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묘소에서 바라본 풍경
며칠 전 정몽주 묘소에 다녀왔습니다.
정몽주 묘소는 용인에 있습니다. 태종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개성 풍덕군에 묻혔다가 1406년 (태종 6)에 묘를 지금의 용인시 묘현면으로 옮겼습니다. 설화에 따르면 정몽주의 고향이었던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장하려고 하였으나 옮기는 도중에 관직 이름을 적은 명정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 자리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살펴보니 이 자리가 명당이어서 하늘이 이 땅을 내려준 것이다라며 후손들이 의논하여 이곳에 묘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본래 이곳의 이름은 무명천을 잿물에 삶아내어 물에 담갔다가 빛이 바래도록 포쇄를 하던 곳이라고 해서 쇄포면이었는데 정몽주의 묘소를 만들면서 충신을 사모한다라는 뜻으로 1411년(태종 12)에 모현면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묘소 설명을 보니 정몽주는 학문에 뛰어났으며 청렴하고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고, 중국, 일본과의 외교에서 큰 공을 세웠네요. 특히 여진족과 왜구 격퇴 등 군사 부문에서 큰 공을 여러 차례 세웠다고 나와있습니다. 조전원수라는 직함이 눈에 띄는데요. 조전원수는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이 아닌 곳에 가서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벼슬이었는데, 그 직급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인이었으나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것으로 보아 매우 담대한 성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왕대에는 각 도에 도원수·상원수·부원수 각 1인씩 모두 3인의 원수가 해당 도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자기가 관할하는 도의 국방을 담당하였는데, 이때 타도의 원수로서 이름 그대로 조전(助戰)을 위해 파견되는 사람을 조전원수라고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전원수(助戰元帥))]
정몽주의 신도비가 들어있는 비각입니다. 신도비는 숙종 때 만들었으며,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김수증이 썼습니다.
송시열은 비문에서 '선생은 영웅다운 재주와 뛰어난 자질로 고려 말 임금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신하의 도리가 역사에 전해지니 고려에 선생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은 큰 행운으로 하늘이 우리나라를 위해 보낸 분이다. 선생의 학문은 배우는 이를 바르게 이끌어 마치 온 강물이 바다로 돌아가고 밤하늘의 별들이 북극을 향하는 듯하였다'라고 밝혔습니다.
묘소에 올라가는 길에는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는 홍살문과 단심가 비석, 정몽주의 어머니가 썼다는 백로가 비석이 있습니다. 백로가의 내용은 까마귀가 싸우는 곳에 백로가 가면 그 깨끗한 몸을 더럽힐 수 있으니 가까이 가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즉 정몽주의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뒷받침 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몽주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마치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였던 조마리아 여사의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마음먹지 말고 죽어라.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라는 편지와 같은 결연한 느낌을 줍니다.
(백로가 작가가 정몽주의 어머니인지는 정확한 근거가 없으며, 안중근 어머니의 편지 역시 실제 편지는 존재하지 않고 말로만 전해져서 그 근거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좋은 묘소의 조건을 '양지바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요?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따뜻한 곳입니다. 뒤쪽에 야트막한 산이 있고, 앞쪽으로는 시야가 넓게 확 트여 있습니다. 예전 이곳에 왔을 때 풍수지리를 배우는 사람들이 와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정말 명당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곳입니다.
새롭게 만들어놓은 문인석이나 각종 석물들이 있는데요. 아무래도 눈이 가는 것은 오래된 석물입니다. 오랜 시간을 지킨 문인석의 모습입니다.
비석에는 많은 내용이 담기는데, 그 중 하나가 그 사람의 벼슬입니다. 정몽주는 태종에 의해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지만 영의정이라는 관직 이름을 비석에 적지 않았습니다. 이 비석은 1517년(중종 2)에 문묘에 배향될 때 세운 것으로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이라 적혀있습니다. 고려의 벼슬만을 적어서 고려에 대한 충의와 조선왕조를 섬기지 않았음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설화에 따르면 조선의 벼슬을 넣은 비석을 세웠더니 번개를 맞아 산산이 부서졌고, 다시 고려의 벼슬만을 넣은 이 비석을 세웠더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변에는 정몽주의 아들과 손자 등 영일 정 씨 집안의 무덤들과 정몽주의 증손녀 사위였던 저헌 이석현의 묘를 볼 수 있습니다. 정몽주의 묘소가 이곳에 마련되면서 후손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풍수지리를 잘 모르는 제 눈에는 각각의 묘소가 모두 명당으로 보입니다.
태종은 왕으로 즉위한 해에 정몽주에게 영의정 벼슬을 내리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조선왕조가 세워지는 것을 반대했던 정몽주에게 조선왕조가, 특히 죽음에 직접 관여했던 태종이 시호에 '충'이라는 글자를 넣게 한 것은 매우 아이러니해 보입니다. 묘소 이장에 대한 전설이나 문묘 배향, 비석에 대한 전설은 조선왕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충'을 강조하며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됩니다. 특히 태종이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을 '고려를 배신하고 나라를 마음대로 하려고 했던 역적'으로 만든 것을 함께 생각해보면 정치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이익'에 따라 결정된 것에 따른 아쉬움이 남습니다.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도' 고려의 충신이 되겠다고 하였으나, 그의 충심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조선왕조에 대한 충심'을 강조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정몽주의 '일편단심'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은 '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그 일이 쉬운 일이냐, 어려운 일이냐 또는 성공할 것인가와 실패할 것인가를 살피지 말고 옳은 일인가, 옳지 않은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라고 했습니다. 정몽주의 선택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었으며, 그의 선택과 삶은 많은 사람에게 모범이 됩니다. 정몽주의 묘소에서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스러운 모습보다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꿋꿋이 실천한 정몽주의 모습을 더욱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