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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Apr 21. 2021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

손절한 친구를 떠올리며

홍천은 강원도야.
분당에서 광주(경기)로 빠져 퇴촌을 지나, 양평을 거치지. 퇴촌과 양평은 북한강 댐이 계속 연결되어 있어 물가엔 라이브 카페니 식당들이 즐비해. 그곳을 지나치면 싱가포르도 있고 베니스도 있고 세계적인 이름들은 다 달고 있는 카페와 모텔 이름들이 풍경 좋은 곳에서 나름 뽐내고 있어서 여기가 내 나라인가 했어.

양평의 양수리를 지나는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가 있어서 요즘엔 그곳에도 다산 축제가 있어. 아직 가보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기회 되면 가보고도 싶네.

두물머리라고 두 줄기 물이 합쳐진다고 해서 두물머리라고 하는데 물안개가 일품이래.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해. 내 차가 있다면 한 번 천천히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곳일 정도로 물 격리 잔잔하면서 청평 쪽으로는 보트 타는 사람들도 많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아 산야는 푸르름을 간직하고 묵묵히 있더라고.
그렇게 차 안에서 산야와 건물들을 바라보며 가다가 용문산 관광단지를 지나 홍천 IC를 지나서 어느 작은 마을로 들어갔는데...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좀 그런 곳이야. 몇 호 안 되는 집들이 있고, 영우네가 주말마다 가서 지낸다고 조립식으로 예쁘게 지은 집 앞마당은 잔디가 푸르게 깔려 있고, 그곳에서 호야는 좋다고 뛰어놀았지. 영우 맘  하는 말.
"호야~ 네가 제일 잘 어울린다. 이 잔디랑 호야랑 너무 멋지다" 하며 감탄하더라고.

근처에 영우네가 그렇게 짓고 나서 몇몇은 똑같이 지어 주말마다 야채도 가꾸어 가을엔 김장을 해서 차에 싣고 돌아간대. 간장, 된장까지 담는다는데 도시에서 움직이는 것보다 너른 마당에서 펼쳐놓고 일하기가 좋아서 그럴 거야. 나도 그러면 좋겠다. 도시의 아파트나 빌라 실내에서 옹색하게 움직이며 담는 것보다 훨씬 좋지.
지은 지 6~7년쯤 되었는데 앞으로는 아이들 공부 때문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없어진다고 내놓았대. 올여름에도 남들만 묵어 가는 날들이 많았대. 온갖 친지들이 돌아가며 사용하는 세컨드 하우스.

 영우는 "이모! 이모!" 불러 제키고 같이 뛰노느라고 많이 웃었어. 내 눈높이가 유진이를 돌보다 보니 애들이 친구처럼 놀 자하더라고.

영우 대디가 " 영우야 이모 그만 불러 아빠랑 놀자" 아무리 해도 소용없어. 같이 뛰고, 같이 꽃 따서 엄마 갖다 주라고 하니 좋아서, 히죽히죽 웃고, 기회 되면 그들 사진도 올려놓을게.

선물 받은 디카가 있긴 한데 아직 사용 안 하거든. 아영이 말에 의하면 무슨 장비가 하나 더 있어야 컴에 연결할 수 있대.

그래서 좋은 장면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 안 그러면 사진을 더 많이 올릴 수 있을 텐데.


 홍천 집으로 가기 전에 홍천 다슬기 해장국과 다슬기 한 접시를 영우 맘과 함께 먹었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배가 싸르르 아프기 시작해서 화장실부터 찾고, 돌아오는 길에도 휴게실에 들르고, 분당에 와서도 화장실로 직행했어. 나 혼자만 속이 부대끼고 좋지 않아 그들에게 미안하잖아
그들은 홍천 갈 때마다 그곳에 들려 다슬기 해장국을 먹는가 봐. 다슬기가 간에 좋다고 인기가 있다면서. 더군다나 홍천 강에서 서식하는 것 잡고, 그곳에서 가꾼 풋고추, 부추, 음식은 맛있게 먹었는데 나만 배 아프고 탈이 났지 뭐야.
영우네에게는 말 안 하고 전 날부터 속이 안 좋은 척했지.
아무튼 바람 잘 쐬고 왔어.
아영인 카페 오픈 도와 달라고 해서 하루 종일 일하고 왔고.
일요일엔 둘이 다 늦잠 잤어.
난 또 아침부터 두통이 일어나 또 약부터 찾아 먹었네... 으으으ㅡㅇ
오후 늦게 둘이서 목욕 가방 들고 집을 나섰지.
돌아오면서 이 동네에 유명한 가락국수 집에서 가락국수를 먹고 들어 왔어. 이곳은 골짜기인데도 맛있다고 소문나면 점심 때나 저녁엔 차 댈 곳이 없을 정도야. 제과점도 사시사철 사람들이 꽉 차. 가격은 문제가 안 되는 것 같아.
인테리어 분위기 좋게 해 놓고, 음식이 맛있다 싶으면 줄줄이 가족 동반이라니까.
이렇게 해서 또 주말이 지나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거야. 언제쯤 내 앞에 서광이 비칠까?

아직은 요원한 것 같아서 마음 붙이고 살아야 할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아 겉은 고요. 내 안은 광풍이 몰아치는 것 같아.

