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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yverse Oct 31. 2020

한국 장모 프랑스 사위

딸과 와이프 사이

이 책은 이 챕터를 쓰기 위해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보면 다른 챕터들과 크게 상관없어 보이는 이 챕터를 그렇다면 왜 쓰느냐, 아니면 역으로 이 챕터와 크게 상관없는 다른 챕터들을 그렇게 길게 왜 구구절절 썼느냐 하고 혹자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답은 바로 다음 질문에 있다. 당신의 어머니는 누구십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간관계 중에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관계를 갖는 사람은 바로 엄마라는 사람이다. 아기를 눈앞에서 출산해서 품에 바로 안아본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물론 자연 분만을 하지 않고 제왕절개를 하는 경우 엄마품에 안기기 전에 다른 손을 많이 거쳤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내 문장에는 관계라는 말이 쓰인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내 생존을 책임지는 사람, 내가 울고 보채지 않도록 내 행복을 책임지는 사람, 내가 다치고 아프지 않도록 내 건강과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특별한 사람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사랑을 책임지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엄마다.

내가 엄마가 된다는 소식에 가장 기뻐하고 가장 걱정하고 가장 궁금해 한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나의 엄마였다. 아마도,

“너도 엄마가 돼보면 알게 될 거야.”


라는 엄마의 말에 빨리 근거를 대고 싶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과연 엄마가 돼보면 세상의 어떤 감정이 가장 엄마와 공감이 갈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여운 아기를 안고 다니는 엄마 역할을 빨리 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항상 해외에서 생활중이던 나에게 임신 당시부터 보러 오고 싶어 하고, 특히 아기가 태어나면 와서 보살펴 주고 싶어 해 줬던 엄마의 의지는 본능적이었다. 아무리 비싼 비행기 삯도, 치명적인 팬데믹 바이러스도 엄마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나도 임신했을 때부터 맘껏 먹지 못한 엄마의 집밥을 하루빨리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출산을 하면 아기 다음으로 가장 먼저 보고 싶은 사람이 엄마였다.

반면 연애 초반부터 유독 우리 엄마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남편의 생각은 좀 달랐다. 우선 우리 엄마와의 관계를 떠나서 남편은 우리 둘이 아기를 만나는 시간을 갖고 같이 오손 도손 키우는 게 낭만적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하진 않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우리 엄마가 산 바라지를 해주러 오는 게 싫어서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유가 어찌 됐든 엄마가 나와 아기를 봐주러 오겠다고 한 이후부터 남편은 심기가 불편했다. 원래 다른 집도 이럴까? 하긴 사위의 입장에서 장모가 무작정 편하지만은 아닌 것은 꼭 국제결혼이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이렇게 된 히스토리가 조금 있었다. 초반에 내가 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남편 아파트로 동거를 하러 간 날이 그 시작이었다. 당연히 내 행동에도 화가 나고 덩달아 한국 부모님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프랑스 남자 친구도 못마땅했던 엄마는 나에게 엄마의 입장을 남편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했었다. 그리곤 친척들 앞에서 약혼식이라도 하고 동거를 시작하라고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비용은 엄마가 다 내겠다고까지 했다. 나는 약혼식 얘기는 별개의 문제이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한국 정서에 대한 얘기는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최대한 사실적인 접근 방법으로 말을 꺼낸다는 게,

 “우리 엄마가 둘이 약혼이라도 하고 동거하래.”라고 오히려 무슨 초등학생처럼 말해버렸다. 그 말을 듣던 남편은 갑자기 차고 있던 벨트를 풀더니 화장실 문을 벨트로 치면서,

“도대체 너희 엄마는 왜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거야!”라고 말했다. 갑자기 벨트를 풀어서 화장실 문을 치는 걸 보고 일차로 놀라고, 그다음에 한 말에 이차로 놀란 나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말을 잘못 전달하다가는 계속 이 꼴이 나겠다, 둘이 직접 말하는 게 낫겠다 하고. 게다가 엄마의 의견도 남편의 의견도 내 생각과는 다 틀렸다.  우선 동거를 하겠다고 집을 뛰쳐나갔다고 한들 그게 결혼을 하겠다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반대의 의미에 해당했다. 결혼은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우선 동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나간 거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약혼이라도 하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엄마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또한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발언으로 엄마의 말을 받아들이는 남편의 말과 태도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우선 엄마가 이해했음 하는 한국인 정서에 동의는 안 한다 치더라도 한국인 정서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말로 하면 될 것을 왜 갑자기 애꿎은 벨트는 빼서 화장실 문을 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벨트까지 망가졌다.

