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정착기
2월 결혼식 후 4월 미국 비자 인터뷰에 합격한 우리는 5월 초 드디어 뉴욕에 입성했다. 거의 7개월 동안의 국제미아 시기를 거친 후 새로 트게 된 둥지였다. 8년 전 직장 동료와 거의 쇼핑과 맛집 탐방을 목적으로 여행 왔을 때 이후로 처음 돌아온 뉴욕이었다. 파리에서 비자 인터뷰 합격 후 여권을 받자마자 출국해 저녁 비행기로 입국한 뉴욕 JFK 공항에서는 예상치 않게 한국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많이 들려왔다. 선불 심카드를 사러 간 공항 내 작은 슈퍼마켓에도 익숙한 한국 컵라면이 여러 종류 판매 중이었다. 순간 내가 뉴욕에 내린 건지 인천 공항에 내린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렇게 첫인상부터 뉴욕은 많이 낯설지 않았다.
남편이 직장을 구하기도 했지만 지인도 많이 있어서 오게 된 뉴욕에는 다행히 우리가 아파트를 구할 몇 주 동안 우리를 숙박해줄 분이 있었다. 사실 지인의 지인이어서 초면이었던 그는 거의 밤 11시가 되어야 도착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의 아파트는 가십걸에 나오는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있었는데, 아파트로 향하는 길에 메트로폴리탄 뮤지엄도 보였다. 곧 있을 멧 갈라를 위해 레드 카펫을 한창 설치 중이었다. 순간 전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들과 모델들, 패션 디자이너들이 참석하는 멧 갈라를 난 언제쯤 초대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 왔으니 그 정도 꿈은 꿔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파트에 도착해 12시가 넘도록 지인이 준비한 와인과 치즈 플레이트를 즐기며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지인의 지인이라 그런지 처음 만남인데도 많이 낯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에겐 프랑스어보다 훨씬 익숙한 영어로 하는 대화라 그런지 더욱 자유롭고 편안했다. 당장 다음날부터 출근해야 하는 남편을 생각해 우리는 곧 잠을 청하기로 했다. 침실이 3개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지인은 우리에게 딸 방을 내주었다. 고층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인형과 푸근한 베개가 가득한 지인 딸의 침대에 누우니 창 밖으로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는 뉴욕의 밤하늘이 보였다. 아, 우리가 정말 뉴욕에 왔구나. 몸은 고단했지만 들뜬 기분으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을 하기 위해 샤워를 하고 나갈 준비를 마친 남편을 따라 나도 동네 구경을 하러 집을 나섰다. 어두운 밤길에 우버를 타고 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외에는 많은 걸 보지 못했던 나는, 횡단보도 불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모르는 집 앞 길을 세 번 정도 건너 뮤지엄 근처로 걸어갔다. 뉴욕의 지리를 전혀 몰랐던 나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가는 길에 더 반가운 명소를 발견했다. 바로 센트럴 파크였다. 뉴요커들이 아침마다 조깅을 하고, 프렌즈의 나오는 카페의 이름과 비슷은 하지만 같은 곳은 아닌 그 공원이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공원 안에 들어가 보니, 내가 들어간 입구는 공원 내에서도 조깅 코스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큰 저수지 옆 길이었다. 나는 조깅을 하기에 완벽한 차림은 아니었지만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는 뉴요커들의 페이스에 휘말려 덩달아 같이 뛸 수밖에 없었다. 원래 조깅을 즐겨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너무 열심히 뛰는 뉴요커들 옆에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뛰었다. 