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onyverse Oct 30. 2020

이태리 베이비문

명색은 비자 여행, 본색은 베이비문

발생지인 중국에서 급속도로 번졌던 유럽을 거쳐 마지막으로 도착한 미국은 단숨에 코로나 확진자가 가장 많은 국가 돼버렸다. 그로 인해 한순간에 직장을 잃고 임신까지 한 몸이었던 나는 남편이 본국인 프랑스에 취업 기회를 찾았다고 하자 큰 고민 없이 바로 떠나자고 했다. 그래서 약 한 달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비자 발급을 중단해 버린 프랑스로 나는 또다시 무비자 입국을 하게 되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 같지 않은가?

입국 심사에 겁을 먹고 이런저런 증명서를 때까지고 입국장에 도착한 우리는 세관의 큰 제재 없이 파리 국제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한국 같으면 공항에서부터 체온 점검 및 코로나 검사까지 한 다음 자차가 없는 경우 셔틀까지 태워서 반드시 자택으로 바로 골인하게 만들고 자가 격리를 시키는 판국이었다. 국제공항에서조차 아무런 제재가 없는 걸 보면 왜 프랑스의 바이러스 확진율이 급속도로 올라갔는지 짐 착할 수 있었다. 파리 공항에서 기차역으로 바로 향해 미리 예매한 티켓을 출력해 기차에 올라탄 우리는 시댁이 새로 이사 간 지방으로 향했다. 결혼 당시 파리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에 살고 있던 시부모님은 최근 시어머니가 은퇴를 하시며 남부에 더 가까운 지방으로 이사를 가셨다. 정확히 말하면 땅 먼저 사고 작년 말 땅 파기부터 시작해 한창 집을 짓고 계시는 시부모님이 이사 간 지방의 이름은 영문표기로 읽었을 때 콘돔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입에 올리기 껄끄러운 콘돔 지방은 프랑스 내 농업지가 가장 많은 지방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논밭이 많은 평지형이었다. 수십 년간 이 지역에서 자신들의 땅을 가지고 낙농업, 가축업, 농업 등 안 해 본 게 없던 지역 주민이자 땅 지주 미셸은 농사짓고 남는 벼로 친환경적인 집을 짓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시부모님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어 바로 본인들의 토지 일부를 매매했다. 그렇게 단숨에 새로운 지방에 땅을 산 시부모님은 같은 땅주인인 미셸이 운영하는 캠핑장에서 생활을 하며 캠핑장 바로 옆에 위치한 새로 산 땅에 집을 짓고 계셨다. 그 덕에 또다시 국제 미아로 프랑스에 도착한 우리는 시부모님과 같은 캠핑장에서 숙소 한 채를 배정받고 당분간 함께 지내기로 했다. 코로나가 없었더라면 가족 단위로 캠핑을 온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을 올해는 아무도 없었던 덕에 우리도 여름 내내 캠핑장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임신 6개월 차에 들어선 나는 제법 몸이 무거워지고 있어서 모든지 직접 해야 하는 캠핑장의 환경이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때가 때인 만큼 인적이 거의 없는 시골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하는 태교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모든 상황은 생각하기 나름 아니던가.

그 와중에 우리는 남편의 직장이 위치한 마르세이유에 미리 와 아파트도 보러 다니고 북쪽에 위치한 남편 동생집에도 놀러 가는 등 꽤 열심히 프랑스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 아마 미국에 있었다면 좁은 아파트에 둘이 옹기종기 붙어서 열심히 밥이나 해 먹고 집 앞에 산책 정도 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을 그래도 시부모님 차라도 몰고 돌아다닐 수 있는 유럽에 건너오고 나니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물론 유럽 내 코로나는 계속해서 퍼지고 있었고 자가 격리 조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특히 임산부인 나는 가능한 장거리 이동은 피하고 조심히 지내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유럽에 오고 나니 코로나가 없느냐 무시하고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는 유럽인들처럼 나도 열심히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되려 자가격리 조치가 내려지면 사람들은 존재의 이유가 침범당한다며 시위하기 바쁜 곳이 유럽이었다.

처음에는 미국에 남아있는 친척과 친구들을 의식해 소셜 미디어 포스팅도 조심스럽게 하던 나는 결국 활발히 움직이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열심히 찍어 올렸다. 임신한 배가 조금씩 더 튀어나올 때마다 증거샷을 올리고 싶은 이 엄마의 마음을 무시할 순 없었다.

결국 5월 중순에 프랑스에 들어온 뒤로 우리는 시댁이 있는 콘돔에서부터 새로운 보금자리 마르세이유, 남편 동생이 있는 스트라스부르, 남편 사업 파트너가 있는 쥐라, 남편 새로운 직장 트레이닝이 있던 꾸뀌뇽까지 프랑스 전역을 비집고 다녔다. 스트라스부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구 밀집도가 거의 없는 시골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들이었기 때문에 큰 걱정 없이 차를 타고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소셜미디어를 본 한국의 부모님이나 다른 나라의 친구들은 임신까지 한 몸을 이끌고 너무 많이 돌아다니는 게 아니냐 걱정을 했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면 큰 이동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 돌아다니는 것을 크게 되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 다른 지방에 여행을 할 일이 생기면 오히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다닌 것도 있었다.

