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출산
곁다리가 더 많았던 비자 여행도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그래도 유종의 미로 스타벅스에서 마지막 조식을 하기로 한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에어비앤비를 떠나 익숙한 밀라노 시내로 향했다. 트램과 찻길이 섞여 있어서 자칫하면 진입금지 길로 들기 쉬운 밀라노 시내에 벌써 3일째 차를 몰고 갔지만 아직도 길이 헷갈렸다. 주차는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불법으로밖에 할 수 없었던 우리는 빨리 아침을 먹고 서둘러 길을 떠나기로 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많이 없던 드넓은 스타벅스 로스터리는 뉴욕에 있는 첼시 매장에도 자주 갔었지만 유독 밀라노 지점이 정이 더 많이 가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맨날 마시던 신선한 오렌지 주스와 드립 커피 그리고 각종 패스츄리를 시켜서 배를 채운 뒤 서둘러 차를 세운 좁은 길로 돌아갔다. 운이 나빠서 마지막 날 차가 견인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었다. 서둘러 돌길을 따라 뛰다시피 걷고 있는 와중 남편 휴대폰이 울렸다. 프랑스 전화번호였다.
“알로?”
며칠 전 포지타노를 떠나오며 시부모님의 전화를 받은 남편은 이제 곧 신경 써야 할 내 출산을 위해 사회 복지 센터에 전화해 보라는 그들의 말에 따라 나는 잘 알지 못하는 행정 기관에 전화를 했었다. 그 기관에 내 상황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곧 있으면 출산을 해야 한다고 도움을 요청한 남편에게 관련 부서 사람이 해결책을 가지고 전화를 한 것이었다. 담당자는 다음 주 월요일로 약속 날짜를 잡아 주며 마르세이유 5번 행정 구역 있는 국립 병원에 가서 사회 복지 담당자를 찾으라고 알려주었다. 전화예절이 우리나라만큼이나 깍듯한 프랑스어로 남편은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됐어, 드디어!”
베이비문을 끝으로 이제 정말 출산이 코앞으로 다가온 우리는 그때까지 비자 문제, 그로 인한 소셜 시큐리티 미발급 문제 등으로 인해 출산할 병원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리 되는대로 한다고 해도 좀 많이 심각했던 상황에 나는 최악의 경우에 사비로 출산 비용을 다 부담해야 할 수도 있겠다고만 생각해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프랑스에서 그렇게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며 본인도 잘 알진 못했지만 끝까지 우리에게 적용 가능한 국가 지원 프로그램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다 받게 된 전화는 그동안 남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주는 듯했다.
처음으로 임신 사실을 발견한 게 11주 차인 1월 첫 주였으니 미국 산부인과에서는 그들의 계산 방법에 따라 40주 차인 8월 31일을 예정일이라고 알려준 상태였다. 그렇게 따지면 2주도 채 남지 않은 예정일이 프랑스에 와서는 또 그들의 계산법에 따라 또 9월 4일로 바뀌었었다. 막달이라 배가 최대한으로 부풀어 오른 거 말고는 몸에는 별 다른 변화는 없는 상황에서 어떤 예정일이 맞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주치의나 산파도 없었으니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프랑스에 도착해서 한창 병원을 알아볼 때 알게 된 게 있다면 여기는 출산을 할 때 산부인과 의사와 출산을 할지 산파와 출산을 할지 고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국가적으로 산파 제도가 활발한 프랑스에서는 산파를 고를 경우 임신부터 출산, 그리고 산후조리까지 모두 산파와 할 수 있었다. 단, 출산과정에서 응급 상황이 생겼을 경우에는 산파의 판단하에 언제든 산부인과 의사를 부를 수 있었고 그렇게 할 경우 모두 국가 지원이 가능했다. 반면 산부인과 의사를 택할 경우에는 70프로만 국가 지원이 가능했고 나머지는 사보험이나 자기 부담금으로 처리해야 했다. 처음에는 이 제도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산파의 위력에 대해서도 전혀 인식이 없었던 나는 정황상 산파를 택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좀 불안했다. 출산 중에 혹시 응급사태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나, 그러다 나나 애나 평생 잊지 못할 트라우마가 생기면 어떻게 하나 하고 말이다.
