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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yverse Oct 29. 2020

코로나 베이비

Happily ever after

모든 일은 닥쳐봐야 안다. 이 말이 참 틀리지 않다는 걸 요즘에 와서야 자주 느낀다.

나는 어려서부터 편견과 관습을 싫어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소위 보편적인 잣대가 나에게는 잘 맞아떨어지지 않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보편적인 아름다움, 보편적인 옷차림, 보편적인 생활 습관 그 모든 게 나에게는 오히려 따라가기 더 힘들 때가 많았다. 사람들이 ‘보통’ 그렇게 한다고 하는 것들이 나에게는 안 어울리거나 맞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스운 예로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젖살이 많았던 나는 보통 여자아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긴 생머리보다는 쇼트커트나 단발이 잘 어울렸다. 그러다 보니 레이스 달린 원피스나 치마보다는 쫄바지나 청바지가 더 잘 어울렸고, 스타킹을 신고 할 수 있는 놀이보다 바지를 입고 하는 놀이에 더 강했다. TMI일수도 있겠지만 어릴 적엔 아직 어려서 엉덩이가 작아서 변기통에 쏙 빠질 수도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람들이 보통 앉는 자세로 앉지 않고 옆으로 앉아서 볼일을 봤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존재의 이유였고, 커서까지 일반적이고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것들을 하기 일부로라도 거부하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굳이 이 말을 먼저 하는 이유는 우리는 주변에서 들리는 일반적인 정보나 경험담을 듣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내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청개구리처럼 내 주장만 하려고 노력하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고 사회적 동물이기에 나 또한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 여자인 만큼 항상 미리 사서 걱정을 했던 것 들 중 하나가 바로 임신이었다. 우선 언제 임신을 하느냐 그것은 항상 큰 걱정거리였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하게 되겠지라고 항상 막연하게 생각했던 나는 내 인생을 임신할 수 있는 나이에 맞춰 계산해 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나이가 먹을수록 걱정이 늘어갔다. 노산은 힘들다는데 나는 어떻게 하지? 남편을 29살에 만난 나는 아무리 빨리 아기를 갖는다고 해도 30대에 낳게 될 판이었고, 3년 이상을 사귀는 동안 결혼도 안 했었으니 도대체 애는 언제 낳게 될까 당연히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태껏 열심히 먹은 피임약도 부작용이 일까 봐 걱정이 됐다. 듣기만 해도 끔찍한 불임이 될 수 있는 0.01%가 나이면 어떡하지 하는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걱정이었다.  평생 다이어트를 하고 산 사람으로서 임신 후 체중 회복이 안돼 영원히 임신 때 찐 몸무게를 달고 살면 어떻게 하나도 큰 걱정 중 하나였다.

그런저런 걱정을 하는 동안 어느새 만으로 35살, 한국 나이로 하면 36살이 되었고 왠지 그 이상은 더 넘기면 앞으로 임신 시기를 계속 놓칠 것 같았다. 그래서 만으로 34살이던 2019년 겨울 어느 날, 3년째 챙겨 먹던 경구 피임약을 깡으로 끊기로 마음을 먹었다. 3년 동안 하루도 안 빼먹고 꼬박꼬박 먹은 것도 아니었기에 설마 끊는다고 바로 임신이라도 되겠어하고 별 걱정 없이 남편에게 말도 안 하고 지냈다. 그리고는 연말이 되어 우리 부부는 신나게 연말 파티과 부부동반 모임을 하고 다녔다.