드디어 7월 초 우리는 공기 좋은 시댁을 떠나 마르세이유에 우리 아파트를 계약하고 임시 둥지를 텄다. 또 어찌 될지 모르는 신세라 이미 가구가 완비되어 있는 자그마한 아파트를 렌트했다. 하지만 곧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면 준비할 게 많았다. 아기 침대, 기저귀 갈이대, 아기 옷 등 잘 알지 못하던 육아를 위해 열심히 유튜브를 보며 몸과 마음의 준비를 했다. 반면 더 중요한 출산 준비는 되려 퇴보 중이었다. 검사 비용이 비싸긴 했지만 임신 기간 동안부터 출산까지 담당 의사가 정해져 있던 미국에 비해 프랑스에선 출산할 병원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보통 임신을 하자마자 병원을 정해 최소 출산 6개월 전엔 병원을 정하는 프랑스에 임신 6개월 차에 도착한 나는 무작정 원하는 병원에 전화해 출산을 예약할 순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인이나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발급되는 소셜 시큐리티 번호가 있는 사람들에게 거의 무료인 병원비가 아무런 비자도 없이 입국한 나에게는 전혀 무료가 아니었다. 미국에 비하면 자기 부담금이 훨씬 낫긴 했지만 출산을 하려면 적어도 만 유료 이상은 드는 게 현실이었다. 무비자로 입국했지만 프랑스인 남편이 있는 조건으로 뭐라도 될 줄 알았던 우리는 입국하자마자 이래저래 내 상황을 설명하고 소셜 시큐리티 번호를 발급받으려 노력해 봤으나 코로나 때문에 프랑스 행정업무는 무한 연기 상태였다. 게다가 한국 행정 기관만큼 연락도 잘 안되고 된다고 해도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던 프랑스 공무원들은 자국민인 남편이 봐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코로나라 해도 예외는 없을 것이라 결론을 내린 나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내 비자를 어디선가 발급받아 다시 제대로 서류를 신청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남편에게 설명했다.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마르세이유는 양옆으로 위치한 스페인과 이태리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프랑스 내에서도 일곱여덟 시간씩 하고 다니던 장거리 여행보다 더 짧은 거리에 다른 나라 국경이 위치하고 있었다. 마침 새 직장 시작까지 시간 여유도 있었던 남편은 본인도 참석하고 싶었던 트레이닝이 열리는 로마가 있는 이태리로 자동차 여행을 가는 것에 겸사겸사 가는 것에 동의했다. 남편은 이태리로 날 혼자 보낸 이후로 같이 여행 가는 게 항상 꿈이기도 했다. 앞으로 아기가 태어나면 이제 우리 둘만의 여행은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앞뒤 다 따지지 않고 우리만을 위한 베이비문으로 즐기기로 했다. 오케이, 가즈아!

내가 이렇게 말하면 엄청 대책 없는 새댁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보통 우리는 여행을 가면 돈은 남편이 내고 계획은 내가 세운다. 이왕 할 여행 제대로 하자 주위인 남편은 그동안 열심히 모은 돈을 통 크게 쓰는 걸 좋아하고, 나는 그에 걸맞은 가슴 벅차고 스토리 있는 여행지를 찾아 예약하길 좋아하기 때문에 나름 딱 맞는 콤비다. 대신 이번 여행은 월세를 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마르세이유 아파트를 에어비앤비까지 내놓을 수 있어서 우리 여행의 숙박비용은 거의 충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겸사겸사 맘 편한 여행이었다. 그렇게 계획한 이번 여행의 동선은 로마, 페스카라, 나폴리, 포지타노, 로마였다. 처음에 로마에 가는 이유는 남편의 트레이닝 때문이었고 마지막에 로마로 돌아오는 이유는 내 비자 인터뷰 날짜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 하는 여행은 맘 편히 비자 인터뷰 날까지 남은 날짜를 활용하는 명색 있는 여행이었다. 베이비문은 내가 갖다 부친 테마였다. 그렇게 기분 좋은 우리 둘만의 마지막 로드트립이 시작되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마지막으로 이렇게 길게 갔던 여행은 우리의 1년 늦은 허니문이었다. 롱디를 하면서 올렸던 결혼식은 우리에게 허니문을 허락하지 않았고 어차피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던 우리는 나중에 여건이 맞을 때 허니문을 가기로 했었다. 그렇게 미국으로 이동하고 나서도 1년이 지나야 겨우 장기간 휴가를 낼 수 있었던 우리는 작년 여름에 미국 서부로 날아가 샌프란시스코, 엘에이, 하와이를 다녀왔었다. 그때만 해도 미국에 계속 있을 줄 알았던 나는 신혼여행으로 유럽을 갈까 하고 엄청 망설였었다. 하지만 미국 서부를 한 번도 여행한 적이 없었던 남편을 생각해 서부를 돌고 하와이에서 신혼여행을 마무리 짓기로 했었다. 그렇게 떠난 약 2주간의 신혼여행은 결혼식 이후 1년 후에 떠났지만 우리에겐 항상 너무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물론 신혼부부가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친인척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허니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겠지만 서도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이전 챕터에 썼듯, 나에게 있어서 우리의 진정한 허니문 같았던 여행은 우리 둘이 처음 했던 발리 여행이었다.

이번에도 상황에 맞춰 계획하게 된 베이비문이었지만, 명색이 뭐든 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남편과의 여행에 들뜬 나는 거의 2주 동안 매일 다른 옷을 입을 수 있게 열심히 사전 쇼핑도 했다.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사진을 찍는 게 굉장히 중요한 나로서는 현지 쇼핑도 좋아하긴 했지만 여행에 대비해 미리 의상을 준비하는걸 더 선호했다. 게다가 임신 8개월 차에 몸에 맞는 예쁜 옷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임산복을 사기를 거부했던 나는 SPA 브랜드에 가서 배에 무리 없이 입을 수 있는 예쁜 드레스들을 대거 구매했다. 너무 내 옷만 사나 싶어서 세트로 입을 수 있는 남편 셔츠도 몇 개 골랐다. 평상시 자주 쇼핑을 하진 않지만 옷을 잘 입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도 내가 본인 스타일에 맞는 옷을 사다 주면 좋아하곤 했다.