이래저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다음 주 월요일, 예정대로 안내받은 국립병원을 찾았다. 병동이 여러 개였던 국립 병원은 꽤 큰 종합 병원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사회 복지 담당자 사무실을 찾았다. 최고급 병원은 아니었지만 나름 깔끔했던 국립 병원은 유독 의료진들이 다 친절했다. 방향만 물어도 열심히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사회 복지 담당자 방 앞까지 찾아갔다. 똑똑. 문을 두들이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 방이 따로 있던 사회복지 담당자 사무실을 열고 들어가니 방 한쪽 켠에 어지럽게 신생아 옷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다. 좀 심한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미치광이 과학자 연구실을 연상시키는 사무실에 앉아있던 사회 복지사는 프린터기에서 빈종이를 꺼내고는 옆에 있던 펜을 잡아 들었다.
“자, 얘기를 시작해 보세요.”
프랑스에 들어오고나서부터 온갖 행정 기관에 전화해서 내 서류 업무를 처리해왔던 남편은 마치 대변인이라도 된 듯 그녀의 말에 입을 열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제가 당신에게 물었나요? 부인이 설명하도록 잠시 조용히 하시죠.”
워낙 언변이 강한 편에 속한 남편은 난데없는 복지사의 입막음에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그래도 어렵게 잡은 약속인지 망칠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평상시와는 달리 바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완벽하진 않지만 이제 제법 잘 구사하는 프랑스어로 우리의 입국부터 최근에 거절당한 비자 발급 과정까지 열심히 내 상황을 설명했다. 오늘 이 약속에 오기 전까지 사비로 출산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마음을 정리했던 나는 최근에 갔던 사 병원을 언급하며 거기서 마지막 진료를 한 상태라고 하고 말을 마쳤다. 내 말을 들으며 열심히 종이에 필기를 하던 그녀는 마지막 말을 들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봤다.
“이제 제가 좀 설명해도 될까요?”
국립 병원에 와서 도움을 받으려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는 이상 내가 한 마지막 말은 사족에 불과했다. 그렇게 따지면 돈이 있는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도움을 청하냐고 들릴 수 있는 내 마지막 말에 남편은 그게 아니라며 우리는 병원도 지정 산파도 없는 상태라고 상황 정리를 했다. 이럴 때 내 뒤처리를 해 주는 남편을 보면 나에게 짓궂게 굴곤 구는 남편의 평상시 모습을 잊게 했다. 나름의 까다로운 눈으로 내 케이스에 대한 판단을 마친 그녀는 그렇다면 잘 찾아왔다며 그럴 경우 국가 지원 보험 카드를 발급받아야 하며 그 담당자는 따로 있다고 당장 그리로 가서 카드 신청을 해보자고 앞장을 섰다. 업무는 깐깐하게 했지만 친절한 그녀를 따라 만난 또 다른 복지사는 내 케이스를 브리핑받은 후 내 여권을 가져갔다. 담당 업무인 만큼 무비자 입국 시 최대 90일 체류가 가능한 것을 너무 잘 아는 그녀는 내 입국 도장을 찾더니 날짜를 따지기 시작했다.
“국가 지원 보험은 체류일 90일이 지나야 요청할 수 있어요.”