 열심히 놀고 나니 어느새 2020년 새 해가 밝았다. 뉴욕에서 맞는 두 번째 새해였다. 친구들과 2019년 마지막 날 카운트 다운 홈파티를 하긴 했지만 새 해날이면 항상 모여서 친척집에 새해 인사도 떡국도 먹는 가족들이 그리울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을 끌고 케이타운에 이름도 미스코리아인 우리 단골집에 가 떡국을 먹었다. 그리고는 이틀 뒤 벌써 내 생일이 다가왔다. 연초와 너무 붙어 있는 내 생일은 생일파티를 하기 항상 애매했다. 그래서 당일은 보통 남편과 오붓하게 지내곤 했다. 내 생일이니 내가 좋아하는 걸 해야겠다 싶어서 마침 링컨센터에서 시작한 뉴욕 발레단 공연을 보러 가려고 내가 직접 표를 끊었다. 그리고 평상시 가보고 싶었던 미스터 차우에도 테이블을 예약했다. 뭐 내 생일인데 내가 직접 하나 싶을 수도 있지만, 서프라이즈를 안 하는 남편에게 하도록 내버려 뒀다가 집에서 손가락 빠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낫다. 그래서 거침없이 예약을 다 하고 남편에게 통보를 했다. 평일이어서 둘 다 출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공연 시간에 맞춰 링컨 센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름 공연장에 입고 갈 옷과 헤어 메이컵까지 다 생각한 나는 퇴근 후 회사 파우더룸에서 옷을 갈아입을 생각을 하고 열심히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우리 스키장 안 갈래? 자기 생일이니까 사람들이랑 같이 스키 타면 좋잖아!”

말투가 내 생일을 새러 스키장을 가자는 게 아니라 누가 갑자기 스키장을 가자고 막판에 연락을 해 거기다 내 생일을 끼워 맞춘 말투였다. 생각하면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여럿이 놀러 갔다 내 생일이 중심이 되지 않고 스키 타는 게 중심이 되면 더 속이 상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생일보다 스키를 타러 가는 게 더 중요했던 남편은 되려 막무가내였다. 그리고 남편 말대로 스키장에 가려면 오후 6시 반에 지인 차를 타고 떠나야 하는데 나는 6시 반이 퇴근 시간이었다. 나보다 훨씬 일찍 퇴근을 하던 남편은 자기가 집에서 짐까지 다 챙겨가지고 직장 앞으로 데리러 갈 테니 몸만 나오라고 꼬셨다.

“근데 창고 키가 나한테 있는데?”

아파트 내에 스키복을 다 보관할 자리가 없었던 우리는 여행 가방에 스키복을 넣어서 아파트 지하 창고에 넣어 놨었다. 이 정도면 남편도 포기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가는 거지? 그럼 6시 반까지 데리러 간다!”

아무리 내 심정을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스키장 생각뿐. 하긴 살 집이 없을 때도 스키장은 갔는데 이젠 살 집도 있겠다, 부인 생일이라고 스키장을 안 갈 터가 있겠는가?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 나는 가긴 가되 왜 선뜻 가겠다고 하지 않은 건지 확실히 말해주기로 했다. 복 받은 인턴에게 어쩔 수 없이 무료로 발레 티켓을 양도해주고 퇴근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6시 15분이 되자 남편의 문자가 거의 전화 진동 오듯 울려댔다. 그라운드 제로 근처에 있던 사무실 건물 앞에 차를 이미 세우고 있는데 아마도 오래 기다릴 수 없을 테니 가능하면 빨리 나오라는 거였다. 한국 회사의 정서상 6시 반 땡 하고 칼퇴를 하는 것만으로도 눈치가 보이는 나는 아직 15분이나 남은 상황에서 먼저 퇴근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일이라도 생일 퇴근이라는 건 없었다. 마침 그 날따라 건조한 날씨 때문인지 소프트렌즈를 낀 두 눈이 안구건조증 때문에 심하게 아팠었다. 거의 눈에 불이 난 것 같은 수준이었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눈이 아파 고생하고 있던 차라 눈 핑계로 15분이라도 일찍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옆자리에 있던 매니저에게 거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들이대며 눈이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컴퓨터를 못 보겠다고 하고 뛰쳐나와버렸다. 진짜로 눈이 너무 아프긴 아팠다.

발레를 보러 갈 생각으로 신은 싸이하이 부츠를 신고 열심히 남편이 지인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길가로 뛰어나갔다. 비상등을 켜고 주말 스키 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 생일 겟어웨이였다. 신나게 가자 하고 사람들의 생일 축하를 받으며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예상대로 스키장행은 내 생일 주말이 아니었다. 뭐 축하도 받고 소소한 선물도 받았지만, 내 생일을 위해 준비된 서프라이즈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내심 속이 상했던 나는 숙소에 도착해 친한 여자 일행과 재회를 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상상한 고상한 발레 공연과 화려한 레스토랑 생일 디너와는 너무 거리가 먼 소원한 분위기에서 생일을 맞이했다는 게 서러웠다.