좀 뛰다가 역시 조깅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싶어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으로 가고자 공원을 빠져나왔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앞에 도착하니 어젯밤만 해도 한창 설치 중이던 레드 카펫은 이제 버젓이 행사장 입구로 탈바꿈해 있었고, 인스타그램에서나 보던 행사 안내 현수막이 세로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만약 멧 갈라가 뭔지 잘 모르는 독자가 있다면 영화 <오션스 일레븐>의 여배우 버전인 <오션스 에잇>을 보고 참고하길 바란다. 매년 5월 첫 재주 월요일에 열리는 멧 갈라는 일 년 내내 열리는 레드 카펫 행사 중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행사였다. 날짜를 따져보니 오늘 밤이 행사 당일이었다. 오늘 밤에 행사가 열릴 예정이라는 뜻은 지금 이 순간 이 주변의 호텔이란 호텔에는 행사 참석을 위해 아침부터 헤어 메이컵을 하고 있을 전 세계 셀레브리티들이 다 모여있다는 뜻이었다. 나야 뭐 또 인스타그램 피드로나 볼 행사였지만 내가 그런 장소 바로 옆에 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가슴 떨렸다. 내가 우상시하는 키아라 페라그니는 블로거로서 일찌감치 멧 갈라에 캘빈 클라인 모델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나도 뉴욕에서 열심히 블로거로 활동을 하면 내년에는 멧 갈라에 초청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번에는 망치지 않고 잘할 수 있을까? 비어있는 레드카펫을 보며 뉴욕에 온 만큼 나도 다시 한번 최선을 다 해 보겠다고 다짐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리가 입국 전 받은 비자의 종류는 남편이 받은 투자자 피고용인 비자였다. 프랑스인이 51% 이상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프랑스인 투자법인에 셰프로 고용된 남편은 소유주와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투자자 피고용인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이 비자의 좋은 점은 부인인 나도 같은 비자로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취업도 어렵지만 일할 수 있는 비자나 영주권을 취득하는 게 더욱더 어려운 것으로 유명한 미국에서 가질 수 있는 나름 좋은 비자 여건이었다.
미국에서 한 번도 취업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나름 언어의 장벽도 없고 비자의 장벽도 없는 나는 내가 꿈에만 그리던 패션업계 직장을 충분히 구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래서 취업할 때 꼭 필요한 워크 퍼밋 카드가 나올 때까지 나는 열심히 미래의 직장을 찾아보았다. 세계적인 패션 캐피털의 하나인만큼 뉴욕에는 여러 미국 브랜드의 본사 및 고급 백화점이 있었다. 그중 어딘가에는 나를 위한 자리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열심히 링크드인과 리크루팅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뉴욕에는 예전 직장 생활 때 만났던 지인들 등 나름 업계에 아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내 힘으로 직업을 구하지 못할 경우 연락하려고 아껴둔 비상 연락망이 몇 개 있었다. 뉴욕에 오기 직전에 일했던 D사의 북미주 사무실, 최근 부도가 나긴 했지만 뉴욕에서 고급 백화점 중 하나로 명성을 날렸던 B백화점의 여성복 바이어 팀장, 미국 유명 화장품 그룹 E사의 전 한국 지사장 등 만약을 대비해 연락을 취하려고 생각해 둔 인물이 몇몇 있었다. 리크루팅 사이트를 뒤지다 보니 지인들이 있는 회사에도 자리가 난 게 많이 보였다. 한국에서 첫 취업을 할 당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힘으로 직접 해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나였지만, 업계에서 있다 보니 지인이 있다는 것도 나름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나서부터는 최소 추천서라도 받을 수 있으면 감지덕지하게 됐다. 그래서 리크루팅 사이트에 지원을 한 후 아예 지인들에게 안부 이메일을 보내 뉴욕에 와 있으니 추천서를 써줄 수 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살기 바쁜 뉴요커들은 사실적이고 단도직입적인 어투를 좋아하지 않던가?
아무래도 내 이메일이 너무 사실적이었나 보다. 한국에서 다녔던 D사는 아시아 태평양 사무실 소속이어서 북미 사무실과는 관계가 없다고 연락이 왔고, B사 팀장은 몇 주째 답변이 없었으며, E사 전 한국 지사장은 답변은 왔으나 추천서를 써줄 순 없을 것 같다고 행운을 빈다고 연락이 왔다.