그녀 앞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프랑스라는 나라의 복지법은 참 특이했다. 불법 체류가 돼야만 지원이 가능하다니, 여태껏 우리는 무슨 생각으로 열심히 법을 지키려고 이태리까지 갔다 온 거였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나 저러나 마침 그날이 딱 90일째 되는 날이었기에 우리는 국가 지원 보험 신청서를 넣을 수 있었다. 신청서를 담당 기관에 보냄과 동시에 복지사는 우리에게 해당 국립 병원에서 한 달간 무료로 모든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일종의 무료 패스를 발급했다. 만약 신청서가 무사히 통과될 경우 한 달 동안 하는 모든 진료와 출산 비용은 모두 무료로 처리될 수 있었다. 무료로 처리될 수 있다고 하니 급 병원의 위생 상태나 의료진의 상태에 대해서 의심이 가긴 했지만, 이렇게 처리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상황에 나는 잠시 지나친 걱정은 접기로 하고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왔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을 때 남편에게 살짝 내 우려를 표현했다. 남편은 본인도 어릴 때 엄마와 이런 병원을 다녔었다고 다들 다니는 병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가능한 산파와의 진료 일정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며칠 후 산파와의 약속 일정에 맞춰 남편과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 날은 미국 병원 기준으로 통보받았던 첫 예정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날 새로 만날 산파와 첫 진료를 했으니 첫 예정일은 이미 넘긴 샘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마음대로 남편과 진료실에 동행을 할 수 없었던 나는 간호사에게 내 프랑스어가 완벽하지 않아 남편과 동행해야 하는데 가능하냐고 양해를 구했다. 그녀는 산파에게 물어보라고 우선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내 진료를 할 산파가 나타났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그녀는 부슬부슬한 파마머리를 집게 핀으로 집어 올리고 의사 가운 주머니 한쪽에 손을 넣고 어디선가 쉬다가 복귀한 듯한 걸음걸이로 샌들을 반쯤 꾸겨 신고 나타났다. 잔디밭에 누워있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엉덩에 붙어 있는 마른 풀떼기가 눈에 띄었다. 저런 사람이 내 애를 받아준다고? 믿을만한 것일까. 나는 여전히 불심의 마음이 가득했다.
“마담 신?”
그녀는 대기 중인 나를 불렀다. 남편과 같이 진료실에 들어가도 되냐고 양해를 구한 나는 그녀의 허락을 받고 남편과 함께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368 컴퓨터를 연상케 하는 큰 컴퓨터 화면을 켜고 그녀는 열심히 서류함을 뒤적거렸다.
“첫 진료이니, 대답해야 할게 좀 많을 거예요. 좀 힘들어도 잘 답해 주어야 합니다.”
나이부터 시작해 최근 임신 상태까지 그녀는 꼼꼼히 질문지에 적힌 사항들을 물어봤다. 듣는 대로 바로바로 컴퓨터에 입력하던 그녀는 타자를 치는 게 그다지 빨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입력한 정보는 바로 전체 의료진과 공유될 사항이라며 그녀는 정확히 입력을 하느라 꼼꼼히 타자를 치고 있었다. 이번엔 무슨 질문에서 막혔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남편은 또 참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기 시작했다.
“무슈, 내가 당신에게 물어봤나요? 지금은 부인이 이야기해야 할 차례입니다. 내가 물어보면 대답하시죠.”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미국에서 했던 검사 결과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임신 초기에 다니던 대학 병원에서 거의 만불 어치의 검사를 다 받았던 나는 다행히 검사 결과를 어플에 받아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남편을 제제하는 그녀의 모습에 겁을 먹은 나는 내 휴대폰에 검사 결과가 있으니 잠시 봐도 되겠냐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그런 거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고 하면서 어서 결과를 찾아서 보여달라고 했다. 이래저래 깐깐했던 그녀는 열심히 내 검사 결과와 첫 초음파 사진을 쳐다보다니 결론을 내렸다.
“당신의 예정일은 9월 8일이 되겠군요. 그럼 9월 4일 날 모니터링을 하러 오세요.”
오늘 미국에서 받았던 첫 예정일을 넘겼으니 프랑스에 온 뒤로 다시 통보받았던 두 번째 예정일이었던 9월 4일에 출산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나는 그날 모니터링을 하러 오라는 그녀의 말에 또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내 진짜 예정일은 도대체 언제란 말인가. 어쩔 수 없이 이 산파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는 이제 같이 출산을 해야 할 산파와 익숙해 지기 위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그럼 당신과 제가 출산을 하는 건 거죠?”
