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속 Aug 02. 2023

505호 우리 집 이야기

문제없는 집이 어디 있는가.

  대원 아파트 이웃들에게 별 탈 없고 점잖은 505호 우리 가족은 노잼으로 유명했다. 구멍가게 한 설비 회사를 운영하는 부친과 주말 예식장 알바로 용돈을 버는 전업주부 모친. 남매를 둔 우리 집은 대외적으로는 말수가 없고 내향적이었는데 네 식구만 있을 땐 분위기가 달랐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빠는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거실을 장악한 채 춤을 췄다. 좌우지 좡지지 춤은 아빠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아빠의 주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와 동생을 숨도 못 쉬게 꽉 안고 사랑한다는 오글거리는 말을 수십 번씩 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마치 드라마 속에나 존재하는 화목한 가정을 자랑하고 싶어 이 글을 썼다고 속단할 수 있다. 잠시 기다려보세요. 이제 막장 드라마가 시작될 테니.

  아빠는 의처증 환자였다. 아빠는 지금도 엄마의 외도를 의심하고 혼자만의 망상 속에 갇혀 지내고 있다. 나와 동생에겐 최고인 아빠가 엄마에겐 최악의 남자라는 사실은 언급하기 조차 껄끄러워 가까운 이웃도 모르는 우리 집만의 비밀이 되었다.

  한때 엄마가 부정한 여자라는 아빠의 말을  믿었다. 너무도 확신에 차서 마치 엄마가 외간 남자와 나뒹구는걸 눈으로 똑똑이 본 듯 아빠의 믿음이 확고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아빠가 부정의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허황됐다. 나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아빠의 오랜 고향 친구가 엄마에게 축하한다며 악수를 했는데 아빠는 두 것들이 붙어 놀아놓고 자신을 농락한다고 분해했다. 딸을 여의는 기쁜 날에도 망상은 아빠의 머릿속에 구정물을 튀겼다.

  아빠가 스스로 구원할 생각이 없었기에 종부와 내가 나섰다. 동생은 엄마와 바람난 것으로 의심받는 아빠의 친구를 찾아갔다. 아저씨의 휴대폰을 빼앗아 통화기록 문자내역 등 모든 것을 샅샅이 뒤졌지만 불륜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아저씨는 엄마의 이름조차 몰랐고 몹시 억울해하며 아빠를 고소하겠다고 성을 냈다. 종부는 자신의 무례한 행동을 사과했고 이 사건으로 우리 집의 비밀은 처음으로 외부에 알려졌다.

  이쯤 되니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나는 아빠에게 또다시 엄마를 괴롭히면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을 시킬 것이며 아빠의 끝은 고독사가 될 것이라고 표정 없이 말했다. 나의 단호한 어투에 아빠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런 일은 불행하게도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생 땐 아빠 회사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 직원이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늘 저녁을 먹었다. 손님이라 그를 더 챙겨서 그랬나. 그때도 아빠는 엄마가 그와 바람을 피운다고 부들거리다 먹던 밥상을 엎었다.  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가뜩이나 없던 말수를 줄이고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고등학생땐 사춘기의 패기로 아빠에게 정신병자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딸의 선 넘는 폭언에도 아빠는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는 치료가 필요한 환자였지만 오랜 시간 자신을 방치했다.

  칠십이 넘은 노인이 되었어도 병증은 여전했다. 이제야 비로소 아빠를 멈추게 할 힘이 생겼기에 부모님을 이혼시킬 요량으로 강하게 내질렀다. 다행히 동생과의  협공은 먹혔고 아빠는 엄마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멈췄다. 과연  한정적인 평화는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나는 잠시 찾아온 가정의 평화 앞에 어린 시절 거실에서 술에 취해 좌우지 좡지지 춤을 추던 아빠의 춤사위를 떠올렸다. 상기된 얼굴에 게슴츠레한 눈,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마냥 행복해 보여 나 또한 웃음이 터져 나오던, 타인은 모르는 오로지 우리 가족만 아는 그 모습을.


  

  이 문을 기준으로 안과 밖은 철저하게 다른 세상이다. 문밖에는 점잖은 노잼 가족이, 문 안에는 아빠의 의처증으로 고통받는 우리가 있다.

이전 06화 미래의 탤런트 상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