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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yverse Oct 28. 2020

I 헤이트 New York

뉴욕 적응기

영국에 살 때 한창 프렌즈 시리즈가 처음 방영되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아직 중학생이었기도 하지만 친구들과 한 집에서 모여서 오손도손 산다는 것이 새로웠던 나는 그런 설정 자체가 인위적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십오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무엇보다도 그 설정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방 4개가 있는 이 층집에는 우리 커플 외에도 세 명의 룸메가 항상 있었고, 같은 집에서 살다 보니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보다 룸메들과 같이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일 층에 넓은 거실과 주방 그리고 식탁이 있었던 집 구조상 모두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저녁을 만들어 먹기 위해 같은 공간에 모일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서로 하루 일상을 묻고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의 처음 생활이 낯설고 외로울 수도 있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이유도 아마 항상 주위에 룸메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미국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추수 감사절과 같은 명절에도 우리는 룸메들이 다 다른 주 출신이었음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뉴욕에 남아있던 덕에 다 같이 집에서 터키도 굽고 호박파이도 만들어서 전통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미국 식문화나 시사 이슈, 구어식 표현 등을 손쉽게 익힐 수 있었다. 상대적 가난이라고 생각했던 아파트 쉐어는 뉴욕에서는 너무나 흔한 일이었고, 그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으니 이제는 오히려 이런 상황에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방이 4개나 되다 보니 룸메들이 자주 바뀌곤 했는데,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나름 우리 커플이 이 집에서 가장 장수한 커플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리스 보유자는 나에게 가끔 룸메들의 안부를 묻거나 집 보수 관련 소소한 부탁을 하기 위해 자주 연락을 하곤 했다. 또 새로운 룸메를 구해야 해서 집을 보여줘야 하는데 본인이 올 수 없을 경우 나에게 집 투어를 좀 시켜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가 이 집에서 보낸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연말이 다가왔다. 그 당시 룸메들로는 영화업계에서 소셜미디어 콘텐츠를 만드는 남자 흑인 직장인 한 명, 마케팅일을 하는 베트남계 남자 미국인 한 명 그리고 소통이 뜸했던 하와이 출신 여자 인턴 한 명 이렇게 세 명이 있었다. 보스턴에서 인턴쉽을 찾아 뉴욕으로 온 중국인 학생은 처음엔 우리와 소통을 뜸하게나마 하고 살다가 점차 집안일을 나눠서 하기 싫다는 이유로 거의 우리를 피해 다녔다. 그래서 어느 순간 흑인 친구와 요리하기를 좋아하는 베트남계 미국인 친구 그리고 우리 커플 이렇게 넷이서만 주로 집에서 같이 요리도 하고 넷플릭스도 보며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명절 때 친구들을 더 불러 여럿이 요리를 해 먹을 수 있었던 이유도 우리 넷이 워낙 잘 뭉쳤기 때문이었다.