당연한 질문일 수도 있는 이 질문에 산파는 이렇게 대답했다.
“9월 8일이면 전 아마 은퇴하고 없을 겁니다.”
이젠 해도 해도 너무 하다 싶었다.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나마 구한 산파와도 운이 없는 걸까. 이젠 될 대로 돼라 싶어서 그 날의 진료를 마치고 이제는 일주일도 더 남은 예정일을 배정받고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먹고 집으로 향했다.
9월 4일, 그녀의 말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내 발로 직접 모니터링을 받으러 가 초음파를 한 나는 9월 8일에 다시 모니터링을 오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
9월 8일 아침, 모니터링을 하러 병원으로 향했다. 가기 전에 오늘이 디데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병원에 입원할 만발의 준비를 해놓고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가방을 싣고 병원으로 오라고 말을 해놓고 나왔다. 병원에 도착한 나는 마치 평상시에 진료를 받을 때와 다름없이 대기실에 앉아 내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날따라 유난히 임산부가 많던 대기실에서 나는 평상시 보다 더 오래 내 순서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러다 양수라도 터지면 어떡하지 하고 온갖 걱정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예상대로 지난번 만났던 산파는 온데간데 찾아볼 수 없고 젊고 키 큰 산파가 나타났다.
“마담 신? 초음파 실로 가시죠.”
나는 유난히 키가 큰 그녀가 병동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전혀 처음 보는 듯했다. 머리가 항상 밑에 위치해 있고 임신 기간 동안 엄청난 운동량을 자랑했던 태아는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가 된 듯했다. 하지만 내 몸은 전혀 출산을 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산파들이 보통 손을 넣어서 확인하는 자궁 경부는 짧아지긴 항 상태였지만 뒤쪽으로 밀려서 전혀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예정일이 언제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예전 예정일 두 번이나 지났고 오늘이 마지막 예정일이라고 했다. 나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몰랐지만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오늘 반드시 유도 분만을 해야겠군요.”
드디어 순간이 왔구나. 나는 지금 당장 입원을 해야 하나 남편을 빨리 오라고 해야 하나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코로나 테스트만 지금 하고 오후 5시에 다시 짐을 싸서 제대로 입원하러 돌아오라고 했다. 난 이렇게 침착해도 되나 싶었다.
다시 집에 돌아가서 산후 조리원도 없고 한국에서 산 조리를 해주러 올 엄마 말고는 주변에 시댁 가족도 없는 나는 출산 후 몸상태가 어떨지 몰라 슈퍼에 가서 비상식량과 생필품을 사서 채웠다. 그리고 되려 남편은 피곤하다고 낮잠을 자는 동안 마지막으로 내가 먹고 싶은 점심까지 열심히 만들고 남편을 깨워 밥을 먹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시간이 좀 남은 나는, 이제 진짜 출산을 하는 거라고 들뜬 마음으로 남편을 바라봤다. 유도 분만에 대해 직장 동료들에게 물어본 남편은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 하룻밤 이상을 넘기게 되면 자기는 집에 와서 잠을 자겠다고 했다. 이 중요한 순간에 그런 생각밖에 안 나나 열이 났다. 아들을 처음으로 만날 수도 있는 중요한 순간을 이렇게 망칠 거냐고, 나는 그 순간에 당신이 필요한 건 생각도 안 하냐고 열불을 내다 화를 좀 식혔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남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정대로 5시에 병원에 도착한 우리는 차를 세울 곳을 찾았다. 남편은 어디 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다시 안심시켰다. 병원 가방을 챙겨 출산 병동으로 들어간 우리는 배정받은 침실로 들어갔다. 또 처음 보는 산파가 들어오더니 자기소개를 하며 유도 분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알약 하나로 시작해 진행경과를 보고 만약에 밤을 다 새도 진통이 시작되지 않으면 아침에 다음 알약을 또 먹는다고 설명했다. 만약 그래도 진통이 시작되지 않으면 마지막 방법으로 팔에 주사를 맞힐 것이며 그럴 경우 바로 진통이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남편의 걱정이 현실이 될 수도 있겠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를 동행하고 들어와 유도 분만 첫 알약을 주고 나갔다.
