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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속 Aug 10. 2023

106호 편지 배달꾼

나 아니라고! 아니야!!

  우리 아파트 라인엔 나와 동갑인 친구가 세명이나 있었다. 505호에 사는 나와 305호 미정이, 306호 준호 그리고 이 글의 주인공 106호 성진이까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또래 친구였다. 동네 친구로 굉장한 친분이 있을 것 같지만 서로 얼굴과 이름만 알았다.  사춘기에 들어선 12살에 이사를 와서 데면데면하기도 했고 성별도 달랐기에 서먹한 사이였다. 우연히 아파트 계단에서 만나면 쌩 지나쳐 각자 갈길을 갔으며 학교 급식실에서 마주치면 황급히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이웃인데 보다 못했고 동갑이지만 친구는 아닌 불편한 사이였다.

  그런데 중학교 친한 친구인 희숙이가 106호에 사는 성진이를 열렬히 짝사랑했다. 희숙이의 부탁으로 껄끄러운 일에 휘말리게 되는데 그 사연이 뭐냐면,

  "지속아 너 대원 아파트 살지? 나 부탁 좀 해도 될까?"

희숙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성진이를 짝사랑했는데 덩치와 키가 큰 희숙이는 뽀얗고 키가 작은 포켓남 성진이의 귀여운 매력에 사로 잡혔다. 비주얼상 이모와 조카 사이 같은데 아직 덜 자란 성진이가 어째서 희숙이에게 남자로 보이는지 의문이었다. 희숙인 방과 후 분식집 최애 간식 피카츄 돈까스를 내 손에 쥐어주며 편지 한 통을 부탁했다. 그저 106호 우편함에 꽂아달라는 간단한 부탁이었다. 삼백 원짜리 피카츄 돈까스에 소스를 듬뿍 발라 한입 베어 물며 그녀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정도쯤이야. 나만 믿어!"

씩 웃는 내게 희숙이는 당부의 말을 얹었다.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그런데 편지는 절대로 보면 안 돼."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하지 말라니 갑자기 되게 하고 싶어졌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편지를 들고 우편함에서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집으로 들고 올라갔다. 봉투에 풀칠을 덕지덕지 했지만 잘 뜯을 수 있을 거 같아서 커터칼을 뽑아 들었다. 아직도 입안에 콤달큰한 돈까스 소스 맛이 남았지만 내가 편지를 훔쳐본다고 큰일이야 나겠나. 희숙이는 절대 모를 것이고 진이도 모르겠지. 과감하게 칼로 봉투를 그어버렸다. 편지 내용은 별게 없어 기억에 남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 사춘기 소녀의 수줍은 고백이 익명으로 적혀있을 뿐. 나는 별거 없는 시시한 편지 내용에 김이 팍 샜다. 봉투에 다시 풀칠을 해서 106호 우편함에 넣곤 집으로 올라왔다. 그 후로 희숙이는 이틀에 한 번씩 피카츄 돈까스를 사주고 편지배달을 부탁했다. 처음에만 편지를 뜯어봤지 그 후론 곧장 편지를 배달했다. 희숙인 답장 없는 편지를 참 열심히도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 떨어지는 콩고물이 좋아 희숙이가 계속 진이를 짝사랑하길 바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진이 엄마가 멀리서 내가 자신의 집 우편함에 편지를 넣는 것을 보고 그동안 진이에게 러브레터를 보낸 사람이 나라고 확신한 것이다. 세상에나!! 예민한 사춘기 여중생이 억울한 상황에 놓였다. 심지어 진이 엄마는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실실 웃으며 지속이가 며느리가 되겠네 하며 너스레까지 떨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아줌마의 오해를 알아차렸다. 진이가 잘생겼으면 이참에 묻어갈 수도 있었지만 진이는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희숙이에겐 미안하지만 아줌마에게 솔직히 이야기했다. 피카츄 돈까스를 얻어먹고 편지배달을 한 사실을.

  다음날 또다시 편지 배달을 부탁하는 희숙이에게 더는 심부름을 할  없다고 말했다. 진이를 좋아한다는 오해를 받는 게 공짜 돈까스를 포기할 만큼 싫었다. 그렇게 사랑의 오작교 노릇은 쫑났고 가뜩이나 어색한 성진이와는 러브레터에 대한 언급 없이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 너 안 좋아한다고. 그 편지 내가 안 썼다고! 우연히 성진이를 볼 때면 소리 없는 아우성만 터져 나왔다.

  성인이 되어 각자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서로의 엄마를 통해 굵직한 소식들을 전해 들었다. 여전히 106호에 살고 있는 나의 중고등학교 동창 성진이.

"성진아, 설마 아직도 오해하고 있는  아니지??"


  입주 후 한 번도 바뀐적 없는 우편함이다. 한때 누군가의 러브레터를 이곳에 배달했었는데.... 대원 아파트를 오고 간 이들의 손때 묻은 흔적이 참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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