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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yverse Oct 29. 2020

I 미스 New York

뉴욕 탈출기

원래 한 챕터로 끝내려던 뉴욕이 어느덧 세 번째 챕터로 들어서게 됐다. 사실 처음에 한 챕터로 끝내려던 이유도 한 번 풀기 시작하면 할 얘기가 너무 많은 게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은 뉴욕을 계속 얘기하다 보니 이제 그리워진다. 그렇게 그리워할 뉴욕을 왜 굳이 떠나오게 됐을까.

뉴욕에서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는 한국인 2세가 설립한 부동산 회사였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소셜미디어로 마케팅 및 홍보를 진행하던 M사는 패션업계 출신이지만 소셜미디어 경력이 있는 내 이력을 바탕으로 나를 채용했다. 2001년에 처참하게 무너진 월드트레이드센터 건물주이자 뉴욕 최대의 부동산 회사인 S사에서 투자를 받고 있던 M사는 새로 지은 월드트레이드센터 건물 중 하나에 사무실을 내고 있었다. 매일 아침 그라운드 제로를 지나 출근을 하던 나는 올해 2월 초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일찍 사무실로 향했다. 선망받는 기업이지만 아직 스타트업 규모에 지나지 않던 M사의 전 직원은 큰 사무실 하나에 다 같이 모여 업무를 봤다. CFO이자 사무실의 소식통과 같았던 넘버 투는 아침에 시사 뉴스를 챙겨보곤 했는데, 인터넷 뉴스를 보던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한 20분 후 돌아온 그는 손에 비닐봉지를 하나 들고 있었다. 속에 들어있던 박스를 꺼내면서 그는 말했다.

“여기 내가 마스크 많이 사 왔으니까, 필요한 사람은 꼭 가지고 가서 쓰고 다녀요.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신생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요동을 치고 있는데, 미국에서도 케이스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고 하네요.”

중국 마케팅팀이 함께 있던 사무실에서는 그때만 해도 이 신생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 거라고 상상하기도 전이어서 다들 뉴스로만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마침 중추절을 맞이해 중국에 갔다 복귀할 예정인 인턴이 있었는데, 다들 걱정이 되니 집에서 일주일 더 쉬다 나오라고 한 것뿐, 큰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퍼진 바이러스는 곧 인구 밀도가 높은 뉴욕을 순식간에 휩싸게 되었고, 사람을 만나는 게 기본인 부동산 업무는 바로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비수기라 상황이 좋지 않던 M사는 S사의 투자를 보장받기 위해 일정 수익을 내야만 했고, 월 수익이 줄어들자 어쩔 수 없이 비용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업계나 그렇듯 비용 절감을 할 때 가장 먼저 잘리는 부분은 마케팅 비용이었다. 입사한 지 채 3개월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상황을 대충 짐작하고 있던 나는 내가 가장 먼저 정리 해고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니나 다를까, 사장은 나를 불러 안타까운 어투로 정리 해고를 통보했다. 내가 통보를 받고 다음날부터 하루에 한 명씩 계속 정리 해고를 했다고 한다.

상황이 상황이 만큼 절망에 빠지거나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전 세계는 더 급속도로 코로나 바이러스에 점령당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뉴욕도 급속도로 확진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3월 중순에는 레스토랑과 바, 공원등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공장소는 다 폐쇄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에 사람들은 다들 당황하고 어떻게 대쳐 할지 몰라했다. 아시아인들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은 뉴요커들은 처음엔 마스크도 제대로 쓰고 다니지 않았다. 레스토랑 업계에 일하는 남편도 3월 말이 되자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4월 초부터 우리 부부는 뉴욕 아파트에서 자가 격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1월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일반인보다 더더욱 조심해야 했고, 우리는 장을 보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상황이 금방 개선될 줄 알았을 때였으나, 4월 중순이 되어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우리는 뉴욕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회사에서 이메일을 한 통 받았고, 내용인즉슨  취업비자로 체류하고 있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경우 본국으로 60일 이내에 소환되어야 하며, 그 사이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비자 스폰서를 받을 경우에만 계속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걱정하던 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몇 달 있으면 출산도 해야 하고,  그 사이에 수입도 없는 상황에서 뉴욕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게 모두 부담되는 상황이었기에 안 그래도 우리의 갈길을 정해야 할 판이었다. 미국에서 열심히 일하며 세금을 냈어도 이런 순간에 별 지원은 생기지 않았다. 트럼프 정부에서 작년에 세금을 낸 기록을 바탕으로 실업급여를 지급하고 있었지만, 월세를 내고 나면 생활비로 남는 돈은 얼마 없었다. 갈 곳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미국이 고국도 아닌 마당에 우리는 결정의 기로에 섰다. 남느냐 떠나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반면 미국에 비해 확진자가 줄어드는 추세였던 유럽 국가들은 미국보다 빨리 재오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 맞춰 남편은 본국에 취업 기회를 찾을 수 있었고, 우리는 더 많은 생각할 것 없이 이거다 싶었다. 건강 복지제도가 미국보다 앞서있기로 유명한 유럽 국가 중에서도 남편이 국민인 프랑스에 간다면 출산도 맘 편히 무료로 할 수 있고 우리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뉴욕에 온 이상 더 남고 싶은 건 사실이었지만,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우리에게 별 이득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우리는 남편의 취업을 적극 추진해 재빨리 유럽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남편은 극적으로 취업에 성공했고, 우리는 유럽이 국경을 닫기 전에 서둘러 미국을 떠날 날짜를 잡았다.