모니터링을 배에 차고 진통이 시작되는지 지켜보는 동안 6시가 지났다. 아마도 그때 야간팀이 투입되는가 보다. 새로운 산파가 또 등장했다. 이제는 누가 나와 출산을 할지 그다지 신경도 안 쓰였다. 그저 빨리 진통이 시작되길 바랄 뿐이었다. 새로운 산파는 코로나 때문에 고글을 쓰고 내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진통이 좀 시작됐는데 느낌이 있느냐고 물었다. 기계로 봤을 땐 아마도 진통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 느낌이 아직 없었다. 그래서 내 밥만 나올 걸 생각해서 남편은 잠시 밖에 나가 맥도널드 치킨너겟과 빅맥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병실에서 우리는 제정신으로 맥도널드를 저녁으로 먹었다. 분만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고 한 친한 언니의 말이 생각나 열심히 먹고 나는 다시 경부가 열리도록 열심히 병실을 걸으며 호흡을 해보았다. 진통이 어떤 건지 전혀 모르지만 무튼 느껴지는 건 없었다.
밥을 먹고 30분쯤 지났을까 통증이라고 할 만한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다시 침대에 누워서 모니터링 기를 찬 나는 산파를 불렀다. 그녀는 모니터를 살펴보고는 진통이 꽤 주기적 이어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사실 진통이 왜 있는 건지 경부는 어떻게 해야 열리는 건지 경부가 얼마나 열려야 분만에 들어갈 수 있는지 전혀 몰랐던 나는 고글 낀 산파에게 정확히 설명을 좀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녀는 옆에 있던 휴지에 펜으로 자궁을 그려가며 진통을 하면서 경부가 열리는 것이고 한 시간에 1센티미터 정도씩 열려서 약 9센티가 열리면 분만을 시도해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녀와 출산을 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진통을 느껴보려 노력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진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척추측만증이 있어서 허리 아래쪽이 원래 안 좋았던 나는 꼬리뼈 근처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 번 통증이 시작되자 진통이 오는 순간에는 꼬리뼈가 말 그대로 빠질 듯 아팠다. 몇 번 침대에서 몸을 비틀고 나니 진통이 주기적으로 오는 게 확실했다. 그렇게 계속된 진통은 엄청난 통증으로 발전했고 남편의 손을 꼬집어가며 통증을 참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아픔이 계속됐다. 첫 산파와의 진료 당시 무통 주사를 맞겠다고 했던 나는 원하면 언제는 무통 주사를 맞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고글 낀 산파는 무통 주사를 맞겠냐고 물었다. 나름 100프로 자연 분만을 할 수 있으면 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나는 가능하면 좀 참아보겠다고 오기를 부렸다. 그녀는 통증을 참는 내 옆에서 내 상태를 같이 지켜봐 주었다. 남편의 손을 꼬집을 때가 되면 그녀는 호흡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깊은숨을 쉬어보라고 했다.
