만 비추고 돌아와야 할 정도였다. 혹시

까다로운 할아버지와 손녀들이 언쟁이라도 할까 봐 늘 불안했다.

그 사람은 1박 2일 세미나를 가가운 경주에 갔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그날 밤에 돌아오는 사람이다. 제주도로나 떠나야 하루쯤 그가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집에 집착한다. 아니 나에게 집착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나를 서울로 떠나보내려 한다. 매일매일 설득하느라 밤 잠을 재우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남편 말대로 시아버지를 시동생에게 맞기고 자유롭게 살아 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다. 남아 선호 사상이 유별나서 딸들도 힘든 마음으로 살아온 것은 사실이다. 시동생의 둘째 아들이 태어나면서 유별난 손자 사랑도 아이들을 힘들게 했지만 이미 아이들은 컸기 때문에 크게 마음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며느리의 차별대우는 속 좁은 사람일 것 같아 내색 않고 속으로 삭히기 일쑤였지만 제일 속상했던 것은 명절날 차례를 지내고 아침 식사가 끝나자 동서를 바라보며 시어머님이 하시는 말씀

"너희는 어서 친정에 갈 준비를 하고 가봐라. 큰 애 너는 서울이니까 못 가지?"

작은 집 식구들까지 식사 마친 설거지가 산더미인데 설거지라도 끝나고 나면 보내야지. 명절에 안 가본 친정이 몇 년인데  내가 보내 달라고 떼를 쓰기라도 한 적이 있나? 왜 날 쳐다보며 그러시는 것인지...

하루 종일 인사 다니고 집에 오는 손님 치러야 하는 일이 내게 당연한 듯 그런 삶이 20 수년간 계속된 것이다.


나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예쁜 내 딸들과 나를 꼼짝 달싹도 못하게 하는 것이 남편의 엄청난 사랑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음 계속)


*그림: 화가 임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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