그래도 이미 간 이상 스키도 열심히 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꽉 찬 주말을 보내고 일요일 밤 집으로 돌아왔다. 나름 생일 주말에 스키장에 갔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특별한 일정이었다. 좋게 생각할 수도 있는걸 너무 투정만 부리지 않기로 하고 남편에게도 재밌었지만 내 생일 디너를 다시 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애교를 부렸다. 피해 갈 수 없는 걸 아는 남편은 흔쾌히 오케이하고 우리는 힘든 몸으로 잠을 청하며 다음 한 주를 맞을 준비를 했다.

맞벌이 생활을 하던 우리의 한 주는 쏜살같이 지나갔고 금요일이 되자 숨을 좀 돌릴 수 있었다. 연말 행사에 지난주 스키 여행까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좀처럼 보내지 못했던 우리는 금요일 밤에 모처럼 둘만의 시간을 즐겼다.  남녀 성인 둘이 둘만의 순간을 오붓이 보내다 보면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당신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토요일 아침,  겨울 햇살이 안방으로 가득 비쳐 들어왔다. 오붓한 밤을 보낸 우리는 주특기인 주말 뉴욕 탐방을 나설 생각을 하며 모닝커피를 만들러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불 밖으로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화장실에 먼저 가야지 하고 침대 밖으로 나와 일어서서 한 발짝 걸음을 내딛는 순간, 다리가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쥐가 났나? 한 발짝 더 걸었다. 다리가 아니라 가랑이었다. 가랑이에 쥐가 난 적은 없었는데...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통증에 몸이 왜 이러지 그렇게 피곤했었나 하고 천천히 화장실로 걸어갔다. 볼일을 보려는데 아랫동네가 너무 아파왔다. 어제 우리가 밤에 그렇게 난리를 피웠나? 무리한 것 같진 않은데 왜 이러지? 그동안 그렇게 피곤했나…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을 참고 볼일을 보고 주방으로 나왔다. 남편도 왜 그런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주말엔 무슨 일이 있어도 놀러 나갈 생각이 가득했던 나는, 아픔을 참고 나갈 준비를 하고 발을 절다시피 하며 남편과 집을 나섰다.              

 발품을 팔아야 제대로 구경을 할 수 있는 뉴욕을 우리는 항상 미친 듯이 걸어 다녔다. 윌리엄스버그 쪽에 살던 우리는 윌리엄스버그 브릿지를 건너 맨해튼까지 걸어가는 게 일상이었다. 쥐 난듯한 가랑이를 이끌고 반나절을 걸은 나는, 오늘은 좀 안 되겠다 싶었다.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오늘만큼은 무리하지 말고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우선 오늘은 철수하자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뒤로 일요일은 침대에서 아예 나오지 못했다.

월요일 아침, 출근은 해야 하는데 통증은 계속되어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럴까, 아무리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봐도 왜 그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회사에 연락을 취하고 병원에 들렀다 출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랫동네가 이상했던 만큼 원인 모를 통증을 진료받으러 맨해튼에 있는 한인 산부인과로 향했다.

남편 회사에서 가족 단위로 들어주는 보험 신청 기간을 넘긴 우리 부부는 2020년 시작과 함께 받을 수 있는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비로 내야 하는 상황에서 간 산부인과에서는 진료비가 450달러라고 했다. 와... 해도 해도 너무 비쌌다. 왜 아픈지도 모르고 받는 진료비가 거의 지난 주말 스키장에서 쓴 돈이랑 맞먹는다니. 순간 이 돈을 내고 진료를 받아야 하나 싶었다.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을 한 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래저래 해서 진료비가 450달러인데 어떻게 할까 받지 말고 그냥 회사 갈까 하고 물었더니 남편은 자기가 줄 테니 그냥 받으라고 했다. 아픈 건 어쩔 수 없지 않냐는 거였다. 그래, 어디선가 실손이 나올 구멍이 있으니 온 김에 검사나 받고 가자 하고 다시 산부인과 안으로 들어갔다. 자비로 처리할 경우 진료비를 먼저 수납해야만 진찰을 받을 수 있는 미국의 시스템에 따라 카드를 긁고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개인 병원인 산부인과 안에서 결재를 하고 통로에서 순서가 되길 기다리고 앉았다. 그때 의사 선생님이 내 앞을 지나가시며 말했다.