“안 되겠어요. 무통 조사 맞을게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철저히 내가 선택을 할 때까지 내 의견을 존중해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만나본적도 없는 산파였지만, 믿을 만한 사람과 분만에 들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무통 주사를 주입하는 순간부터는 분만실에 들어가야 하니 짐을 다 챙기라고 남편에게 귀띔했다. 진통만 피하면 아직 걸을 수 있었던 나는 마지막 진통이 멈추자마자 마지막으로 화장실엘 갔다. 아직까지 사복을 입고 있던 나는 화장실에 나와서 바로 사복을 벗고 수술 가운을 입고 수술실로 향했다. 진통이 다시 올 기미가 보였다. 통증이 왔을 때 온갖 몸부림을 다 부리는 걸 본 산파는 나에게 무통주사를 맞을 때는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다. 몇십 년을 살지 모르는 인생의 단 5분만 참으면 무통으로 분만을 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나는 통증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당연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는 곧 다음 통증이 찾아오자 아무리 참으려 소리를 지르며 아기처럼 울 수밖에 없었다. 분만실로 마취 전문의가 들어왔다.
“마담, 소리 지르시면 안 됩니다. 그래 봤자 아무런 소용없어요.”
마취 전문의는 들어오자마자 소리 지는 나를 발견하고 바로 아기 다루듯 말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5분만 있다가 주사 놓으면 안 되나요. 으앙~”
족히 10센티미터는 되는 주삿바늘을 척추에 넣어야 하는 무통주사를 혹시라도 맞다 빗나가기라도 하면 큰일 난다고 생각한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통 주사를 맞는 동안은 들어올 수 없었던 남편 대신 수술대에 수직으로 앉은 내 두 손을 고글 산파가 꽉 잡아주었다.
“내가 여기 있으니까 괜찮아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저와 같이 호흡을 해봐요.”
나는 그녀가 하라는 대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크게 내쉬었다. 다음 진통이 오는 게 느껴지자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숨을 더 크게 들이쉬었다. 진통이 너무 아파서 주삿바늘은 느끼지도 못하고 어느새 무통주사 주입이 끝났다. 모두들 분주하게 나를 수술대에 눞일 준비를 했다. 천천히 무뎌지는 진통을 느끼며 나는 수술대에 편히 누웠다. 간호사는 언제든 통증이 느껴지면 무통주사를 더 주입해 준다고 했다. 수술대에서 벽에 붙어 있는 시계가 보였다. 새벽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무통 주사가 주입될 때마다 차가운 액체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점점 진통이 올 때마다 통증이 없어졌다. 분만을 위해 잠을 좀 청해야겠다 싶었다. 주사 주입이 다 끝나고 내 옆에 와서 의자에 앉은 남편에게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 정신이 좀 차려지자 다시 소셜 미디어를 열었다. 거의 생중계로 수술실 사진을 찍어 스토리에 올렸다. 엄마한테도 카톡으로 상황을 생중계했다. 몸이 좀 편해지고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옆을 돌아보니 남편은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눈을 떠보니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고글 산파는 중간중간 수술실에 들어와서 내 상태를 확인했다. 경부가 좀 열렸나 확인한 그녀는 그 새 양수가 터졌다고 알려줬다. 그리고 경부도 잘 열리고 있다고 알려줬다. 통증이 조금씩 더 느껴지기 시작해 무통주사를 더 맞혀달라고 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곧 있으면 뱃속의 아기도 세상 밖으로 나올 테니 아기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새벽 4시 반. 고글 산파가 들어왔다.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했더니 산파는 자기가 알아서 해 줄 테니 주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난 아까처럼 걸어갔다 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미 무통 주사를 주입받고 있어서 수술대를 뜰 수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받은 요강을 가지고 와 얇은 호스로 직접 오줌을 빼 주었다. 내가 봐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녀는 오줌을 받은 후 경부를 확인하고는 이제 8센티나 열렸다고 했다. 1센티만 더 열리면 분만을 시도해 볼 수 있다고 했다.
“제가 7시에 퇴근이니까 그전에 애기 받고 가야죠.”
고글 산파는 얼마 남지 않은 근무 시간 내에 아기를 받아주고 싶다고 했다. 뭔가 우리의 대화 내용이 웃겼다. 그녀는 다리를 올릴 분만대를 가지고 와 내 다리 밑에 설치하고 내 다리를 올렸다. 휴대폰을 계속 가지고 있던 나는 그녀가 올려놓은 다리를 사진으로 남겼다. 그녀는 휴대폰을 전혀 제제하지 않았다. 정자세로 누워있던 나를 옆으로 돌려 경부가 더 잘 열릴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우리는 1센티만 더 열리길 기다렸다.