여행가방으로 트렁크를 꽉꽉 채운 우리는 약 2주간의 이태리 여행을 위해 길을 떠났다. 운전면허는 있지만 운전을 잘 못하는 나는 운전을 나보다 훨씬 잘 하지만 길을 잘 못 찾는 남편의 코 파일럿이 되는 게 나았다. 그래서 남편은 운전대를 잡고 나는 구글맵을 켜고 휴대폰을 잡았다. 프랑스 남부 해안선을 따라 이태리로 향하다 보면 프랑스 리비에라의 대표 도시들을 다 지나가게 된다. 니스, 생트로페, 깐느, 몬테 카를로, 모나코 등 듣기만 해도 설레는 프랑스 남부 해안선을 따라 나 있는 고속도로를 타고 우리는 두 시간 만에 이태리 국경을 들어섰다. 햇빛이 쨍쨍 비치는 날씨에 파란 지중해 해안선이 내다 보이는 차 안에서 아찔한 절벽 위에 있는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고 있자니 므흣한 감정이 교차했다.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 혼자 여행을 할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을 지나 옆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남편과 뱃속에 있는 우리 아기와 함께 다시 이태리로 향하고 있다니. 뭔가 상상하지 못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끔은 꿈보다 현실이 더 좋을 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룻밤을 머문 플로렌스를 지나 다음날 로마에 도착한 우리는 로마 시대부터 지금까지 유지돼 온 돌길을 지나 덜덜 차를 몰고 에어비앤비 근처 광장에 도착했다. 가끔 구글맵에 표시된 길이 헷갈려 진입 금지 도로에 들어가곤 했던 우리는 어느새 총대를 매고 있는 군인이 있는 큰 보행자로에 들어서고 있었다. 군인들은 이 시간대에는 진입금지라고 말하며 반대쪽으로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다. 다시 차를 덜덜 몰고 돌길을 나가 인근 광장에 차를 세운 뒤 어쩔 수 없이 짐을 들고 에어비앤비로 걸어갔다. 순전히 미를 기준으로 에어비앤비를 고른 로마 에어비앤비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스패니쉬 스텝 바로 옆에 위치한 명품 거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깨끗하고 운치 있는 럭셔리 쇼핑가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너무 좋았다. 오예!

짐을 풀고 장기간 운전을 해 피로했던 남편은 낮잠을 한 잠자고 나니 슬슬 시장해 오기 시작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첫 의상을 입고 남편을 끌고 밖으로 향했다. 8월 중순의 로마는 이태리 중심부에 있어서 그런지 햇빛이 더욱 뜨거웠다. 로마 시대의 돌길뿐만 아니라 돌기만 하면 유적지가 남아있는 이 낭만의 도시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코로나 때문인지 인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어렸을 때 영국에 살 당시 엄마와 동생과 함께 갔던 로마 여행을 생각하면 어딜 가나 유적지가 많은 이 도시는 항상 사람들로 꽉꽉 차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하는 걸 아주 조금 망설였다면 오히려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거의 없어서 맘 편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게다가 어딜 가나 줄을 서야 했을 유적지에 거의 사람이 없어 금방 들어갈 수 있었다. 줄이 좀 있는 경우에는 친절한 이태리 경찰들이 내 툭 튀어나온 배를 보고 줄을 가로질러 먼저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콜로세움이나 바티칸 시티처럼 항상 관광객이 넘처나는 유적지들을 편히 들어가 맘 편히 구경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도시에서 편안히 안구정화를 충분히 한 우리는 행선지인 페스카라로 향했다.

작은 어부 동네였던 페스카라는 큰 구경거리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맛집이 없었던 로마에 비하면 훨씬 신선하고 맛 좋은 해산물을 매일 저녁 싼 가격에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들어가는 레스토랑마다 실망을 했던 우리는 로마에서 버린 입맛을 페스카라에 가서 되찾았다. 그다음 페스카라 반대쪽 해안선에 있는 나폴리로 향한 우리는 말로만 듣던 이태리 최고의 피자를 맛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길을 떠났다. 저녁 무렵에 도착한 나폴리는 13세기경 최대의 도시로 거듭난 이후로 한 번도 도시 재건을 안 한 듯 허름한 자태로 우리를 맞이했다. 가난한 어부 동네 같았던 해안선을 따라 험악한 이태리 운전자들과 씨름을 하며 차를 몬 남편은 동네를 열 바퀴는 돈 후에야 에어비앤비에 딸려 있는 주차장을 찾았다. 지하에 있던 주차장으로 차체가 넓고 긴 시어머니 차를 몰고 내려간 우리는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이태리 젊은이를 보고 차를 세웠다. 차쟁이처럼 생긴 이태리 젊은이는 얼마 동안 주차를 할 예정이냐고 물었다. 도시의 오래된 길을 보고 더 이상 운전할 맛이 안 났던 남편은 일정 내내 차를 박아 놓고 걸어 다니자고 했다. 그래서 이틀간 주차를 하겠다고 말하니 젊은이는 우리에게 좀 더 안쪽으로 차를 몰고 들어오라고 주문했다. 지하 주차장은 기둥 사이사이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차들이 어떻게 차를 돌렸는지 상상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좁았다. 아마도 이 안에서 일을 하는 저 차쟁이 젊은이는 주차에 도사가 됐을 것 같았다. 대충 차를 돌리고 내리니 역시 차쟁이는 익숙한 솜씨로 재빨리 차를 돌려 구석에 다른 차들 뒤로 삼중 주차를 했다. 테트리스처럼 세워져 있는 차들은 아마도 저 젊은이가 다 빼고 다시 세우고 하나보다. 이미 나폴리에 지친 우리는 필요한 짐만 꺼내서 주차장을 나왔다.