그 사건이 있고나서부터 남편은 엄마를 보수파로 구분해 버렸다. 그리고 우리 관계가 못마땅한 일인이 있다면 그건 우리 엄마라고 생각해 버렸다. 물론 그 이후에 한국에 있는 동안 우리 집에 가서 엄마 아빠도 만나고, 이후 우리가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 놀러 온 엄마와 대화도 많이 시도하는 등 엄마와 관계를 생성해 보려고 다분히 노력하긴 했지만,  초반에 쌓인 둘 사이의 긴장 관계는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각자 나를 자기편으로 두려는 두 사람의 어쩔 수 없는 대립인 것 같기도 하다. 언제까지나 나는 엄마에게는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엄마의 자식이고, 남편에게는 그와 독립된 삶을 함께 꾸리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와이프이니 말이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남편의 부모님과 잘 지내려고 노력해서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한테도 남편이 같은 노력을 해줬으면 하는데 그게 어려운가 보다. 그래서 사실은 나도 서러울 때가 많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섭섭함은 남편에게 표현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이런 모든 정황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기를 낳는데 엄마가 와보지 않는다는 것은 엄마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예정일만큼이나 복잡했던 엄마의 프랑스 방문 일정을 마지막까지 여러 번 조정한 후, 엄마는 절묘하게 내가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저녁 비행기로 마르세이유 공항에 도착했다. 캬, 타이밍 한 번 죽여줬다.

본인 머릿속으로는 보수파인 엄마에게 자기만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남편은 엄마와 항상 적정 거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아기를 데리고 퇴원한 당일날 둘을 생각해 같이 엄마를 데리러 공항에 갈 순 없었다. 그래서 둘이 직접 소통할 수 있도록 각자에게 왓츠앱을 설치해주고, 남편은 엄마를 모시러 마르세이유 공항으로 차를 몰고 시간 맞춰 나갔다. 내가 봤을 때 사실 엄마와 남편은 비슷한 점이 많다. 단적인 예로 내 입장에서는 둘 다 보수파다. 그래서 더 대립하는지도 모르겠다. 무튼 공항에 도착한 남편은 나에게 잘 도착했다고 문자가 왔고, 비행기에서 내린 엄마는 잘 내렸다고 연락이 왔다. 마지막 순간까지 둘은 소통을 거부했다. 겨우 연락이 닿은 둘은 잘 만나서 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나중에 엄마한테 들은 뒷얘기에 의하면 엄마를 만나고 차에 짐을 싣고 주차장을 나오는 길에 정산소에서 남편은 카드 비번을 까먹었다고 한다. 보통 나에게 전적으로 모든 걸 믿고 맡기는 남편은 가끔 혼자 카드 결제할 일이 있으면 카드 비번을 잘못 눌렀다 카드를 정지당하곤 했다. 하필 새로 재발급받은 카드를 가지고 엄마를 만나러 간 남편은 카드 비번을 몰라 주차비를 못내고 있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던 남편은 엄마에게 카드를 좀 빌려달라고 해서 주차비용을 정산한 뒤에야 주차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얘기를 해주던 엄마의 말에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원래 엄마와 둘이만 있을 때 말수가 적은 남편이 카드를 빌려달라고 말할 때까지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정말 처참했다. 평상시에 좀 잘하지 하고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엄마는 우선 나를 위해 꼼꼼히 준비해온 한국 식재료를 꺼내며 냉장고에 빨리 넣어야 할 신선한 재료들 위주로 먼저 가방을 풀었다. 이미 먹고 싶은 음식을 다 주문해서 거기에 맞는 재료를 준비해온 엄마는 나를 위해 해 줄 메뉴들을 다 생각해 온 상태였다. 약 3주 정도 있을 예정이었던 엄마는 임신했을 때부터 챙겨주지 못해 안타까웠던 마음을 정성껏 담아 있는 내내 나를 위한 음식을 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었다.

내가 가장 먼저 주문한 요리는 엄마표 닭볶음탕이었다. 달달한 간을 맞추기를 좋아하는 엄마의 닭볶음탕은 첫날엔 닭과 감자 위주로 맛있게 건져먹고, 둘째 날은 남은 야채와 양념에 밥을 비벼먹으면 딱인 그런 맛이었다. 안 그래도 아시아식당이나 식재료가 찾기 힘들었던 마르세유에서 입맛에 맞는 음식을 못해먹고 있던 나는 엄마의 요리를 매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나 있었다.