20분이 지나고, 경부가 9센티 열렸단다.
“이제 한 번 밀어볼래요?”
어떻게 하는 게 미는 건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지만 알겠다고 했다. 그녀는 분만을 하는 동안에도 아프면 무통주사를 주입해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느낌 없는 분만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태껏 아무것도 모르고 의자에서 자고 있던 남편을 깨웠다. 자기, 우리 아기 만나야지. 그때서야 비몽사몽 일어난 남편은 무슨 일이 있나 구경하러 오는 사람처럼 어그적 어그적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분만을 도와줄 또 다른 산파가 들어왔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분만에 들어갔다.
처음에 산파가 알려준 데로 숨을 깊게 들 어쉬 었다 내 쉴 때 열심히 밀어봤다. 전혀 느낌이 없던 나는 제대로 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때 분만을 도와주던 다른 산파가 말했다.
“당신 정말 잘 미는데요? 그렇게만 계속해봐요!”
어떻게 한건진 모르겠지만 칭찬에 신이 난 나는 열심히 밀었다. 아기가 나오고 있는 건지 난 전혀 느낄 바가 없었다. 구경하고 있는 남편만 아랫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마도 아기 머리가 나오고는 있었나 보다. 그때 고글 산파가 말했다.
“애기가 머리가 별로 없네요! 한번 만져 볼래요?”
하고는 내 손을 가져다 아기 머리에 갖다 대었다. 부들부들한 살덩이가 만져졌다. 너무 이상한 느낌이었다. 머리가 거의 다 나온 아기는 계속 밀어 대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고글 산파는,
“딱 1센티만 자르면 바로 나올 거 같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이미 무통 주사의 다리를 넘은 나, 분만을 위해 필요한 조언은 다 듣기로 했다. 게다가 나 편하자고 혹시라도 아기에게 트라우마가 생기거나 다른 신체적 이상이 생기게 할 순 없었다. 그래서 바로 알겠다고 했다. 어차피 무통 때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마당이었다. 1센티를 자르고 바로 머리가 나왔다. 이젠 열심히 밀어내기만 하면 됐다. 본격적인 밀기가 시작됐다. 진통에 맞춰 두 산파와 함께 나는 열심히 밀었다. 남편은 거의 다 나왔으니 조금만 더 밀면 된다고 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밀었다.
6시 40분쯤 됐을까. 열심히 밀고 다음 진통을 기다리려고 잠시 머리를 수술대에 내려놓는 순간 갑자기 왼쪽 가슴팍에 무언가가 팍 얹어졌다. 그 사이 아기가 나오서 고글 산파가 바로 아기를 내 위에 얹혀버린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순간 오른쪽에 있던 남편을 쳐다봤다. 우리 울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너무 통증 없이 분만을 해서 그런지 밖으로 아기가 다 나왔을 때 큰 감동은 없었다. 그 말을 예전에 무통 주사 관련 유튜브 비디오를 보면서 들은 게 생각이 낫다. 아 이런 뜻이었구나. 갑자기 내 위에 올려진 아기는 마치 뱃속에서 오래 기다렸다는 듯 억울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이는 이미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고글 산파가 열심히 아기집을 꺼내고 있는 동안 나는 열심히 아기를 쳐다봤다. 내 몸속에서 이런 생명체가 다 커서 내 눈앞에 나왔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게다가 지금 나왔다고 하기에는 아기 얼굴이 너무 성숙해 있었다. 우리 아기, 이렇게 세상에 나왔는데 엄마가 잘 지켜줄게.
“아기에게 모유 수유 바로 할래요?”
