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후 긴 시간 동안 불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모습을 조각으로 만들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조각하고 그 조각을 숭배하는 것은 진리를 가르치고자 했던 자신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또한 그 무렵에는 부처와 같은 초월적 존재, 즉 신의 모습을 인간으로 표현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지 500년이 지났을 무렵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신앙의 대상으로서 구체적인 모습이 요구되었습니다. 마침내 인도 마투라 지역과 간다라 지역에서 불상이 만들어집니다. 간다라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에 의해 지배층이 서양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간다라 불상은 곱슬머리와 깊게 파인 눈, 큰 코 등 서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추운 기후로 인해 두터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마투라 불상은 토착적인 인도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더운 기후의 영향으로 천을 한쪽 어깨에 살짝 걸친 정도로 옷을 입고 있습니다.
불교가 중국으로 퍼지자 중국에서 만들어진 불상은 처음에는 인도 불상의 모습을 따랐으나 차츰 중국인의 모습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운강석굴에는 북위의 황제 5명의 모습이 불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있습니다. 아래 모습은 16굴에 있는 불상으로 북위의 4대 황제 문성제의 모습을 불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옷은 중국 황제들이 입고 있는 곤룡포의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간다라 불상, 마투라 불상, 중국의 불상들은 모두 당시 그 지역의 지배층의 모습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가 나라의 통치 원리가 되면서 더욱더 강해집니다. 왕즉불 사상, 즉 ‘왕과 부처가 같다’라는 생각을 백성들에게 널리 퍼뜨려서 왕의 권위를 더욱 높였습니다. 그럼 왕의 모습을 닮은 부처는 어떤 모습이어야 했을까요? 각 지역마다 생각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당당함, 강력함, 자비로움, 지혜로움’등의 긍정성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체적으로 ‘그 시대, 그 지역의 잘 생긴 30대 남성의 얼굴’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너무 어리지 않으면서도 인생의 지혜를 어느 정도 깨닫고 있는 30대 정도의 나이로 표현되었고, 누구나 따를 수 있는 멋진 보습으로 표현하다 보니 백성들 이끄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거나 백성들을 자비로 이끄는 현명하면서도 잘생긴 모습으로 나타내야 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의 불상은 어떨까요?
석굴암의 본존불상이나 서산마애삼존불처럼 잘 생긴 불상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입상의 얼굴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무색하게 합니다. 일단 얼굴이 너무 커서 전체 크기의 1/4이나 됩니다. 거기다 얼굴은 사다리꼴에, 눈코입이 얼굴을 꽉 채울 만큼 비정상적으로 크고, 특히 코는 넓적하여 미련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너무 대충 만든 것 아니냐고요? 이 불상은 고려 초기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강해진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광종이 37년이나 걸려 만든 것입니다. (완성시킨 왕은 목종입니다.) 높이 18.12미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이기도 합니다.
고려 역시 왕은 곧 부처라고 생각하는 왕즉불 사상을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광종의 모습을 상징하는 관촉사석조미륵보살 입상이 못생긴 것은 광종이 못 생겨서였을까요?
관촉사는 평야지대의 작은 언덕에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높이 우뚝 서 있어서 관촉사의 어떤 건물도 그 얼굴을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즉 그 지역에서 일하던 농부나 지나가던 사람들도 쉽게 그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또한 눈, 코, 입이 비정상적으로 큰 것은 멀리서 보았을 때 그 얼굴의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관촉사가 세워진 논산지역은 옛 백제의 땅으로 석조미륵보상입상은 왕의 힘과 자비로움을 인근의 호족들과 백성들에게 널리 보여주었습니다.
최근 많은 학자들이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을 ‘못생긴 것’이 아닌 강한 힘을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비로운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던 통일신라의 불상에서 벗어나 고려 초기 혼란한 사회를 주도하는 강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파격적인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불교처럼 ‘신앙’과 관련한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하지만 광종은 기존의 것을 답습하지 않는 파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고유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중국의 과거제도를 시행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줄이고 실무능력이 뛰어난 관리를 뽑았습니다. 호족들의 거센 반대가 있었지만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예전에 양인이었던 노비를 양인으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런 광종의 파격이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의 모습으로 표현되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