원래 단기로 렌트를 했던 베트남계 미국인 친구는 우리와 같이 사는 게 편해져서 이 집에 더 머물고 싶어 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서둘러 리스 보유자에게 연락을 취하길 권했다. 나와 소통이 잦았던 리스 보유자는 오히려 그 친구 방이 빠지기 전에 빨리 다음 룸메를 구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던 것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직접 끼어들 수는 없었고, 그래서 어서 서로 연락을 취해서 룸메는 룸메대로 계속 있을 수 있게 되고 리스 보유자는 더 이상 룸메 서칭을 안 해도 되길 바랬다. 그 와중에 나는 A브랜드에서의 바쁜 일상이 계속되었고 남편도 직장에서 좀처럼 연말 준비를 하느라 쉴 새 없이 일해 집에 와서는 쉬느라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을 만들어 먹으러 일 층에 내려가 보니 오랜만에 두 룸메도 저녁을 준비하러 내려와 있었다. 참고로 같은 집에 산다고 해서 매일같이 서로 저녁을 해 주는 건 절대 아니고, 한 냉장고에 각자 장 봐온 식재료를 넣어두고 알아서 음식을 한 다음 먹을 때만 같이 테이블에 앉아 먹는 거였다. 나는 베트남계 미국인 친구에게 방은 잘 해결되었냐고 물었다. 그는 안타깝게도 이미 리스 보유자가 다음 룸메를 구해서 계약까지 한 상태였고, 그래서 이미 다른 집을 구했다고 했다. 하지만 새로 구한 집이 여기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고, 룸메가 있긴 하지만 일 년의 반은 브라질에 가 있어서 집을 거의 혼자 쓸 예정이니 우리가 자주 놀러 와도 된다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마음에 맞는 친구가 집을 나가게 되어 서로 아쉽긴 했지만, 이렇게 만난 게 인연이 되어 친구가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시간 동안을 더 즐기기로 했다.
그렇게 그 친구가 이사를 나가고 새로 들어온 룸메가 들어왔다. 그녀는 하와이 출신 대만계 미국인 여자였는데 패션 전문 대학교인 FIT를 졸업한 후 패션 컨설팅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업무의 특성상 자택 근무가 가능했던 그녀는 지난 반년을 스위스에서 살다 뉴욕에 잠시 돌아온 상태였고, 뉴욕에서 볼일을 마치면 또 스위스로 돌아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장기로 에어비앤비를 구하다 우리 집을 찾게 된 케이스였다. 새로 들어온 룸메이니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기에는 너무 일렀지만, 마치 그녀가 전 룸메를 쫓아내고 들어온 격이라고 생각해 바로 정이 가진 않았다. 그래도 같은 아시아계에 싹싹한 그녀는 우리와 금방 친해졌고 우리 집 문화에도 바로 적응해 곧 저녁시간에 식탁에 모여 같이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잘 지냈다.
뉴욕의 가을은 영화 주제가 될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다음에 찾아오는 겨울은 한국을 뺨칠 정도로 엄청 추웠다. 양극성 기온으로도 유명한 뉴욕은 여름은 엄청 습하고 더웠다가도 겨울은 엄청 건조하고 추웠다. 그렇게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힘들었던 뉴욕에서의 한 해도 무사히 지나가 새로운 해가 찾아왔다. 그간 나름 소소하면서도 많은 일을 겪은 우리는 새해가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찾아오는 내 생일을 축하도 할 겸 새해맞이도 오붓하게 할 겸 둘이 저녁 데이트를 하러 나가기로 했다. 한국 10 꼬르소 꼬모 카페를 워낙 좋아하는 나는 뉴욕에도 최근에 생긴 10 꼬르소 꼬모 카페를 남편과 한 번 갔다가 맛있게 식사를 하고 기분 좋게 나온 기억이 났다. 그래서 생일을 맛과 서비스가 보장된 곳에서 아늑하게 보내기 위해 또다시 10CC 카페를 찾았다. 남편은 이왕이면 더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할 걸 그랬다고 아쉬워했지만, 강 건너로 브루클린이 보이는 시 포트 디스트릭트에서 바람도 쐬고 밤 야경을 배경으로 멋있는 사진도 찍고 둘이 좋은 시간을 보냈다. 사실 집에서 룸메들과 같이 지내는 재미는 있었지만, 반년을 지내고 보니 집에 가도 방안 말고는 우리만의 공간이나 시간이 없다는 게 슬슬 아쉬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틈만 나면 집에 있지 않고 차라리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이제 날씨가 많이 쌀쌀해져서 제법 밖을 돌아다니기 추웠지만 그만큼 둘이 붙어 다닐 수 있는 둘만의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본인은 서프라이즈를 안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막상 나는 서프라이즈를 맨날 해줘서 자주 받곤 하는 남편이 웬일로 내 생일을 위해 케이크를 준비해 놨었다. 추운 강바람을 쐬고 집에 돌아온 우리는 따뜻한 방으로 돌아와 남편이 만들어 논 헤이즐넛 쵸코 케이크를 들고 열심히 사진을 찍고 내 생일 마지막을 불태우고 있었다. 룸메들과 함께 축하할 수도 있었지만, 왠지 우리 둘만의 시간을 좀 더 오래 갖고 싶었다. 나중에 케이크는 맛보라고 나눠주면 되지 하고 방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똑똑 노크소리가 났다. 룸메들이 알아차렸나 보다 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흑인 친구가 문 앞에 서있었다.  조심스럽게 우리 방으로 들어온 그는 할 말이 있다며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아마 내 생일인지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 같다.