이렇게 바로 수유를 할 수 있는지 몰랐던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산파는 어떻게 젖을 물리는지 알려주었다. 아기는 뱃속에서 젖 무는 방법을 공부라도 하고 나온 것처럼 산파가 자세를 잡아주니 바로 내 젖꼭지를 쪽 빨았다. 모유 수유를 시작할 때 산모는 콜로 스트롬이라고 하는 진한 초유만 나오는데, 양이 많지 않은 만큼 아이가 잘 빨지 않으면 별게 나오지 않는다. 우리 아기는 배가 많이 고팠는지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세게 빨았다. 자식, 굶어 죽지는 않겠구먼.
거의 정신이 멀쩡한 상태로 분만을 하고, 챙겨 온 폴라오이드로 사진도 찍고, 제제도 안 하는 휴대폰으로 현장 사진을 이것저것 남긴 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퇴근 준비를 하는 고글 산파는 열심히 수술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마리 옹이에요.”
“아, 그 배우처럼요!”
나는 남편에게 마리옹과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순간 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나만큼이나 피곤에 지친 얼굴이었지만 웃으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직업에 충실할 뿐이었지만 나에겐 평생 잊지 못할 산파였다.
긴장 가득했던 수술실의 문이 어느덧 활짝 열리고 무통 주사를 뺄 때까지 수술대에 누워있어야 하는 나와 아기는 각자의 침대에 누워 평온한 아침을 맞이했다. 다들 수술실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아기는 모든 게 신기한지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내 뱃속에서 나온 내 아기가 아직도 신기하기만 했다.
곧 의료진의 도움을 받고 나와 아기는 입원실로 옮겨졌다. 이제부터 나는 아기와 한 세트였다. 내가 가는 곳엔 아기도 같이 따라갔다. 나도 이제 엄마가 된 것이다.
약 3박 4일을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조금씩 몸도 회복하고 아기에게 모유 수유를 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병원에 있는 동안 수많은 산파가 돌아가며 병실에 들어와 아기에 필요한 것과 산모에게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고 가르쳐 주었다. 아기침대를 밀고 가 다른 아기 엄마들과 함께 아기를 목욕시키는 것도 병원에서 배웠다. 아기를 낳고 기르는데 필요한 모든 걸 3박 4일 동안 다 배워서 나온 것 같다. 산후 조리원이 있는 한국에 비해 바로 퇴원을 해 밖을 걸어 다니는 서양 여자들이 신기하게만 보였던 프랑스에서의 산후는 산모가 독립적으로 아기를 키울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알려주는 데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나도 무섭기만 했던 분만을 손쉽게 해내고 산후 3박 4일이 지나고 나니 이제 밖으로 나가도 아기를 잘 돌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노산이라고 걱정했던 미국에서의 산부인과 의사를 생각하면 나의 첫 아이 출산은 생각보다 원활하게 진행된 게 참 다행이다. 물론 집에 돌아온 뒤 찢었다 꿰맨 아랫동네가 너무 따갑고 아파 거의 한 달은 밤마다 죽도록 고생했지만, 그 이외에는 통증도 늘어진 살도 그다지 없는 편에 속했다. 물론 출산이 모두에게 쉽고 아름다운 경험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지만, 내 경험으로만 비춰보자면 순조롭게 넘어간 게 더 많은 내 임신, 출산, 그리고 산후조리가 신기하기만 하다. 주변에서 힘들게 임신에 성공해 힘들게 출산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던 걸 생각하면 노산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분 좋은 첫 아이 출산 경험을 한 것에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바로 둘째를 계획할 건 아니지만.
출산 당시 아기를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더라도 매일매일 조금씩 커가는 자그마한 아기를 보고 있자면 감동이 밀려온다. 조금씩 엄마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를 보고 웃을 줄 아는 아기를 보고 있노라면 출산의 기쁨이란 꼭 그 당시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탈도 많았던 이번 첫 아이 출산은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 속에 기리기리 남을 것이다.
*더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the_young_hei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