“우선 초음파 먼저 하고 진료할게요.”

엥, 초음파? 더 젊었을 때도 검사차 산부인과에 간 적은 있었지만 초음파는 처음 해야 한다고 들은 나는, 산부인과는 웬만한 검사는 다 초음파로 하나 싶었다. 뭐 나야 전문가가 아니니까 하고 여자 간호사를 따라 초음파실로 들어갔다. 역시 한국인이었던 그녀는 익숙한 손길로 젤 크림을 내 배에 바르며 우선 초음파로 검사를 한 다음에 그 결과를 가지고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받으라고 했다. 초음파가 처음이었던 나는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지? 하면서 간호사가 말하는 대로 끄덕끄덕 하며 듣고 있었다. 초음파 기계 세팅을 다 마친 간호사는 화면을 쳐다보며 센서 기를 배에 가져다 꾹 누르며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화면에 나타나는 걸 어떻게 보는지 전혀 모르는 나는 간호사만 바라봤다.

“임신 11주 정도 됐네요.”
“네? 임신이요?”
“네, 여기 애기 심장이 있고요...”
“임신이라고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두 글자가 믿기지 않았다. 내가 임신이라니, 그래서 가랑이가 그렇게 아팠다니. 나도 여자구나, 임신이 가능했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저기… 좋아서 우시는 거죠? 가끔 싫어서 우시는 분들도 있어서...”

나는 당연히 좋아서 우는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빛의 속도로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임신이래. 강낭콩만 한 아기의 심장도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심장이 잘 뛰고 있네요.”

간호사는 성인의 심장보다 두 배는 빠르게 뛰는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다. 아직 눈도 없고 코도 없는 아기가 가장 먼저 생기는 생체 기관이 심장이라니. 말 그대로 생명의 신비였다. 나는 쿵쾅쿵쾅 뛰는 아기의 심장소리를 비디오로 찍어 남편에게 보냈다. 조금 있다 바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자기, 메시지 봤어.”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자 참고 있던 눈물이 더 흘렀다. 일부러 계획한 게 아니어서 그런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더 감격스러웠다. 이렇게 말하면 클리셰 같지만 우리 사랑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뉴욕에 처음 온 우리를 재워준 지인과 이제는 함께 일하고 있던 남편은 이 감격스러운 소식을 지인과 회사 동료들에게 전하고 축하받고 있었다. 피임약을 끊은 지 약 3달만의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임신에 대한 나의 우려는 한순간에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임신 모험담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전 챕터를 이미 읽어봤다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게 1월 초반이니까 한 달 있다가는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신종 바이러스가 터졌고, 그 후 채 한 달도 안돼 전 세계는 팬데믹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왜 내 인생은 갈수록 고생길이 훤할까 하고 원인을 굳이 따져보자면 한 군데에 정착하지 않고 이 나라 저 나라를 휘졌고 돌아다니며 국제적으로 살아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데에 있을 수도 있다. 그게 과연 고집일까, 아니면 국제 연애를 해 결혼을 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섭리일 까는 오직 먼 미래에 그 결과를 보고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프렌치 엔딩인 만큼 인생은 동화에 나오는 뻔한 해피엔딩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치열하고 때로는 아름다운 현실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때 맞이한 엔딩이 오히려 진정한 해피 엔딩일 수도 있는 것이다. 브루클린의 프로스펙트 하이츠라는 동네를 처음 놀러 갔다가 잡동사니를 파는 앤틱 샵에 들른 적이 있었다. 이가 빠진 그릇이며 오래된 레코드 등을 값싸게 팔고 있는 샵 입구에 창문과 같이 생긴 투명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격이 안 붙어있던 투명 액자를 보는 순간 나는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샵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부르는 게 값이 되어 단돈 5달러에 손에 넣은 액자에는 내가 원하는 우리 부부의 프렌치 엔딩이 쓰여 있었다.

Happily ever after.      

강낭콩에서 좀 큰 후 첫 초음파 사진
코로나 초반기 뉴욕에서
임신한 사실을 안 그 날 찍은 셀카
인스타에 처음으로 올렸던 임신 발표 사진
드디어 한 내 생일 디너
끌려간 스키장에서 캠프파이어중
설날 미스코리아에서 떡국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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