“너네가 집에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새로 들어온 룸메가 애초에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리스 보유자와 트러블이 있었었다. 트래픽이 많은 에어비앤비를 통해 단기 룸메를 찾곤 하던 리스 보유자는 막상 사용 수수료를 때이고 싶지 않아 외부로 연락처를 받아 따로 거래를 하는 듯했다.  그렇게 서로 만나게 된 새 룸메와 리스 보유자는 초반부터 월세에 대해 불협화음이 좀 있었고, 결국 서로 가격을 잘 네고해서 집에 들어오게 된 것 같았다. 적당한 가격에 합의점을 찾았다고 생각한 새 룸메는 막상 집에 와보니 천장에만 창문이 나있는 자그마한 중간 방에 불만이 많았고, 가격도 다른 룸메와 얘기하다 보니 예전 룸메에 비해 많이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 불만이 늘게 되었단다. 그래서 우리 커플과 흑인 룸메가 다 출근하고 본인은 자택 근무를 하는 동안  도시 관리 센터에 리스 보유자를 고발했고, 오늘 낮에 아무도 없을 때 이미 집에 감시를 나왔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이유 때문에 감시를 나왔던 센터 직원들은 소방 안전 차원에서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소방법 기준애 미비된 적발 건을 9가지나 찾았다고 했다. 그럴 경우 이 집이 주거로 부적합한 주택으로 판정받을 수 있으며, 그 판정이 있으면 바로 집을 비워야 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갔단다. 사실 일이 그렇게 진전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그녀는 예방차원에서 리스 보유자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혹시라도 쫓겨나게 될 수도 있다고 했다고 미리 불씨를 터뜨렸단다. 흑인 친구는 본인이 왜 조심스럽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기는 슬쩍 들은 얘기를 미리 귀띔해주는 거니 그런 줄 알고 대비만 하고 어디 가서 자기가 알려줬다고 하진 말라고 했다. 난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리가 잘못한 것도 없고 더군다나 따지고 보면 다 그녀의 소행인데 왜 그걸 못 들은 척하고 있어줘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순간에 리스 보유자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나에게 방금 내가 흑인 룸메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며, 혹시 운이 나쁘면 쫓겨날 수도 있으니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아니, 이 한 밤중에 쫓겨난다는 말이냐 무슨 말이냐라고 했더니, 그건 본인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생일 밤중에 홍두깨 맞은 기분이랄까. 내가 열심히 생일이라고 밖에서 즐기고 있는 동안, 새 룸메는 우리가 다 쫓겨날 수 도 있는 짓을 하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게다가 집 안의 분위기를 생각해서 진짜 그런 일이 있을 때까지 조용히 있어야 한다니. 말이 안돼도 너무 안 되는 일이었다. 순간 너무 열이 솟구쳐서 그녀에게 바로 가서 따지려다가 다른 룸메의 질 탄을 받을까 봐 그냥 물이나 한 잔 마시러 일 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는 모두의 눈치만 살피며 조용히 소파에 앉아있는 여자 룸메가 있었다. 내 생일인지도 모르는 그녀는 조용히 인사를 하더니 슬그머니 물을 뜨고 있는 내 옆으로 왔다.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갑자기 입을 열더니 이렇게 말했다.