다음날, 엄마는 직접 챙겨 온 앞치마를 두르고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올 시간에 맞춰 저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미 엄마가 필요한 현지 식재료까지 다 공수한 나는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아기에게 모유수유를 하며 엄마가 저녁밥을 짓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엄청난 봉사정신으로 밥을 짓는 엄마가 좀 안타깝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맛있게 먹어주는 게 엄마를 위한 보답이겠지라고 혼자 정당화를 하고 엄마가 어서 밥을 다 짓기를 기다렸다.

엄마는 정성 들여 준비한 닭볶음탕을 프라이팬 한솥껏 식탁에 차려놓고 찰진밥과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오이지무침까지 가득 한 상을 차렸다. 한국에서 살면서 이제 제법 매운 것도 잘 먹고, 외국인이 먹기 힘든 한국 음식도 곧잘 먹는 남편도 내가 해준 닭볶음탕을 잘 먹곤 했으니 이런 완전 한국적인 밥상도 잘 먹겠지 했다. 물론 제과제빵 셰프가 직업인만큼 남편은 먹는 거에 굉장히 까다롭긴 했다. 인도네시아 시절부터 요리에 요자도 모르는 내가 그런 남편을 위해 밥을 하겠답시고 이것저것 기본도 모르는 요리를 했다가 밥상머리에서 울고불고 싸운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제법 남편의 한계를 파악한 나는 웬만한 음식을 어떻게 조리해야 하는지 나름 머릿속에 리스트를 가지고 요리를 했다. 그래서 이제는 열 번 중 여덟 번 정도는 성공적인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 공들여서 익힌 노력의 결과였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 수십 년간 같은 노력을 해 온 엄마의 요리 실력은 아직 남편의 입맛에는 적합화 되지 않았나 보다. 뭐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필요도 없이 그날 엄마의 닭볶음탕은 남편의 맘에 들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건 남편의 그날의 기분 탓일 수도 있고, 닭의 신선도 일수도 있고, 닭볶음탕의 매운 정도일 수도 있고, 그냥 엄마와 오랜만에 하는 첫 식사가 어색해서 괜히 떼를 쓰는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뭐가 됐던 남편은 또 식탁 머리에서 갑자기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고, 미역국까지 끓여가며 나를 위한 첫 저녁밥을 지은 엄마에게는 불합리한 태도였다. 어디서 배워먹은 버리장머리인진 알 바가 없다. 내가 아는 시어머니는 아들이 그렇게 행동했으면 바로 밥그릇을 뺏어버리고 오늘 저녁은 굶으라고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엄마는 사위에게 그렇게 행동할 수 없었다. 역으로 남편은 장모에게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됐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나는 또 벙어리가 되었고, 이 상황이 너무 서러우면서도 무엇보다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엄마가 보는 앞에서 남편과 목청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둘은 뭘 먹든 상관없으니 어머니는 여기 계신동안 먹고 싶은 대로 해 드세요. 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먹을게요. 그게 다예요.”

무엇보다도 이런 말을 듣고나면 더 이상 맛있게 밥이 넘어가지 않는 게 더 억울했다. 우선 오늘 차린 음식은 닭볶음탕이 다이니 엄마는 최선을 다해 사위에게 음식을 덜어주려 했다. 그 순간 남편은 나에게 프랑스어로 소스가 너무 많은 음식은 싫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모질게도 엄마의 행동을 막을 수밖에 없었고, 엄마는 당황하며 식사를 계속했다. 그렇게 무언의 첫날밤 식사는 살벌하게 지나가고, 나는 그날 밤 엄마가 자고 있는 옆방에서 소리 없이 계속 눈물을 훔쳤다. 엄마가 만약 이 글을 다시 읽고 그 날을 떠올린다면 엄마의 가슴 아팠을 그날의 심정을 두 번 울리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엄마가 와있는 첫 주 동안 아기는 울고, 남편은 소리를 지르는 밤이 계속됐다. 7년 전에 비해 남편과 싸우는 레벨이 많이 향상된 나는 아기에게는 미안하지만 남편이 화를 낼 때마다 굴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그럴 때면 아무도 얼러주지 않는 아기는 더 울곤 했다. 그러면 듣다 못한 엄마가 어디선가 달려와 아기를 구출하려 했다. 나는 엄마에게 우리가 싸우는 게 아니라고 굳이 아기를 그렇게 구출하지 않아도 된다고 언성을 높였다. 지금 쓰고 보니 어린 시절 엄마 아빠가 가끔 부부싸움을 하실 때, 싸우는 내용이 뭔지는 모르고 무조건 무서워만 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이후로 평화주의자가 되었던 내 모습도 떠오른다. 남편과 열심히 내 주장을 하는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 아기는 조금 지나서 이렇게 싸우는 나와 남편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시간은 정말 약이다. 엄마가 우리와 함께 지내면서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는 남편과 잠을 설치는 나를 위해 밥을 지어주고, 빨래를 해 줄 수밖에 없는 날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남편은 엄마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고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도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집에서의 생활에 적응해갔다. 그러면서 나는 그동안 엄마와 풀지 못한 회포도 풀고, 남편이 없는 점심시간에는 맵고 짠 한식도 열심히 해 먹었다. 나 역시 엄마의 존재가 너무 감사했다. 그 전이라고 안 감사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표현할 용기가 부족했다.