누가 나폴리에 최고의 피자가 있다고 했는가. 물론 우리가 최고의 피자집을 못 찾았을 수도 있지만, 웬만한 데 가도 다 최고일 거라고 생각했던 나폴리에는 인생을 바꿔 놀 그런 피자집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해안가라 그런지 온갖 종류의 초밥집을 엄청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로마에서 아시아식 식당에 여러 번 속아본 우리는 굳이 여기까지 와서 초밥집에 돈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끼니를 대충 때우고 시간을 보낸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포지타노에 가서 더 맛있는 걸 먹기로 하고 나폴리에 있기로 한 삼일째 아침 일찍 아말피 코스트에 있는 포지타노로 향했다.

사실 나는 여행지를 고를 때 소셜 미디어를 많이 참고하는 편이다. 이렇게 말하면 트렌디하고 고상해 보이지만 풀어서 말하자면 인스타그램에서 본 엄청 예쁜 사진을 보고 나도 저기 가서 찍어야지 하고 찾아가는 여행지가 대부분이다. 그중 항상 보는 순간 숨을 멎게 했던 여행지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태리 아말피 코스트에 위치한 관광 도시 포지타노였다. 이름만으로 어딘지 상상이 안 간다면 계단식 언덕에 수많은 집들을 배경으로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는 그 해안가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아말피 코스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동네가 포지타노라는 걸 잘 알지만, 숙소를 찾을 때만 해도 어디가 어딘지 나도 잘 몰랐다. 지리를 좀 파악한 다음에는 예산안에서 가장 멋있는 숙소를 찾느라 포지타노 말고 주변에 있는 다른 동네들도 들여다봤으나 처음 가는 거 가장 대표적인 곳으로 가자 싶어서 결국 포지타노에서 맘에 드는 좀 비싼 숙소를 잡았다. 하긴 로마부터 나폴리까지 에어비앤비에서 싼값에 있었으니, 우리 베이비 문의 하이라이트가 될 수 있는 포지타노에서 확실한 숙소를 잡고 좀 즐기는 것도 정신건강에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폴리에서 소렌토를 지나 채 2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서부터 시작되는 아말피 코스트. 조그만 국도를 지나 절벽 사이로 길이 난 해안가 도로에 들어서니 갑자기 눈앞에 탁 트인 바다가 보였다. 드디어 왔구나. 한국의 설악산을 연상케 하는 높은 암벽 옆으로 좁은 길을 운전해야 하는 남편도 계속 바닷가 쪽을 쳐다봤다. 아무리 운전에 집중한데도 안 쳐다볼 수 없는 경치였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차를 세울 수 있는 곳이 나타나자마자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신선놀음을 하는 것 같아 보이는 높은 암벽들 사이로 푸른 바닷가가 펼쳐져 있었다. 비가 오기로 예보되어있었지만 아직 햇빛이 쨍쨍한 하늘에 몇 점 떠 있는 구름이 오히려 멋있어 보였다. 암벽을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저 멀리 두 암벽 사이에 집들이 계단식으로 지어져 있는 게 틈틈이 보였다.

“우리가 갈려는 데가 저기야!”

보통 내가 무슨 계획을 짜 놨는지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알게 되는 남편에게 이제야 포지타노가 어딘지 알려줬다.

“거봐, 내가 거기 가자고 했지!?”

남편도 맘에 든단다. 가끔 너무 내 마음대로 행선지를 정해서 남편도 마음에 들까 걱정이 들 때도 있었지만, 이미 중간 이상은 갈 거라고 생각한 곳들은 남편의 상상을 깰 정도로 멋있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본인은 생각도 못한 곳에 내가 데리고 갔는데 자기도 너무 마음에 들면 꼭 저렇게 농담을 하곤 했다.

한 10분만 더 차를 몰고 가다 보니 암벽 사이의 길들이 포지타노 초입으로 들어섰다. 멀리서 보면 멋있지만 운전하기엔 최악인 조그마한 일방통행 언덕길이 시작되었다. 차가 몇 대만 모여도 어쩔 수 없이 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외길을 따라가다 이번에도 숙소에서 알려준 동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숙소로 걸어 올라가 야했다. 숙소에서 받은 이메일에 의하면 주차장으로 짐꾼이 도와주러 올꺼란다. 어디가 어딘지 몰라 외길을 따라가던 우리는 주차장을 살짝 지나고 나서야 너무 많이 갔다는 걸 깨달았다. 도저히 차를 돌릴 수 없게 생긴 길이라 어쩔 수 없이 남편보고 차를 대고 기다리라고 하고, 주차장으로 가 우리가 가는 숙소를 말했다. 슈퍼마리오 같은 아저씨가 우리 차를 직접 몰고 주차를 도와주겠다며 나와 함께 차로 걸어가 주었다. 그리고 숙소에서 짐꾼이 올 거라고 옆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다행히 미리 필요한 것만 빼서 챙겨 왔던 짐을 꺼내고 기다리라는 데에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 갑자기 가죽 쪼리를 신은 금발의 호리호리한 젊은 남자가 흐느적거리며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빌라 인피 트리 떼?”

