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엔 고군분투 - 쓰기를 시작하며
[고독 속에서 읽고 쓰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도우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책의 힘, 그리고 책에 담긴 타인의 힘을 빌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정혜윤
고군분투하지 않는 삶이 있을까?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지 자기 삶을 대충 사는 사람은 없다. 꼴찌도 학업에 소홀할지언정 삶을 대충 살지는 않는다. 문제는 나를 잘 모를 뿐이다. 내가 나를 모르니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만 궁금하고, 따라 하는데만 급급하다. 내가 그랬다. 나를 알고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 살아가야 했는데 정작 내 것이 아닌 것들을 내 것인 양 따라 하곤 했다. 내 딴엔 고군분투했다.
운동을 하고 열심히 일 하고 주말에 영화도 챙겨보곤 한다는 김조한의 노래처럼 외견상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현타가 왔다. 출퇴근하며 시청하던 유튜브가 어느 날 알고리즘에 의해 한 강연을 듣게 만들었다. 성인이 된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살고 있는 게 내가 원하는 삶이었나? 질문하는 대목에서 벼락이라도 맞은 듯 머리가 번쩍였다. 누가 뭘 했다더라, 누가 뭘 샀다더라, 누구는 어딜 간다더라… 뒤처지지 않으려고 40년을 넘게 따라 달려왔다. 자꾸 여기저기 고장 나는 몸은 이제 절반이나 남았을까 의심되는 날들을 이렇게 버티기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러는 사이 잇몸이 주저앉아 앞니를 12개나 갈고, 불현듯 이석증이 생겨 죽을 것 같은 어지러움도 경험하고, 급기야 우울증이 찾아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됐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표면에 드러나는 것 같았다.
코로나가 퍼지던 시기와 맞물려하던 일 마저 실적이 곤두박질쳤고, 맡았던 지점은 폐점 위기 직원들은 해체될 위기, 감당할 수 없는 상황들은 자꾸 벼랑 끝으로 내 몰고 있었다. 결국 지점은 폐점하고 지점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기존 업무와 무관한 자리에 내쫒기듯 발령이 났다.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는 모든 시선이 내 뒷 통수에 화살이 되어 꽂히는 듯했고 답답한 가슴이 쪼여오다가 터질 것 같으면 화장실로 숨듯 들어가 심호흡으로 진정시키곤 했다. 밤에는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뜬 눈으로 동이 트는 날이 반복되었다. 임시방편으로 얻은 한 달간의 휴가는 중반이 다가오자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이, 잘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다시 동이 트는 아침을 맞이하게 했다.
거기까지였다면 그런대로 버텼을지 모르겠다. 매일매일이 짜증이었다.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화풀이의 대상이 가족으로 전이되었다. 부처라는 말까지 듣던 내가 집에만 오면 별일 아닌 것에도 소리를 지르고, 아이를 쥐 잡듯이 다루며 울리기도 했다. 생활은 점점 피폐해졌고 어느 날 울고 있는 아이를 보니 불현듯 이게 진짜 나인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먹고사는 문제가 있을지 생각해 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더 멀리 가기 전에 일단 그만두었다.
예견된 일이었고, 때마침 퇴사한 직후가 겨울이었던 탓에 몸과 마음이 모두 추웠다. 마음은 계절이 바뀌어도 계속 추웠다. 직업란에 쓸 말이 없어지고, 지갑에 들어있던 명함 몇 장 없어졌을 뿐인데 생활은 한없이 위축됐다. 회사를 박차고 나온 사람은 안다. 회사를 소속으로 두고 있는 사람의 혜택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건강보험료가 생각보다 비싸다는 것을, 국민연금이 저축이었다는 것을, 복지 혜택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따박따박 급여일에 맞춰 들어오는 월급은 말할 것도 없이 생활의 안정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에게는 저런 다양한 장점들이 지난 고통을 상쇄할 만큼의 크기가 아닌 듯싶고 경제적 빈곤 속에서도 아직은 휴식이 더 좋다. 언제까지 더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이너스 통장의 깊이가 한 층 깊어지고 혹독한 빈곤 때문에 먹고살기가 어려워질 때 즈음 그간 힘들었던 나날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되고, 그러면 나는 또 어느 날 회사를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나이를 받아주는 곳이 있으면 말이다.
마음속 고통을 벗어나는 데는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왜 하필 도서관을 갔는지는 정말로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살기 위한 본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구잡이로 에세이 코너를 돌며 읽었던 책들은 공감과 위로의 언어로 한 문장씩 마음속 공허함을 채워주었다. 시간이 지나 나도 모르는 사이 수백 권의 책들은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다독여주고,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공감해 주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었던 것 같다. 텍스트의 힘을 체감했던 시간이었다. 어느덧 불안하고 위축된 마음은 한결 좋아졌다.
더불어 내가 받은 위로를 남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경험이 될 것 같아 나도 쓰고 싶어 졌다. 책 몇 권이나 읽었다고 글을 쓰냐는 생각도 들지만, 이전의 나와는 다르게 일단 써보기로 했다. 병약한 자존감 때문에 자격을 운운하며 시도 조차 해보지 못한 채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꿈들에 상처받아왔었다. 책임과 결과는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이제 과오를 멈추기로 하고 일단 써보기로 했다. 운이 좋으면 나도 작가라는 타이틀을 죽기 전에 가져 볼 수 있지 않을까?
책이라는 것이 작가의 생각대로 독자가 만족을 느낄지는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때로는 베스트셀러가 처음 몇 장을 못 넘기도 도로 책꽂이로 향하기도 하고, 변방의 초보 작가의 글이 눈물 콧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내 경험이 다는 아니겠지만, 작가의 의도보다는 독자의 처한 심적 현실에 따라 읽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다양하게 읽다 보면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책이 있는 것 같다.
해서 나는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글을 써봐야겠다. 아마도 사회생활을 하고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 나와 같이 현타가 오고 우울감이 오는 사람이 더러 있으리라 생각한다. 혹시나 낙오하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구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들과 함께 경험을 공유하고 치유하는데 일조해보고 싶어졌다. 고군분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