나름 지인이 있다고 기대를 걸고 있다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나는 멋져 보이는 뉴욕에서 커리어를 쌓는 게 정말 쉽지만은 않겠구나 싶었다. 순간 미국을 간다니까 D사 동료들이 나에게 해주던 말이 떠올랐다. 하긴 학교까지 미국에서 나오고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한국 학사 졸업을 한 내가 주름을 잡을 수 없겠지. 게다가 5월에 도착해 우편으로 신청한 워크 퍼밋이 우편으로 배달되어 올 때까지 4개월은 기다려야 했다. 주변에 물어보니 그것보다 빨리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4개월 동안 이 꿈만 같은 뉴욕에서 또 우아한 백조가 되어야 한다니. 사실 인도네시아 얘기를 쓸 때 언급하지 않았지만 내가 만족해했던 첫 명품 회사에 들어가기까지 불안한 4개월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심지어 남편과 결혼 전이었기 때문에 입사할 회사에서 체류 및 취업 비자도 직접 스폰서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직장 인터뷰가 거의 비자 구걸에 가까웠다. 지금은 나름 결혼도 했고, 다행히 남편이 받은 비자가 나도 취업이 가능한 비자였기 때문에 비자 구걸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능력이 부족한 건지, 학력이 부족한 건지, 경력이 부족한 건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취업은 그다지 쉽지 않아 보였고, 인도네시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안한 이민 초반은 또 반복되었다. 이런 걸 보고 데자뷔라고 하는 것일까.
지인들로부터 낙동강 오리가 되고 나서, 내 머릿속에 A리스트로 있던 미국 회사들에서도 아무런 연락도 없자 그때쯤 뉴욕에 진출해 있는 한국 회사로 마음이 돌려지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꿈에 그리던 블로거를 계속 추진하는 것도 당연한 옵션 중 하나였지만, 여태까지 블로거로 아무런 수입을 일으켜본 적이 없던 나는 우선 직장은 잡고 보자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마케팅, 홍보가 다른 나라보다 더욱 활발했던 미국에서는 직업으로 소셜미디어 담당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직업을 서칭 하기 시작했다.
직장을 찾아야 함과 동시에 바쁜 남편 대신 우리가 살 아파트도 찾아야 했던 나는, 뉴요커들이 항상 찾는다는 두 가지를 찾는 영락없는 뉴요커가 되었다. 직접 아파트에 투자를 하지 않는 이상은 보통 1년 단위로 계약해 월세로 아파트를 렌트하는 게 일반적인 뉴요커들은, 월세와 물가가 워낙 비싸다 보니 이사를 자주 다니던지, 월급을 더 많이 주는 직장을 찾아 옮겨 다녔다. 아직 아파트도 없고 직장도 없던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잘 알지도 못하는 뉴욕을 발품을 팔며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처음부터 맨해튼에 월세를 내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웠던 우리는 브루클린 쪽에서 집을 구할 생각이었다. 그중 맘에 들었던 동네는 한창 브루클린 내에서도 뜨고 있던 윌리엄스버그였다. 지금도 정통 유태인들이 자신들만의 작은 마을을 꾸리고 사는 걸로 유명한 윌리엄스버그는 왕년에는 각종 아티스트들이 넓고 값싼 로프트에서 살아 그런지한 클럽이나 레스토랑이 많이 들어서며 힙한 곳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벽화가 유명한 윌리엄스버그는 힙한 곳으로 자리 잡고 나서부터 값비싼 아파트 개발이 늘어나고 부동산값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올라 지금은 더 이상 값싼 로프트를 찾기 힘들어졌다. 대신 힙한 상점들과 카페, 호텔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강 건너 맨해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지하철 L라인을 타면 금방 건널 수 있는 힙한 주거지역으로 돌변했다. 지역마다 월세 시세가 어떤지 잘 알지 못했던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너무 살고 싶었던 윌리엄스버그에 집도 볼 겸 구경도 할 겸 자주 놀러 가곤 했었다. 아파트 한 채를 렌트할 월세가 부담됐던 우리는 초반에는 아파트 내에서 룸메를 구하는 광고를 보고 방을 구하러 다녔다. 하지만 싱글에 비해 커플은 룸메로 들이는 경우가 드물었고, 광고에 커플이 가능하다고 쓰여있지 않는 이상은 연락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겨우 커플이 가능하다고 하는 경우에는 큰 조건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보러 갔다. 그렇게 아파트 렌털 사이트를 뒤지던 어느 날, 윌리엄스버그에서 우리 예산안에 드는 방을 발견했다. 너무 신이 난 나는 남편이 퇴근할 시간에 맞춰 함께 보러 가기로 하고 아파트 주인에게 연락을 취해 시간 약속을 했다.
