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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속 Aug 23. 2023

지옥의 108 계단

연립 5층에 살아보셨어요?

  대원아파트의 꼭대기 5층에 살아서 좋은 건 창밖 풍경이었다. 지금이야 높은 건물에 둘러싸여 벽뷰가 되었지만 내가 어린 시절엔 펑 뚫린 창으로 붉게 물드는 노을도 보고 화창한 날엔 창을 열고 방바닥에 누워 조각구름을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기쁨이 있었다. 그 하나의 장점만 있을 뿐 실은 단점이 더 많았다.

  집에 다 와서 갑자기 소변이 마려우면 다리를 베베 꼬곤 계단을 올라야 했다. 계단이 원래 이렇게 많았나. 한참 올라왔는데 아직도 3층이네. 싸겠네 싸겠어. 오! 내 방광 힘을 내. 정신력으로 우리 집 화장실까지 버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엄마랑 5일 장에 다녀온 날은 차라리 길바닥 노숙을 하고 싶었다. 손이 무지막지하게 큰, 엄마는 시장에서 한 보따리 장을 봤다. 12살 초등학생이 무슨 팔힘이 있다고 내게도 늘 한 짐을 지어줬는데 무거운 보따리를 내팽개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죽기 살기로 짐을 날랐다. 망할 놈의 계단 덕에 난 가녀린 팔목은 애진작 포기했다. 대신 듬직한 이두근과 한껏 솟은 승모근을 갖게 됐으니 이것도 장점으로 쳐야 하나.

  어느 날은 양념치킨을 시켰는데 현관문을 열자 아저씨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죄송한 마음에 5층이라 힘드시죠? 감사합니다 인사를 전하니. 신경질을 부리며 그걸 알면 시켜 먹지 마! 버럭 하는 것이 아닌가. 혹여나 부모님이 들으셨을까 내색도 못하고 멍하니 치킨봉지를 건네받았다. 그날 치킨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트라우마가 됐는지 집에서는 배달음식을 자제했다. 택배도 무게가 나가는 것은 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사야 할 땐 배송메시지에 "1층에서 전화요망"을 남겨 전화가 오면 동생을 내려보내 대신 들고 오게 했다.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치킨과 피자를 시켜 먹고 무겁던 가볍던 내가 필요하면 뭐든 턱턱 택배로 사고 싶었다. 대원아파트에선 한 번도 이뤄진 적 없는 소박한 꿈인데 한편으론 여기서 사는 사람도 있는데 어린애에게 왜 그리 모질게 신경질을 부렸는지 아저씨가 야속하기도 했다.

  오래된 대원아파트는 오 년에 한 번씩 전체 도색을 했다. 막 도색을 마치면 마치 연지곤지를 찍은 회춘한 노인처럼 생기가 돌아보였지만 석 달을 가지 못했다. 특히 증오의 계단은 단 한 번도 손을 보지 않아 유일하게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곳으로 파란 기와지붕도 큰 태풍이 온 뒤 기와가 날아가 슬레이트로 바꾸는 대대적인 공사를 받았는데 이상하게 계단만 찬밥 취급을 받았다.

  


  내가 정말 자주 꾸는 악몽이 하나 있는데 배경이 대원아파트의 계단이다. 아무리 걸어 올라가도 우리 집이 나오지 않거나 계단이 뚝 끊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종종거리는 꿈은 깨고 나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마치 아직도 대원아파트의 계단을 헤매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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