괜찮아. 잘 될 거야. 기도문처럼 외우는 두 마디가 늘 나를 타이르고 있어.


안녕~ 일주일도 잘  지내길...

 

 예전 글을 꺼내 읽다 보니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가 나왔다.

 

시장의 생선코너에는 젊은 부부가 밝게 웃으며 생선을 팔고 있다. 남자는 훤칠하게 키가 크고 영화배우 급의 잘생긴 외모에 서글서글하기까지 하다. 항상 옆에서 함께 있는 그의 부인은 남자의 어깨 만치에 오는 키에 시장통에 어울리지 않게 눈에 띄게 희고 달덩이 같은 얼굴에 서울 말씨를 쓴다. 아이들과 생선을 사려고 그 앞에 서면 아이들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면서 손으로는 우리가 주문한 생선을 능숙하게 손질하는 여자. 내게 자기도 서울 태생이라며 서울서 왔냐고 묻는다.

부산에 내려간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 사람이 그리워 부산에서 서울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고 하는데, 자동차의 서울 넘버 표시만 보아도 눈물이 날만큼 외로웠던 나에게 서울에서 온 여자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가족이 부산에 내려와 살면서 직장도 다니고 한 직장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한 얘기까지 다 해주는 여자. 아들만 둘인 그들은 우리의 세 딸을 각별히 좋아해 주며 친해졌는데 가족끼리 뭉치기도 하며 가깝게 지냈다.

몇 년 뒤에 아저씨가 생선가게를 접고 하고 싶은 설비 사무실을 차려 계속 성장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직장에서의 경력을 사무실을 꿰차고 살림을 잘해서 남편과 함께 당차게 회사를 키워 나가는 그녀를 보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우리 세 딸 중 하나를 며느리 삼고 싶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우리 애들을 좋아했지만 아이들 마음이지 어른들이 관여할 수 있나?라는 생각에 그저 웃기만 했다.


 그들은 큰 공사도 맡아서 하며 나름 회사가 커나가는 것 같았다. 나 혼자서 온갖 일을 헤쳐 나가며 지낼 때에도 늘 격려해주고 애들을 염려해주는 그녀와 아저씨였다.

처음 사무실을 내고  정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거제도 남동생 집에 계시는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연락을 했다. 포천에 있을때여서 가보지는 못하고 부의금으로 20만원을 송금했다.

훗날 그 돈으로 배삯을 해서 거제도를 다녀왔다는 얘기를 하며 눈물겹도록 고마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부산에 내려가 살 때 시부모님 부음에 장례식장을  달려 갔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이 다 커서 결혼식을 올릴 때에도 우리는 서로 오고 가며 축하해주고 행복을 빌었다. 지낸 기억 밖에 없다.

큰 아들보다 둘째 아들이 먼저 결혼식을 올리고 부잣집 며느리를 봤다며 며느리가 혼수로 **똥 가방을 점찍어 놓았으니 그것을 보러 간다고 나를 데리고 백화점 명품 매장을 돌기도 했던 그녀였다.

엄마를 데리고 그런 곳에 다녔다고 우리 애들은 못마땅해했지만 난 마음 쓰지 않았다. 처음 시장에서 만났어도 난 사람을 보았지 직업 같은 것은 생각을 안 했다.

 둘째 딸 결혼식에도 온 가족이 와서 축하해 주고 갔다. 말없이 조용한 며느리를 수묵화 같다며 자랑하던 그녀는 생선가게 아줌마가 아닌 여유로운 폼이 사장님 아내 사모님이 되어 있었다.


 몇 년 후 난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게 바쁜 생활을 하고 있던 중에 딸들이

"엄마, **이 오빠 프사에 와이프 얼굴이 지난번 결혼식에 본 여자 얼굴이 아니야. 아기도 있어요. 아줌마랑 연락해요?"

"아니, 그러고 보니 몇 개월째 연락을 못했네. 아기가 안 생긴다고 걱정했는데 잘 됐네." 생각해보니 소식 끊긴 지 꽤 됐는데도 사는 일이 바빴던 나는 그때서야 전화를 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는다.

"엄마, 그 며느리 얼굴이 아니고 완전 다른 얼굴이에요."

친구의 카톡 프로필을 보니 아기 돌사진이 올라와 있다.

그렇게 그녀는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손절을 한 것이다. 그녀의 사촌 시누이와 통화를 했지만 말을 안 해서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고 큰 조카에게 물어봤는데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는 말을 전한다.

"그런데 언니, 결혼식에는 안 부르고 아기 돌 파티에는 불렀더라? 어떻게 그래?"

"결혼식에서 신부 얼굴 봐야 얼마나 기억을 하겠니? 그러니 돌 파티한다고 사람들 부를 수 있지."

"아! 그런가? 그럴 수 있겠네."

사촌끼리도 자기들의 속내를 말하지 않았는데 친구에게라고 말을 하겠나. 내 남편이 바람을 피워 가족을 버리고 외국 여자랑 결혼한 것을 알았을 때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성토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 것이므로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다만 30여 년간을 찬장 서랍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연락을 끊은 일에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궁금하다.


하기야 20여 년 살붙이고 살던 남자도 하루아침에 돌변하는 세상인데 하물며 남인데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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