앞서 말한 값비싼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는 윌리엄스버그도 예전에는 브루클린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벽돌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주택가였다. 내가 찾은 방은 아직 개조를 하지 않은 오래된 형태의 이층 집에 있는 방들 중 하나였다.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온듯한 나무판자로 만든 스타일의 집은 방을 보기 전부터 너무 오래되어 쓰러질 것처럼 생겼었다. 게다가 권투 선수인 남자가 룸메이트라는 집주인의 말에 왠지 같은 아파트에 살기 껄끄러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설명만으로 맘속으로 탈락시킨 방을 이미 갔으니 우선 보러 2층으로 올라갔다. 나름 뒷마당이 내다 보이는 안방 같아 보였다. 그래도 방에 빛이 든다는 건 좋다고 생각해 바깥 경치를 한 번 볼까 하고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무판자로 되어있던 바닥이 삐그덕 삐그덕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집 이러다 진짜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열심히 설명하며 방을 보여준 집주인은 우리 속내는 모르고 열심히 설명을 해댔고, 네고에 능한 남편은 우선 렌트를 할 것처럼 행세하며 열심히 월세를 깎았다. 방에 관심이 있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한 집주인은 좋은 가격에 방을 주겠다고 인심을 썼고, 우리는 동네를 좀 둘러보고 생각해 본 다음 연락하겠다고 하고 우선 집을 나왔다.
사실 난 아무리 싸도 그런 집에 살고 싶지 않았다. 속으로는 뉴욕까지 왔는데 우리의 현실은 이렇게 상대적으로 가난하다는 게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직 집을 많이 안 봤으니 내가 발품을 좀 더 팔아서라도 저 집보다는 튼튼하고 괜찮은 집을 찾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윌리엄스버그에 온 김에 동네 구경에 나선 우리는 어디가 메인 길인지도 모른 채 열심히 골목 구석구석을 걷기 시작했다. 주거지역이 대부분인 윌리엄스버그는 상점이나 카페도 주택 사이사이에 숨어 있었다. 그중 개발이 많이 된 길에는 공사를 막 마친 빈 상점들이 즐비해있었다. 마치 한국의 가로수길의 진화 과정을 보는듯한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이 상점들엔 어떤 브랜드가 들어설 가 궁금해하며 다음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걷고 있는 길 거의 끝에 다 달았을 때쯤, 새로 들어설 모양인지 멀리서부터 한 매장 전면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열심히 칠을 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마치 벽화를 그리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듯, 길을 가다 이런 풍경을 보면 항상 신기했던 나는 사다리에 올라있는 사람이 무슨 칠을 하고 있는지 열심히 쳐다봤다. 짧은 흑발이었던 그 사람을 잘 보기 위해 좀 더 가까이 걸어가 보았다. 멀리 서는 머리에 가려서 안 보이던 가게 간판이 가까이 가니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색 페인트칠을 한 매장 전면에 하얀색 페인트로 칠하고 있던 간판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A브랜드였다. 순간 너무 반가운 나머지 높은 사다리 위에 올라가서 페인트칠을 하고 있던 사람에게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 A브랜드 생기나요?”
