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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속 Jun 12. 2023

로즈호프 세라 엄마

침묵은 금이다

  우리 집 앞동 2층에 나와 동갑인 세라가 살았다. 세라는 소위 잘 나가는 무리의 일원으로 바짝 줄인 교복에 기름진 깻잎머리를 하고 다녔다. 같은 중학교, 같은 아파트에 살았지만 친분은 전혀 없었다. 한 번씩 가출한 세라를 걱정하는 아줌마 소식을 엄마를 통해 전해 들었을 뿐.

  세라 엄마는 아파트 길 건너 로즈호프의 사장님이었다. 가게 간판은 붉은 장미꽃과 덩굴이 뒤엉켜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열린 문틈으로 힐끗 본 내부는 어둡고 음침했으며 페이즐 무늬의  소파가 시선을 끌었다. 세라 엄마는 빨간 립스틱에 야시시한 옷을 입고 로즈호프로 출근을 했다. 세라의 아빠는 오래전 세상을 떠나 아줌마가 가장이 되어 세라를 돌봤는데 동네사람들은 과부가 호프집을 한다고 수군거렸다. 밥을 파나 술을 파나 뭐가 다르길래 뒷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얼굴과 이름만 아는 세라에게 별 감정 없이 지내왔는데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 온 푼수 때기 105호 아줌마와 엄마의 대화를 엿듣곤 상황이 달라졌다.

"세라랑 지속이랑 같은 학교에 동갑이길래 내가 세라한테 물어봤어. 지속이랑 안 친하냐고 그랬더니 걔가 뭐라는 줄 알아요? 그런 촌스러운 애랑 왜 친해야 되냐고. 말본새가 글러먹은 년이더라고."

 105호 아줌마는 우리 엄마 앞에서 신나게 세라의 흉을 보더니 세라엄마가 유부남과 붙어 놀아난다는 소식까지 덧붙였다. 방문에 귀를 대고 대화를 엿듣던 난, 날 촌스럽다고 평가한 세라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굳이 우리 집에 와서 전한 105호 아줌마가 미웠다.

  그날 저녁  아파트 놀이터가 시끄러워 창문을 열어 보니 웬 처음 보는 아줌마가 누군가의 머리끄덩이를 쥐어뜯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자세히 보니 세라엄마가 머리채를 잡힌 채 여자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남의 신랑이랑 놀아나니 좋냐?"

낯선 아줌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 순간 아파트 놀이터가 마치 연극 무대처럼 보였다. 주민들은 죽인 채 창밖을 주시했다. 내게는 뺨을 맞는 세라 엄마도 상스러운 욕을 하는 낯선 아줌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환하게 불이 켜진 세라네 집만 보였다. 세라가 집에 있구나! 이 소리, 이 상황 세라는 모두 알고 있구나!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세라는 끝까지 집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엄마의 수모를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이웃 모두가 망설일 때 미정이 아줌마가 슬리퍼를 신은 채 낯선 아줌마에게 달려들었다.

"네 남편을 잡아야지 왜 엄한데 와서 행패야!!"  

미정이 아줌마는 우악스럽게 둘 사이를 떼어놓더니 세라엄마를 부축해 아파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초저녁, 급작스러운 소란의 여운은 길었다. 나는 다음날 학교에 가서 이 엄청난 사건을 어떻게 풀어낼지 고민했다. 최대한 세라에게 상처가 되도록 감히 나를 무시한 계집애에게 수치를 안겨줄 생각에 들뜨고 행복했다. 얼굴 들고 돌아다니지 못하게 만들어 줄테다. 지가 잘 나가면 다인가?? 복수할 생각에 신났는데 엄마가 날 불렀다.

"오늘 일 학교 가서 다른 친구들한테 말하면 절대 안 돼. 지속아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나는 시무룩해져 알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엄마의 당부를 지켰다. 입이 근질거리고 세라를 엿먹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다. 

  얼마 뒤 로즈호프 가게에 임대 종이가 붙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부대찌개 가게가 들어왔다. 세라와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교차점이 하나 사라졌다. 세라가 여전히 고등학교에서도 잘 나가는지, 가출을 하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후 세라 엄마의 머리끄덩이를 잡으러 오는 낯선 아줌마는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수수한 차림새의 세라엄마가 갓 돌 지난 세라의 딸을 포대기로 업은 채 대원아파트 놀이터를 노니는 모습을 창밖으로 종종 엿봤다. 그 평화로운 모습을 보며 하마터면 두고두고 후회할 짓을 할 뻔했다고. 그때 삼킨  정말로  눈앞의 반짝이는 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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