저 사람이 우리 짐꾼이라고? 리넨으로 된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던 그는 포지타노에 놀러 와 있는 관광객 중 한 명 같아 보였다. 되려 무거운 우리 짐을 주기 좀 미안할 정도로 전혀 짐꾼처럼 생기지 않았던 그는 임신한 내 짐을 들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우리가 방금 차를 세운 주차장에서부터 짐을 들고 올라가야 하는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그저 그다음부터는 차가 갈 수 없는 길이어서 그럴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10분이 좀 덜 걸리는 길이지만 갈수록 가팔라지는 언덕길은 한 번 계단을 오를 때마다 숨을 골라야 다음 계단을 갈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임신 막달에 다 달았던 나는 조금만 계단을 오르다가도 숨이 가빠왔다. 이렇게 힘들게 올라가는데 안 예쁘기만 해 봐라. 그렇게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거의 구름 위에 있는 듯한 평지가 보였다. 우리 빌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눈앞으로 아까 차에서 내려서 구경하던 계단식 언덕을 끝으로 바다가 펼쳐졌다. 휴우, 숙소는 잘 골른 것 같군.

마치 리플리에 나오는 주드 로처럼 옷을 입고 있던 짐꾼은 애플 컴퓨터 한 대가 올려져 있는 자그만 책상이 있는 리셉션 앞에 짐을 내려놓고 방이 몇 개 안 되는 빌라 시설을 보여줬다. 빌라에는 우리 밖에 없었다. 왠지 해수욕장에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수영장이 있는 숙소를 골라야겠다 했던 나는 부킹 사이트에서 분명히 수영장을 본 것 같았다. 그는 리셉션 건너편에 카드키로만 입장이 가능한 문을 열었다. 가짜 담쟁이넝쿨이 빼곡히 감겨있던 문 뒤로 진짜 넝쿨이 가득한 하늘 정원이 펼쳐졌다. 작고 아담했지만 아까 입구에서 보이던 경치가 보이는 테라스였다. 아마 손님이 많을 땐 케이터링 서비스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테라스 코너에 자그마한 자쿠지가 보였다. 힘들게 계단을 올라오고 나서 뭉친 근육을 풀기에 딱 적당해 보였다. 작지만 모든 게 완벽했던 하늘 공원을 나와 우리 방으로 향했다. 시실리안 스타일의 타일이 포인트였던 우리 방은 바다가 탁 트여 보이는 발코니가 바로 앞에 있는 자그마한 침실이었다. 엄청 큰 방은 아니었지만 포지타노를 다 가진 것 같은 뷰를 선사했다. 주드 로와 함께 우리는 다 같이 발코니에 서서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우선 가보고 보는 우리의 여행 법대로 우리는 동네 탐방도 할 겸 저녁도 먹을 겸 저녁 시간이 되어 깨끗이 샤워를 하고 세트로 크림색 리넨 소재의 옷을 맞춰 입었다.

“자기, 여기 샤워기 봤어? 완전 최고인데?”

남편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샤워기에 뿅 가있었다. 이럴 때 보면 소소한 걸 보고 감동받는 남편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다. 남편이 기분이 좋으면 나도 마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평상시에 귀찮아서 잘 안 찍어주려고 하는 사진도 은근슬쩍 더 자주 부탁할 수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포지타노 언덕에는 하나둘씩 등불이 밝아지고 있었다. 은은한 불빛이 하루의 피로를 싹 씻어주는 듯했다. 뭔가 차분한 마음이 드는 이 모습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기분 좋은 남편에게 부탁해 시그니처 같은 포지타노의 모습을 아이폰 카메라에 담았다. 산뜻한 기분으로 언덕을 내려오며 우리는 사람이 많은 레스토랑을 지나 노천에 테이블이 많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해는 진 상태라 완전 어둑어둑해진 하늘에 언덕을 가득 매운 등불이 마치 하늘의 별 같았다.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테이블에 앉아 우리는 여유를 즐겼다. 아이같이 웃기를 좋아하는 남편은 여전히 기분이 좋은지 계속 웃어댔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당신이 아니면 난 이런 곳에 못 와봤을 것 같아.”

살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하긴 순수한 남편은 가끔 나를 감동시키는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나의 노력을 자주 언급하지 않는 짓궂은 남편의 이 한 마디는 나를 금방 삭 녹여버렸다. 그리고 마치 우리의 관계가 더 운명처럼 느껴지는 건 왠지 모르겠다. 사실 이 챕터를 길게 여기까지 쓴 이유도 이 한마디 들은 게 자랑하고 싶어서였다. 남편의 한 마디에 맘이 한결 푸근해진 나는 저녁도 맛있게 먹고 그 날 저녁 조용한 포지타노 밤길을 걸으며 남편과 둘 이할 마지막 여행을 맘껏 즐겼다.

포지타노에서의 꿈같은 주말은 금방 지나갔다.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에서 맨날 빌라 주인의 아들이 차려주는 조식도 먹고, 카프리섬까지 다른 2 커플과 배도 타고 당일로 갔다 오면서 우리는 소중한 추억을 한껏 만들었다. 둘 다 처음이었던 포지타노는 그 전의 맛없던 로마의 식당들도 나폴리의 지저분한 길거리도 다 잊어버리게 했다.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될만한 주말을 뒤로 우리는 다시 로마로 떠났다. 이번엔 좀 더 심각하게 내 비자 인터뷰에 임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우리끼리는 베이비문이었지만 가족들에게는 명색이 비자 발급이었던 만큼 로마에서의 마지막 마무리는 중요했다.