“있지, 오늘 도시 관리 센터 사람들이 왔다 갔는데, 혹시라도 그 사람들이 내일 다시 와서 이 집에서 못 산다고 할 수도 있어.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그러려고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도대체 내가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저 말을 알아들으라는 건지, 모르는 척하고 알아들으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자기 잘못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였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 마디 하려다가 내 생일 밤을 망치고 싶진 않아서 참고 별말 없이 이 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맛있는 남편의 케이크를 먹으며 방금 들은 일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이 이른 남편이 먼저 집을 떠나고 출근 시간이 훨씬 늦었던 나는 찬찬히 일어나 슬금슬금 집안을 살폈다. 흑인 룸메도 출근하고 없었고, 여자 룸메도 어딜 갔는지 집에 없었다. 중국인 학생이 살던 방에 최근에 새로 들어온 룸메만 방 안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 룸메와 따로 얘기를 할 시간이 없이 나는 우선 샤워를 하고 나름 출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리스 보유자는 계속 무슨 일이 없는지 확인차 문자를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룸메들은 다들 키를 가지고 다녔기에 집에 초인종을 쓸 일이 별로 없었던 우리는, 거의 처음 들어보는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랐다. 나는 그때 이 층에 있었는데,  그게 도시 관리 센터 사람들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우선 리스 보유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조용히 일 층으로 내려가 보니 그 사이에 새로운 룸메가 문을 열어줘서 이미 도시 관리 센터 사람들이 집안에 들어온 상태였다. 손에 두툼한 서류를 들고 있던 그는 마치 영장을 들고 온 경찰처럼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읽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이 집은 주거로 부적합한 주택으로 판정이 났으며, 모두들 오후 5시까지 집을 비워야 하고 오늘 밤부터 이 집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있으면 다 체포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제는 맑은 대낮에 홍두깨까지 들이댔다. 체포?

그 한 마디에 패닉 한 우리 둘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나가라고 하는 게 어딨냐고 반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의 발악이 익숙한 듯 걱정하지 말라고 적십자에서 와서 우리를 도와줄 거라고 어서 가서 짐을 싸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대문 앞에 적당한 공간을 찾더니 가지고 온 서류를 열심히 테이프로 붙였다. 그렇게 우리의 이 층집은 주거에 부적합한 주택으로 순식간에 낙인이 되었다. 뉴욕에 와서 열심히 집을 찾고 산지 8개월째 되는 달이었다.

다행히 출근이 늦어서 집에 있던 나는 차차 패닉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리스 보유자, 남편, 흑인 룸메에게 열심히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빨리 집에 오라고, 다들 오후 5시 전에 나가야 한다고. 회사에서 근무 중이던 남편은 놀라긴 했지만 올 것이 정말 왔구나 하고 한 시간 후에 짐 싸는 걸 도와줄 회사 후배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뉴욕에 온 뒤로 짐가방을 끌고 다니던 우리는 다시 짐가방에 짐을 싸고 길거리로 내팽겨질 신세가 되었다. 그것도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씨가 예고된 지 얼마 안 된 추운 한겨울이었다. 무슨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 있나 싶었다. 의외로 이 상황이 신기한지 남편은 후배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체포당하기 싫으면 어서 짐을 싸라고 열심히 벽장을 비우기 시작했다. 열심히 짐을 싸다 보니 오후 3시가 다 되었고, 그 새 리스 보유자가 도착했다. 흑인 룸메도 맨해튼에서 집으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물었다. 하지만 어젯밤 까지만 해도 자기 때문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던 여자 룸메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 상황을 이미 예측했는지, 우리의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우리를 피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본인의 짐도 아직 이 집에 있는데 같이 쫓겨나게 될 것을 왜 이렇게까지 했나 이해가 안 갔다. 하긴 지금 이 글을 다시 쓰다 보니 그녀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던 듯하다.