지금 거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엄마가 우리 집에 있는 동안 잤던 소파 침대 위에 아기를 재우고 있다. 이제는 아기가 자는 시간들을 이용해 혼자 요리도 하고 빨래도 두 판은 돌린다. 하지만 산후 초반에는 밤이면 울며 젖 달라고 깨는 아기의 리듬에 적응을 못해 항상 잠을 설쳤고, 일찌감치 출근하는 남편의 출근 시간에 맞춰 거실에 있는 엄마에게 아기를 토스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살아남았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엄마가 있는 동안 갓난아기를 키우는 면역도 함께 키웠기에 이제는 여유롭게 내 페이스에 맞춰 아기를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없었더라면 더욱더 힘들었을 그런 3주간이었다.

다행히 엄마와 공동 육아를 하며 아기를 키우는 것도 많이 익숙해지고 몸도 많이 회복한 나는 엄마가 있는 동안 틈틈이 엄마와 외출을 할 수 있었다. 집 앞에만 나가도 유적지가 많은 마르세유를 떼고 우리는 간단한 기차여행을 해 반 고흐의 발자취인 아를까지 유모차를 밀고 다녀왔다. 아마도 나 혼자 육아를 했다면 집에서 햇볕도 못쬐고 집안에 처박혀 모유수유만 하고 있었을 것을 다행히 엄마가 곁에 있던 덕에 사람답게 샤워도 하고 화장도 하고 외출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엄마 포토그래퍼 찬스를 이용해 아기와 어여쁜 한 때를 마음껏 기록할 수 있었다. 역시 울 엄마가 최고였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 코로나 음성 판정도 받고 14일간의 의무적인 자가 격리도 마친 엄마는 다시 서울에서 열심히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마르세유에서 내 생활 반경을 다 보고 겪어보고 간 엄마는 내가 일어날 시간에 맞춰 나와 영상 통화도 하고 아기와 아침인사도 한다. 우리 동네여도 엄마가 안 왔다 갔었더라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을 추억의 장소들이 항상 내 주변을 둘러싸고 엄마와의 좋았던 한 때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이제는 좋은 장소를 발견하면 엄마와 꼭 가보고 싶다. 안되면 엄마에게 영상통화로라도 보여주고 싶다.

엄마와 자식의 사랑은 생각보다 단순한 것 같다. 필요할 때 주고 줄 때 받으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을 괜히 복잡하게 만들면 괜히 성격만 망친다. 사실 복잡해 보이는 심리학의 근본도 어떤 이유에서든 부족했던 애정결핍에 의해 파생된 복잡 시런 이론들이 대부분이 아닌가. 우리 엄마에게 배운 소중한 사랑의 느낌과 경험을 통해 나도 내 아들에게 열심히 퍼주고 싶다.


그렇담 사위와 장모의 관계는 생각보다 단순할까. 그 답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단 분명한 건 아무리 잘난 사위라 한들 장모와 딸 사이의 관계에는 맘대로 끼어들기 힘들 것이란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와 자식의 관계는 본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편과 아내의 사랑은 본능이 아닌가? 아, 잘 모르겠다. 애 좀 더 키워보고, 둘째 한 번 더 낳게 되면 그때 책 한 번 더 써야겠다.    


*더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the_young_heiress

이번 엄마 여행 기간중 남편과 찍은 사진중 가장 잘 나온 컷
그러고 보니 엄마는 눈을 감았다
아기와 엄마
밤마다 아기를 재워주던 대타
나와 엄마
엄마표 육개장
시어머니와 엄마
엄마와 나
아를의 반고흐 카페에서 엄마와
아를에서 발견한 맛집에서 엄마와
호캉스중인 우리 셋
호캉스중 조식중인 엄마와 나, 아기는 덤이다
엄마와 갤러리 투어중
엄마 가기 전야제, 엄마의 버킷리스트인 부야베스를 먹으러 갔다
떠나는 엄마에게 닭뼈국을 끓여준 남편과 넷이
공항으로 럭셔리차를 타고 떠나는 엄마, 안녕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으로 떠난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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