처음에 머물었던 에어비앤비 주인과 딜을 해 좀 더 싼값으로 다시 머물기로 한 우리는 익숙한 돌길을 따라 로마의 첫 에어비앤비로 다시 돌아왔다. 작지만 로마의 정서가 느껴지는 에어비앤비에 돌아온 우리는 우선 광란의 주말을 보낸 뒤라 바로 뻗었다. 에어컨까지 빵빵 틀어놓고 깜빡 잠이 든 나는 그동안 무리를 했는지 바로 목이 나가버렸다. 뭐 비자 인터뷰에 목소리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하고 내일 있을 인터뷰 서류를 챙겨 봤다. 다시 돌아온 김에 콜로세움 안에 들어가 보기로 하고 티켓팅을 한 우리는 가는 길에 프랑스 영사관 위치를 확인하느라 일부러 영사관 앞을 지나갔다. 비자 인터뷰에 앞서 아무리 문의 전화를 해도 답이 없던 영사관에 겨우 한 번 통화 연결이 되었던 우리는 어이없는 목소리에 경악을 했었다.

“우리는 전화 문의는 안 받으니, 인터넷에서 보고 준비해오세요. 삐~”

질문이 뭔지도 듣지 않고 다짜고짜 테이프 반복하듯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린 영사관 직원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한 우리는 혹시나 해 영사관 벨을 눌러보았다.

“안녕하세요, 내일 비자 인터뷰가 있어서 뭐 좀 물어보려는데 여기가 영사관 맞나요?”

“인터뷰 시간에 맞춰서 와서 물어보세요. 삐~”

전화로 하나 13시간 차를 몰고 와 물어보나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인터넷을 보고 준비한 서류가 다 맞기를 바라며 우리는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그다음 날 아침, 가장 빠른 시간으로 인터뷰 일정을 잡았던 나는 서류를 챙겨 어제 걸어봤던 길을 따라 영사관으로 향했다. 이 인터뷰만 잘 되면 내가 생각한 대로 프랑스에서의 체류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역시 난 일처리를 잘해, 하고 혼자 자만하며 인터뷰 시간보다 15분 일찍 영사관 앞에 도착했다. 혹시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나 싶어서 벨을 눌러봤다. 한 세 번 눌러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옆에 있는 분수대에 걸터앉아 시계만 보며 15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10분이 지났다. 인터뷰 시간인 9시를 5분 남겨두고, 영사관 직원 같아 보이는 사람이 출근을 했다. 투철하게 근무 시간을 지키시나 보다. 한국 같으면 9시부터 오픈이면 그전에 와서 오픈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을 프랑스 사람은 9시부터 근무시간이면 그것보다 일찍 올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뭘 더 바라냐, 하는 생각에 9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8시 58분이 됐다. 비자 인터뷰가 9시니까, 지금 들어가야 인터뷰에 임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나름 생각했다. 그래서 또다시 벨을 눌렀다. 또 한 세 번을 눌렀을까, 인터폰 건너 목소리가 말했다.

“마담, 조금만 기다리세요.”

영사관에 들어가기 전부터 찍힌 느낌이었다. 그리고 9시가 돼서야 2미터는 돼 보이는 패셔너블한 보안이 나와 텐트를 쳤다. 이제 오픈인가 보다.

철저히 동선이 정해져 있는 영사관은 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안 검색대를 거쳐서 바로 여권으로 신분 확인을 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방으로 들어가면 의자가 있는 인터뷰 대기실이 있었다. 당연히 처음 순서인 나는 혼자 방에 앉아 있었다.

“마담 신.”

드디어 인터뷰실로 들어갔다. 코로나가 아니어도 은행 창구처럼 막혀있는 투명 유리 건너편에 앉아있는 영사관 직원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에서 체류하다 5월에 코로나 때문에 프랑스인인 남편을 따라 프랑스로 무비자 입국을 해서 오늘 비자를 신청하러 왔습니다.”
“이태리 거주증이 있나요?”

순간 영사관의 질문에 급 당황했다. 원래 이태리 체류증이 있는 사람만 이태리에서 프랑스 비자를 신청할 수 있었나 싶었다. 나도 그들이 했던 대로 돌려주기로 했다.

“아뇨, 근데 인터넷에는 그렇게 안 나와 있던데요.”
“원래 이태리 거주하는 사람만 신청할 수 있어요. 우선 알겠으니 서류를 줘 보세요.”

나는 몇 번이고 체크한 서류 뭉탱이를 건넸다. 의외의 난관이 하나 지나갔으니 이제 잘 되겠지. 내 서류야 문제가 없을 테니까 하고 생각했다.

“혼인 신고서는 이걸로 안돼요. 최근 3개월 안에 발급한 걸로 해야 돼요.”

나는 2018년 결혼 당시 받은 원본을 가지고 갔던 차에 영사관 직원의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인터넷엔 그렇게 안 나와 있었던걸요? 게다가 제가 질문하려고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아무도 답변을 안 하고, 인터넷 찾아보라고만 했어요. 저 프랑스에서 임신한 몸으로 여기에 차를 타고 13시간이나 걸려서 왔어요. 이번에 비자를 못 받으면 프랑스에서 불법체류를 하게 돼요. 어떻게 안될까요?”

상황이 이렇게 되니 마치 감옥에 끌려갈 사람처럼 사정을 하게 됐다. 호르몬 때문인지 눈물까지 나려 했다.