짐을 다 싼 우리는 정말 적십자의 ‘구조’를 받았고, 당장 갈 곳이 없는 우리에게 적십자는 도시에서 제공하는 호텔방이라는 데에 우리를 3박 숙박 하주겠다며 주소를 알려줬다. 교통비로는 지하철 카드를 제공하는데 지금 안 가지고 왔으니 비용으로 지불해 주겠다며 선불카드를 줬다. 이 많은 짐을 끌고 어떻게 지하철을 타고 가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우리 커플은 어쩔 수 없이 자비로 우버를 2대 불렀다. 짐을 다 싣을 수 있는 우버 XR 2대가 도착하자 흑인 룸메와 새 룸메는 갑자기 우리 짐을 우버에 옮겨주더니 본인들의 짐도 같이 싣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집에서 서로 음식도 나눠주고 이런저런 도움도 같이 주던 룸메들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우리가 비용을 다 낸다는 게 말이 안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니 우선 우버를 같이 타기로 하고 적십자에서 알려준 호텔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호텔은 브루클린 내에서도 외각에 있는 건물이었고, 노숙자 쉘터가 있는 건물 바로 옆에 있었다. 호텔인지 쉘터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재빨리 짐을 내리고 우선 호텔 안으로 짐을 다 옮겼다. 동네가 동네이니 만큼, 지나가는 사람들이 짐이라도 훔쳐갈까 두려웠다. 급하게 서두르는 사이에 남편 후배는 우버에 휴대폰까지 떨어뜨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각자의 호텔방에 들어온 우리는 이제부터는 룸메들과 분리되어 행동해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이제 같은 집에 있는 상황이 더 이상 아닌데 굳이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이 상황을 해결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계속되어 온 불편함을 생각해 이제 드디어 우리만의 아파트를 구할 타이밍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뉴욕에 온 지 일 년이 안되어 우리는 다시 아파트 헌팅을 하기 시작했다.

왜 뉴욕에서는 항상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아파트 헌팅을 하게 되는 걸까. 그것도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씨에서.라고 생각하고 불평불만을 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었다. 우리는 어쩌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뉴요커들에게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게 신기했다. 어디서 또 이런 경험을 해보겠냐며 우리는 추위도 잊은 채 즐겁게 아파트 헌팅에 나섰다. 그 와중에 출근도 해야 했던 우리 둘은 브루클린 외각에 있는 호텔에서 각자 근무지까지 출근도 하랴 아파트도 찾으랴 정신없는 일주일을 보냈다. 생각보다 쉽게 우리 성에 차는 아파트가 나오지 않아 계속 호텔에 있자니 이제는 자비로 호텔비를 내야 할 날이 돌아왔다. 출근하기에도 멀고 동네도 안 좋았던 호텔에 돈까지 내면서 계속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우리는 브루클린 중심부로 다시 짐을 들고 이동했다.  그 와중에 남편은 지인과 했던 스키장 약속도 캔슬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극적인 상황에서 또 처음이랍시고 뉴욕주 위쪽에 있는 스키장까지 주말 스키를 타러 다녀왔다. 내가 생각해도 우린 최악의 상황에 참 긍정적이었던 것 같다. 지금을 즐겨라, 카르페 디엠. 그 말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주말에 잠시 뉴욕 중심부를 떠나 머리도 식히고 스키도 타고 온 우리는 다시 아파트 헌팅에 나섰다. 이번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점이 있다면 우리가 여태껏 방 한 개를 위해 내던 월세가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고, 그 돈이면 브루클린에서 우리만의 아파트를 구하기에도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산을 1800달러에서 2000달러로 잡고 우리 둘이 살만한 아파트를 찾았다. 이왕이면 가구도 있는 곳이면 좋았다. 뉴욕에 얼마나 오래 머물지, 브루클린에서 얼마나 있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부담 없는 조건은 그 정도였다.

우리에게 맞는 조건의 아파트가 있을 만한 앱이란 앱은 다 뒤지며 아파트를 찾던 나는 사진만으로도 너무 마음에 드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원래 렌트비 2400달러의 아파트에 사는 집주인이 이미 맨해튼으로 이사 해 월새 2000달러에 보증금 200달러로 서블렛을 하는 가구까지 있는 아파트였다. 요즘 인기 있는 미니멀하고 자연채광 잘 드는 아파트에 세트로 가구까지 있다니 그 가격에 믿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미 아파트 서칭에 지친 남편을 끌고 이건 꼭 보러 가야 한다고 했다. 이제 거의 손을 논 남편은 끌려가듯 나에게 붙잡혀 나와 내가 발견한 아파트로 향했다.

