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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속 Aug 29. 2023

내 방이 왜 궁금해?

모를 썸남의 마음

  철없던 시절엔 거리낌 없이 집으로 친구들을 데려왔다. 다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니 부끄러울 게 없었다. 한날은 교과서에 오븐이 나왔는데 우리 집 오븐이 떠올랐다. 우리 집에 화구 네 개짜리 가스레인지 밑엔 오븐이 있다며 뽐내 듯 이야기하자 친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집에 가서 빵을 구워 먹자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신이 나서 그날 하굣길에 친구 셋을 데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옥의 108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섰다. 엄마가 반기자마자 대뜸 오븐에 빵을 구워달라 말하자 엄마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슬쩍 불렀다.

"오븐은 인천빌라에 있었지. 못 가져왔어"

기대에 찬 친구들에게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려 얼굴이 달아올랐다. 육 학년이나 됐으니 친구들도 내 표정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는지 오븐에 오자도 꺼내지 않고 남루한 살림살이로 채워진 우리 집을 차마 좋다는 말은 못 하고 '내방보다 네 방이 더 크다' 같은 표현으로 꾸역꾸역 칭찬했다. 그 후 내가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는 일은 없었다. 그동안 고요히 잠자던 부끄러움이 깨어난 것이다.

  스무 살이 되었어도 내 방은 그대로였다. 초등학생 때 쓰던 오래된 책상과 누우면 몸이 근질거려 옷을 쌓아둔 9살 때 산 더블침대. 나는 자라는데 공간은 멈춰, 방안에 있으면 가슴이 그라붙었다. 

  흔한 화장대도 이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처음 가져봤으니 말 다했지. 차마 남에겐 보여줄 수 없는 쪽팔린 방인데 썸남 명재가 연락만 하면 방에서 찍은 셀카를 보내달라고 졸랐다. 아니 벗은 몸 사진도 아니고 내 방사진이 왜 궁금한지 이해가 되지 않아 서너 번 좋게 거절했다. 명재는 자기 소원이 내 셀카 사진을 갖는 것이니 제발 부탁한다고 하여 고심 끝에 최대한 가구가 보이지 않게 나무틀로 된 창문 앞에서 셀카를 찍어 보냈다.

  "혹시 수감 중이야? 감옥인 줄ㅋㅋㅋㅋ"

  이것이 연대생의 유머인가. 잠깐 머릿속이 멍하다 정신을 차렸다. 농담 아닌 농담으로 그에 대한 호감이 싹 식어버렸다. 그렇게 우리 집은, 내 방은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솔직히 지금도 집에 남을 선뜻 초대하지 못한다. 한 번 켜진 부끄러움은 여전히 ON, 대원아파트의 오래된 복도등 스위치인데 이제 보니 레트로 감성이 느껴져 멋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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