“원래 절대 안돼요. 그런 경우면 프랑스에서 구청에 가서 부탁해봐요.”
그럴 거면 여기에 안 왔지 왜 내가 이태리까지 와서 비자를 신청하겠는가. 본인들끼리도 교통정리가 안 되는 프랑스 행정에 두 손 두 발 다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서 비자를 받아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안 나는 좀 더 사정을 해야겠다 싶었다.

“프랑스 구청에서는 비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해서 이렇게 오게 된 거예요. 미국에서부터 아무런 방법이 없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제발 이번에만 해 주시면 안 되나요? 꼭 부탁드려요. 흑흑”

휴하고 한숨을 쉬며 영사관은 내 서류를 뒤적거렸다. 해 줄려는 건지 더 거절할 껀덕지를 찾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노인네처럼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아, 도저히 안 되겠네요. 여권이 곧 만료돼서 비자를 내 줄 수가 없어요.”
“네? 뭐라고요?”

이번엔 정말 가슴이 철렁했다. 다른 건 졸라서 넘어간다고 처도 사실 여권이 곧 만료될 수도 있다는 걸 그 날 아침에 처음 깨닫고 왔었다. 최소 6개월 남은 여권이면 된다고 또 인터넷에 쓰여있었던 것을 기억해 그걸로 우선 되겠지 하고 왔었다.

“만약에 제가 다 봐주고 비자를 내준다고 해도 그럼 프랑스인 배우자로 1년짜리 장기비자밖에 내줄 게 없는데, 여권이 1년이 안 남았으니 도저히 내줄 수가 없겠네요. 여권을 갱신해서 다시 오세요.”

청천벽력 같은 그녀의 마지막 말에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설마 설마 하고 아침에 남편에게 말을 꺼내지 않은 채 혼자 걱정하던 게 현실이 되었다. 다 내 잘못이었다. 한창 시간 많을 때 여권이나 갱신해 놀 생각도 안 하고 열심히 남편만 따라다닌 내 잘못이었다. 아 나는 왜 내 몸 하나도 못 챙기고 이렇게 항상 말썽을 피울까. 여기까지 온 것도 쉽지 않았는데 여권 갱신은 언제 해서 언제 여길 다시 온단 말인가. 병원은 없어도 다음 달이면 애가 나올 판이었다.

“전 다음 달이면 출산도 해야 하고 그 사이에 여권 갱신을 못하면 프랑스에서 오버 스테이가 되는데요, 한 번만 봐주시고 단기 비자라도 내주시면 안 될까요.”

“걱정 마세요. 당신만 그런 건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영사관의 말에 도저히 더 이상 우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서류를 주섬 주섬 챙겨서 인터뷰실 밖으로 터덜 터덜 걸어 나와 검색대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열심히 놀고 깔끔하게 일처리까지 하고 가려던 내 완벽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숙소로 향하며 남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열심히 고민을 했다. 서류 탓을 할까, 내 실수를 이실직고할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땐 순진한 척 사실대로 말하는 게 최고였다. 다 잘 됐겠거니 하고 반갑게 나를 반겨주는 남편을 보는 순간, 미쩍은 웃음을 지으며 방금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무슨 일만 있으면 부모님한테 전화를 하는 남편은 내 말을 듣고 바로 부모님한테 전화를 하더니 혼인 신고서 때문에 비자를 못 받았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남편이 너무 고마웠다. 충분히 내 탓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을 남편은 일언 방귀도 없이 애꿎은 혼인 신고서 탓만 했다. 포지타노가 그렇게 좋았나.

어쩔 수 없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우리는 막판에 일정을 바꿔 이틀 더 있기로 하고 예약한 밀라노 에어비앤비로 향했다. 이제 정말 명색도 없고 변명도 없는 우리만의 순수한 여행이었다. 혼자 떠나서 나만의 시간을 보냈던 밀라노에 이제는 남편과 뱃속의 아기와 함께 다시 가는 의미 있는 마지막 여정이었다. 그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면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둘만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가져온 옷도 이제 한 번씩은 다 입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둘이 편히 쉬고 즐기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무비자 체류 때문에 설마 유럽에서 쫓겨나는 불상사는 없겠지 하고 일부러 마음을 놓기로 했다.

그렇게 간 밀라노는 항상 옳았다. 수도는 아니지만 가장 발달되고 비싼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밀라노는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첨단의 도시였다. 오래된 우체국을 개조해 스타벅스 로스터리로 재탄생한 스타벅스의 밀라노 플래그십은 밀라노에 있는 3일 내내 우리의 조식 식사 장소였다. 그동안 맛보지 못한 편리함과 신선함을 다 갖추고 있는 스타벅스에서 시작하는 하루는 그동안 지쳐있던 우리에게 활력소와도 같았다. 밀라노의 두오모, 나빌리오 그란데, 가리발디 등 나 혼자 돌아다녔던 도시 구석구석을 돌며 가이드가 된 마냥 남편과 밀라노를 선보였다. 이제는 나만의 공간에 남편을 들인 느낌이었다. 좋아할 거라 확신했던 밀라노는 역시 남편의 페이보릿이 되었다. 역시 내가 아니면 이런 곳에 못 와봤겠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밀라노에서 풀로 남은 마지막 하루를 나는 또 어떻게 보내야 잘 보냈다고 소문날까 열심히 고민을 했다. 폰다씨옹 프라다에 있는 카페에 가서 아침을 먹고 구경을 할까 하고 혼자 가봤던 프라다 갤러리를 다시 찾아봤다. 아무리 봐도 남편이 좋아할 리가 없는 너무 현대적인 공간이었다. 우리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하면 화려하게 장식할까 열심히 잠을 설치며 고민하던 나는 갑자기 카프리섬을 갈 때 만났던 커플이 코모 호수에서 배를 탄 이야기르 했던 게 생각이 났다. 코모 호수는 밀라노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큰 호수로 요트경기를 할 정도로 큰 호숫가를 둘레로 고급 빌라가 즐비해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유럽 블로거들이 자주 올리곤 하는 코모 호수엘 예전에 밀라노에 갔을 땐 혼자 가기 싫어서 가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이제 남편 차가 있으니 두 시간 정도 당일 치기로 갔다 오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다만 운전하기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남편만 잘 꼬시면 됐다.