우리에게 아파트를 보여주기 위해 맨해튼에서 브루클린으로 건너와야 했던 집주인은 우리와 비슷한 나잇대 같아 보이는 백인 여자였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하얀 리넨 커튼과 하얀 광목 커버로 꾸며진 가구가 돋보이는 원베드룸 아파트는 그녀의 손길이 닿아서인지 너무 완벽해 보였다. 사실 우리만큼이나 아파트를 나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녀는 역으로 우리가 아파트를 좋아할지 엄청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예전 집과는 달리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서블렛까지 관리하던 이 아파트는 우리가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름 원천소득증명서, 은행 잔고 등 까다로운 뉴욕 아파트 심사 절차를 거쳐야 했다. 우리는 뭐든 제출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잘 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집주인과 우리는 희망의 악수를 하고 아파트를 나왔다.

서류를 제출한 지 3일 후, 우리는 아파트를 얻었다. 처음으로 우리만의 생긴 우리만의 공간이었다. 아파트 전체에 소노스라는 스피커 시스템이 내장되어있고, 화장실에 온돌까지 설치돼있던 이 아파트는 작지만 매운 고추처럼 최첨단이었다. 게다가 작은 루프탑까지 구비되어있어서 날씨가 풀리면 친구들과 바비큐 파티도 할 수 있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드디어 내 침대에서 발 뻗고 잘 수 있는 날이 왔다.

 서블렛이라 1년이 채 안 되는 계약기간이 있었던 새 아파트에서 우리는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틈만 나면 친구들을 불러 루프탑에서 바비큐 파티도 하고, 나는 온통 하얗던 거실에서 촬영도 많이 했다. 뉴욕에서 우리끼리의 전성기가 있었다면 아무래도 이 집에서 살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만큼 힘든 일이 있으면 또 밝은 날이 찾아오는 법인가 보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힘든 일이 있으면 그 순간엔 앞이 캄캄하고 지치더라도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해치고 나갔느냐에 따라 다음 스텝이 정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거창한 말은 하긴 쉽고 실천에 옮기기는 어렵다. 지금 이 마지막 문단을 마무리 짓고 있는 나는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어여쁜 아파트에서 앞으로 어떤 스텝을 내디뎌야 할지 또 고민 중이다. 이 와중에 그때 뉴욕에서 긍정적인 마인드로 일을 해결해나갔던 우리의 지난날을 되새겨 보며, 이번에도 또다시 긍정적인 마인드로 내딜 다음 스텝을 준비해본다.   


 *더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the_young_heiress

집에서 쫓겨난 날, 신기한 경험에 신이난 남편. 애같다
첫 아파트, 모든게 좋던 시절
우리방이었던 마스터 베드룸
첫 아파트 전경
음식도 해먹고 친구들과 수다도 떨던 좋은 한때
집에서 쫓겨나오고 난 다음의 풍경
적십자에서 나눠준 현금 카드
내 생일날 시포트 디스트릭트에서 축하중일 때
집에 돌아와 케이크로 한 서프라이즈
남편이 직접 만든 헤이즐넛 쵸코케이크
그 와중에 스키를 타러간 우리
업스테이트 뉴욕에 있는 작은 리조트
집은 없어도 스키는 탄다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새로 발견한 우리만의 보금자리에서
미니멀한 아파트 전경
아파트에서 블로그 촬영중
셀카도 촬영도 많이 많이 찍었던 우리의 뉴욕 최애 아파트
루프탑에서 바베큐 파티를 하던 좋은 한 때
해질녁 아름다운 선셋과 함께 루프탑에서 남편과
남편 생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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