간판까지 칠하고 있는 걸 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너무 반가운 나머지 당연히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뒤돌아 보니 짧은 흑발이었지만 여자였던 그녀는 7월 말에 오픈 예정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명동에 처음으로 매장을 연 뒤 큰 히트를 치고 이제는 서울 전역에 대형 매장들을 여러 개 오픈한 스트리트웨어 편집매장인 A브랜드는 알고 보니 홍콩과 태국을 시작으로 해외 진출을 찬찬히 해오고 있었다. 나름 5년 전부터 준비했다는 미국 진출이 드디어 추진되어,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윌리엄스버그에 집을 보러 가던 그 날 하필 간판을 칠하고 있었던 차였다. 순간 여기서 일할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높은 사다리에 올라가 있는 게 엄청 위험했음에도 난 참 생각도 없이 궁금한걸 다 물어봤던 것 같다. 그녀는 매장 쇼윈도에 붙어있는 종이를 가리키며 저기 있는 이메일로 문의해 보라고 했다. 너무 감사한 마음에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하고, 수고하시라고 말한 후 쇼윈도에 붙어 있는 공고를 사진 찍고 그 길을 빠져나왔다.
사실 그녀가 가리킨 공고에는 매장 매니저를 찾고 있었다. 판매직보다는 마케팅이나 홍보에 더 관심이 있었던 나는, 혹시나 해서 공고에 있는 이메일로 내 이력서와 함께 관심분야를 써서 보냈다. 한국에서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에서 일해 본 적은 없었지만, 패션업계에서 일했다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한국에 본사가 있다는 것은 분명 현지인보다는 한국인과 소통하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래저래 나름 자신감이 붙은 나는 소셜미디어에 관심이 많고 혹 새로운 매장을 홍보할 마케팅 및 홍보담당자를 찾는다면 내가 적임자라고 열심히 표명했다. 그리고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며 하지 않던 기도도 했다.
며칠이 지나고 내 미국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내 이메일을 받은 현지 담당자로, A브랜드 미국 오픈을 가능케 한 현지 대표였다. 대표급임에도 불구하고 젊고 싹싹한 어투로 말하던 그는 내 이력서를 잘 받았으며 마침 매장 오픈에 맞춰 한국에서 브랜드 대표가 와있으니 면접으로 보러 오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연히 가겠다고 했고, 그렇게 뉴욕에서의 첫 면접 날짜가 정해졌다. 너무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게다가 내가 생각한 보직으로 원하는 업계에서 일할 수 있게 될 수도 있다는 게 너무 설레었다. 며칠이 지나 면접 날짜가 다가왔고, 명품 업계에서 일하는 복장에만 익숙하던 나는 스트리트웨어 브랜드 면접에는 뭘 입고 가야 하나 한참 고민을 했다. 좀 노출이 있더라도 프로페셔널해 보이고 나만의 스타일이 있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면접에는 피해야 할 수도 있을 벨벳 민소매 탑에 핫핑크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네이비 와이드 팬츠를 입고 분홍색 테리 샤넬백을 매고 깔끔한 업스타일로 윌리엄스버그로 향했다.