코로나가 처음 나타난 지 거의 10개월이 지난 지금, 전 세계는 초반에 상상하지 못한 이 사태를 아직까지 수습하고 있다. 그러면서 소소한 변화를 일으키던 바이러스의 여파가 이제는 모든 사회적 현상, 행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규모 행사부터 콘서트, 예식 등은 모두 연례 취소 사례를 일으켰고, 사무실이나 여럿이 모여야 할 수 있는 작업도 대부분 취소되었다.

반면 세계가 코로나를 모르던 시절인 작년만 해도  패션과 미디어 프로덕션의 허브인 뉴욕에서는 패션위크와 각종 드라마 및 영화 촬영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예전에는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연례행사로 2월과 9월에 열리던 패션 위크는 이제 소호의 스프링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여러 장소에서 치러졌다. 또한 LA에 이어 각종 드라마 시리즈와 영화 촬영이 활발한 뉴욕에서는 도시 곳곳에서 촬영을 하는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코로나가 터지기 전 해인 2019년 나는 운이 좋게 패션 위크와 드라마 촬영장에서 일을 할 기회를 찾을 수 있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앞으로 절대 해 보지 못할 경험을 해 봤음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런 기회들이 있었기에 블로거로서 재도약을 노리던 나도 다시 용기를 갖고 유튜브를 시작하게 되었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M 사에 채용될 수 있었다.

뉴욕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동안 뉴욕에서 찍었던 수많은 사진들을 들여다봤다. 원래도 예전 사진들을 보는 걸 좋아하는 나이지만, 유럽에 돌아와서 출산과 육아에 파묻혀 잊고 살던 뉴욕에서의 내 모습을 보니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그 당시에는 패션 블로거로 활동하려고 안간힘을 다 써서 의상이나 외모에 투자했었고 매일 같이 새로운 옷을 사거나 메이컵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다시 돌아보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많은 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나만의 스타일을 찾는데 나름의 어려움을 겪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그래도 한 살이라도 젊고 의지에 넘치던 나 모습 자체가 밝고 화려해 보였다. 내가 내 자신을 그리워할 수도 있는 것일까.

게다가 뉴욕은 항상 자신의 꿈을 이루기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만큼 경쟁이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또 같이 어깨를 맞추다 보면 서로 좋은 영향도 받고 긍정적인 에너지도 나누게 되어 좋은 결과를 이루는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인스타그램으로 컬래버레이션이나 창의적인 작업을 피칭해 볼 수 있고, 생각보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사람들과 좋은 친구가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나도 뉴욕에 사는 동안 여태껏 해본 중 가장 많은 컬래버레이션을 해 보았고, 그렇게 만난 업계 친구들과 향후 수익을 일으킬 수 있는 작업까지 이어가기도 했다. 사실 창작이라는 것은 돈을 받고 하느냐 안 받고 하느냐의 차이지 어떤 경우든 예술적인 작업임에는 다를 바가 없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수입을 일으켜야 공식적으로 칭해줄 수 있는 인플루언서들도 처음에는 관객을 많이 끌기 위해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 동안은 창작의 고통이 있게 마련인 것처럼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좋은 여건들을 가지고 있던 나는 아직도 창작의 고통을 맛보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내가 지금 이끌고 있는 소셜 미디어 채널을 통해 나만의 관객을 모아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기를 항상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 비밀의 소스는 아무도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기에 소셜 미디어 마케팅 및 홍보는 아직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새로운 플랫폼이 매일매일 생겨나니 언제 저 많은 관객을 다 점령할지는 개인의 역량에 달렸다.  

그 와중에 내가 찾은 플랫폼은 브런치 북이다. 영상과 사진으로 나를 나타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난 뒤 정작 내 진심은 싣지 못하고 지쳐있을 때쯤, 내 속내를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준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 지금 당신이 들어와 내 글을 읽어주고 있음에 무한 감사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나만의 심심한 이야기에 당신이 끝까지 함께 해 주길 간절히 바라본다.


 *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the_young_heiress

* 더 많은 비디오는 Yoonyverse 유투브에서

내가 가장 애정하는 촬영컷
맨해튼 라디오씨티에서 했던 촬영컷
센트럴파크에서 진행했던 포토슛 촬영컷
뉴욕타임즈를 소품으로 진행한 포토슛 촬영컷
웨딩드레스를 입고 라커웨이 비치에서 진행한 촬영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촬영한 뉴욕 첫 포토슛
현지 디자이너와 콜라보레이션으로 진행한 브루클린 브릿지 포토슛
타임스퀘어에서 뼈를 뚫는 추위속에 진행한 한복 촬영
촬영 전 메이컵중인 나와 메이컵아티스트
센트럴파크에서 촬영중인 나와 포토그래퍼 비하인드씬
2019년 가을 뉴욕패션위크 행사장에서
유명한 빅토리아 시크릿 포토그래퍼 러셀 제임스와 함께
2019년 9월 패션위크 당시 내가 모델로 섰던 수영복 패션쇼 백스테이지
2019년 9월 초청받아 게스트로 갔던 구호 행사장에서
2019년 9월 대체모델로 활동했던 톰포드 행사장 앞에서
스테프로 일했던 유투브 행사장에서
마지막으로 다니던 부동산 사무실 근처 웨스트필드몰에서
남편과 함께한 그랜드 센트럴 포토슛 촬영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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