새벽 동안 열심히 하루 일정을 생각해 놓은 나는 아침이 밝아오자 남편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역시 아무 생각 없는 남편은 스타벅스에 아침을 먹으러 갈 생각 말고는 별 아이디어가 없는 듯했다. 나는 전혀 길을 모르는 남편에게 코모 호수 이미지를 보여 주며 여기 가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고 자연을 좋아하는 남편은 당연히 오케이를 했다. 밖에 나갈 채비를 하고 차에 탄 나는 구글맵을 틀고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여기 얼마나 가야 해?”
“글쎄, 네비 앤 한 시간 사십오 분이라고 나오네?”
“뭐?”

이미 고속도로를 탄 남편은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할 수 없이 액셀을 밟았다. 그리고 조금 지나지 않아 고속도로는 아름다운 호숫길 옆을 지나기 시작했다. 남편은 운전을 하다말고 또 열심히 호수를 쳐다봤다.

이번 챕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아름다운 코모 호수는 사진으로 대체하려 한다. 역시나 아름다웠던 코모 호수에서 남편은 또 “내가 여기 오자고 했지?” 레퍼토리를 열심히 게워내었다. 아름다운 호수에서 반나절을 신선놀음을 하고 우리는 다시 밀라노에 돌아와 두오모 꼭대기를 올라갔다. 한창 보수 중이라 공사판이었지만 건축양식이 너무 아름다운 두오모 기둥을 감상하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밀라노 시내를 거닐었다.

두오모 공원 앞 한산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 공연을 유튜브로 항상 찾아보는 남편은 순간을 좀 즐겨 볼 필요가 있다며 피아노 앞 돌담에 걸터앉았다. 순간 남편을 위해 피아노 연습을 하던 게 생각났다. 어렸을 때 배우다 말았던 피아노 소리는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를 노스탤지어에 빠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항상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멈추는 남편과 함께 길거리 공연을 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지금 여기 나와 함께 하고 있는 남편에 살포시 기대 보았다. 내일이면 어차피 떠나야 할 이곳에서 서두를 필요도 없는 마지막 오후였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우리가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며 동영상을 찍었다며 보여줬다. 항상 우리 사진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찍어달라고 하기 바쁜 나는, 누군가가 우리의 진실된 모습을 모르는 사이에 담아줬다는 게 너무 기뻤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홀로 여행하고 있는 그에게 나름의 귀감이 되었나 하는 생각에 우리의 베이비 문도 이렇게 만족스럽게 대막을 내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에 지친 남편도 잠들고, 울다가 지친 아기도 잠든 새벽 2시가 넘은 지금. 나는 두 남자가 깰까 봐 조심조심 주위를 살피며 거실에서 열심히 타자를 치고 있다. 모유수유를 하느라 어깨가 너무 절여온지는 이미 오래됐고, 요즘엔 열심히 글을 쓰느라 안 그래도 피곤한 육아에 더더욱 잠이 부족한 상태이다. 게다가 프랑스는 현재 유럽 국가 중에서도 일등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고, 엎친데 겹친 격으로 남편은 오늘 직장 동료가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고 걱정 어린 모습으로 퇴근했다. 시간적 여유도, 마음적 여유도 갈수록 줄어들어가는 지금 밀라노에서의 마지막 날 즐겼던 여유는 어땠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나가는 여행객이 찍어줬던 우리의 뒷모습을 담은 영상이 없었다면,  그런 순간이 존재했는지도 까먹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베이비문은 사치가 아닌 사무침이 되었다. 언젠가 우리의 귀여운 아기가 커서 셋이 다시 이태리를 찾는다면, 그때는 둘만의 추억을 되새기며 아이와 세 가족이 되어 있음을 흐뭇하게 여기고 있겠지. 그 날이 빨리 다가오길 바라며 열심히 아기에게 모유수유를 해야겠다.

*더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the_young_heiress

'우리 빌라에선 이런뷰가 보인답니다' from 포지타노
리넨 커플
아름다운 밤이에요, 포지타노
발코니에서 매일 먹던 조식과 뷰
카프리행 배 위에서
지중해에 풍덩 빠진날
포지타노 빌라 하늘공원에 있는 자쿠지에서
나폴리에서 피자보다 유명했던 카페
나폴리에서 유일하게 먹었던 피자
페스카라 해변가에서
남편도 보트햇쓰고 한컷
바티칸 씨티에서
콜로세움안에 들어간날
로마 에어비앤비
콜로세움, 로마 첫날
바티칸씨티 내 대성당 안에서
밀라노 스타벅스 로스터리
출근 도장
밀라노 두오모 공원
코모 호숫가 빌라에서 신선놀음 중
지나가는 행인이 찍어준 커플샷, 코모
밀라노에서 우리가 모르는새 어떤 여행객이 우리 뒷모습을 찍어줬다
이전 15화 코로나 베이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