매장 오픈날이었던 면접날, 면접 장소인 매장에 도착하자 엄청 큰 소리의 음악소리가 나를 반겼다. 마치 패션 행사장을 연상시키는 매장은 길게 뻥 뚫린 로프트에 원색의 미니멀한 가구 디자인이 돋보이는 힙한 공간이었다. 거기에 A브랜드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큰 소리의 음악 소리가 나오니 마치 명동 플래그십 매장에 와 있는 듯했다. 한국에서 명품업계에 일했어도 옷은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자주 구매했던 나는, 신진 디자이너의 컬렉션을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A브랜드에 자주 드나들곤 했었다. 디자인과 퀄리티에 비해 명품에 비하면 한없이 저렴한 가격이었던 A브랜드의 상품들은 부담 없이 시즌별로 사 입을 수 있었다. 아마도 한국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의 그런 장점을 살려 미국 시장을 겨냥하고자 만발의 준비를 하고 진출한 듯했다. 애초에 통보받은 면접시간에 맞춰 도착했으나 한국 대표의 일정에 맞춰 조금 늦춰진 면접 시간을 이용해 나는 매장을 둘러봤다. 내가 모르는 브랜드들도 많았기에 재빨리 매장을 돌면서 브랜드 이름을 눈에 익히고자 했다. 족히 천 제곱미터는 되는 큰 매장을 열심히 둘러보다 보니 2층으로 가는 계단이 눈에 보였다. 매장 앞쪽에서는 보이지 않던 이 공간은 매장 안을 돌다 보면 눈에 들어왔다. 보통 한국에서도 건물을 통째로 매장으로 꾸미는 A브랜드는 미국 매장도 2층까지 있는 로프트 전체를 개조했었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유리로 된 천장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이 가득 비치는 매장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까만 매장 전면과는 달리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던 계단은 소셜미디어를 의식해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내가 보기에는 포토존으로 딱이었다. 순간 여기서 멋있는 한 컷을 찍어서 면접 볼 때 소셜 미디어 캠페인으로 추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계단을 올라가고자 하는 두 명의 힙한 여자 고객이 보였다. 혼자 있을 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수법으로 나는 상대방에서 사진을 먼저 찍어주길 권하곤 했다. 그럼 자연스럽게 상대방도 사진을 찍어주게 돼있다. 사진을 안 찍고 지나가기에는 자연광이 너무 좋았던 계단에서 우린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서로를 태그해 주기 위해 인스타그램까지 교환했다. 그들이 찍어준 내 사진은 그렇게 하나의 걸짝이 되었다.
멋진 소셜 미디어 캠페인까지 생각해 내고 나니 드디어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인 현지 대표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정말 젊고 스타일이 남달랐던 그는 면접을 하기 위해 같은 길에 있는 작은 카페로 나를 데리고 갔다. 프렌치 파티시에가 운영하던 작은 카페 안에는 시크한 한국 대표가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자매가 설립한 A브랜드는 언니인 소위 ‘큰 대표’와 동생인 ‘작은 대표’ 둘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나를 면접 보러 온 사람은 작은 대표였다. 내 이력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요구한 그녀는 마침 내가 지원한 마케팅, 홍보에 맞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바이럴 마케팅으로 홍보를 할 수 있는 인하우스 마케팅, 홍보 담당을 찾고 있었다. 마침 내가 소셜미디어에 관심도 많고 개인적으로 블로거를 해 본거라 특정 브랜드를 위해 해 본 적은 없지만 한 브랜드를 위해 비슷한 노력을 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그녀는 나에게 다음 질문을 심각하게 했다.
“미국은 다들 투잡을 뛰던데, 윤혜씨도 그런가요? 우린 그런 사람은 곤란한데..”
그녀의 다음 질문에 나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미 이런 질문을 걱정스럽게 한다는 뜻은 나를 고용할 의도가 있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도 현명히 연봉만 맞는다면 투잡 뛸 필요가 있겠냐고 답변하고, 그 자리에서 나름의 연봉 협상을 했다. 아직 워크 퍼밋이 나오기 전이었던 나는 2개월간 한국 A브랜드와 계약직으로 근무를 하고, 워크 퍼밋이 나오고 나서부터는 현지 채용으로 전환하면 안 되겠냐고 제안했다. 사실 한국 회사가 아니면 말을 꺼내기도 힘든 주제였다. 하지만 적어도 채용 의도가 있는 이상은 최대한 채용이 가능한 방법을 제안하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적합해 보였다. 한국 대표는 우선 본사에 가서 논의해 보겠다고 답변하고, 우리는 아담한 카페에서 면접을 마치고 다 같이 매장으로 향했다.
한국 대표는 매장 1층을 같이 돌면서 면접의 마지막 과정으로 소셜 미디어 아이디어를 공유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녀와 같이 매장 중간에 있는 계단에 근처에 이르자, 나는 아까 생각해놓은 소셜미디어 캠페인을 제안하면 이 위치가 최적일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고 슬쩍 아까 찍어놓은 사진을 현지 대표에게 보여줬다.
“뭐야, 완전 모델 샷 아니에요, 이거? 사진 너무 좋네”
그는 자연광 충만한 계단에서 연출한 내 사진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사진이 소통의 대부분인 인스타그램은 캡션보다 감각 있는 비주얼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걸 잘 아는 현지 대표는 내 사진과 그렇게 연출한 감각에 흡족한 표정이었다. 요구 사항은 아니었지만 내 감각을 보여줘서 합격률을 높여보고자 한 내 전략이 나름 성공한 듯 보였다.
집에 돌아와 머리를 짜내 소셜 미디어와 현지 홍보 전략을 정리한 후 나는 현지 대표에게 이메일로 내 프레젠테이션을 공유했다. 한국 대표와 현지 대표의 바람을 아직 다 알지 못했던 나는 미국 시장에 맞을 것 같은 전략을 고안해내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인플루언서를 통해 간접 브랜드 광고를 하는 게 대세인 패션업계에는 특히나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제품 협찬이 활발했다. 하지만 신규 브랜드의 경우 제품 협찬을 하는 비용을 잘 조절해야 하는 단점도 있었다. 그래서 보통 인하우스로 촬영을 많이 하고, 꼭 인플루언서뿐만이 아닌 직원, 고객 아니면 제품 자체로 사진을 찍어 활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저런 전략을 버무려서 A브랜드 론칭에 맞게 제안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며칠 후 현지 대표에게 또 전화가 왔다. 이 분은 이메일을 받고 직접 전화하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신가 보다. 그는 내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몇 가지 수정 방안을 제시했다. 순간 그럼 면접에서 떨어진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뭐라고 대답할지 헷갈렸다. 잠시 망설이며 침묵이 흐르자 그는 본사와 얘기해 면접 때 내가 제안한 대로 처음엔 한국 본사와 계약직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언제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와우, 그럼 면접은 우선 합격이 된 건가? 나는 당장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지금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는 매장업무와 홍보업무를 병행해야 할 것 같다며 내가 직접 업무를 해낼 수 있는 스케줄을 짜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주에 정식으로 계약서를 사인하러 오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와우!
그렇게 면접을 마무리 짓고 드디어 뉴욕에서 첫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업계에서 원하는 보직으로 말이다. 따지고 보면 소셜 미디어에 관심을 갖고 블로거가 된 후 수입을 갖게 된 건 처음이었다. 블로거로서 성공하는 거랑은 조금 다른 의미 었지만, 그래도 패션 바이어 었던 나에겐 업무 전환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멧 갈라에 초청받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적어도 한 걸음은 진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틈틈이 보러 다니던 집도 마무리가 되었다. 윌리엄스버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4개의 방이 있는 이층 집이었는데 역시 유태인이 리스 보유자였지만 나름 힙한 DJ여서 말이 좀 통했다. 화장실이 따로 있는 마스터 베드룸을 비싼 가격에 내놓은 그의 광고를 보고 찾아간 집은 에어비앤비를 병행해서 그런지 가구 구성이나 집 내부가 안락해 보였다. 룸메이트와 집을 같이 쓸 경우 사실 화장실까지 같이 쓰는 게 가장 걸렸던 나는 마스터 베드룸에 화장실이 따로 있다는 점이 가장 맘에 들어서 이 집을 찾아갔었다. 집안에서 나름 가장 큰 방이었던 마스터 베드룸에는 퀸사이즈 침대와 벽장, 그리고 책상과 책장까지 가구가 완비되어있었다. 뉴욕에서 아파트를 찾으러 다니기 전까지는 한 번도 내 인생의 큰 고민이 되지 않았던 세탁기도 우리 방 바로 옆에 있었다. 뉴욕에는 아무리 비싼 건물이어도 오래된 건물에는 수도시설이 완비되지 않은 경우 건물 안이나 집안에 세탁기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부러 세탁기가 건물 안이나 집안에 있는지 확인을 해 봐야 했다. 이 정도면 우리 수준엔 완벽하다고 생각한 나는 얼른 이 방을 확보해야겠다 싶었다. 방 하나를 보증금 1개월치, 월세 1500달러에 내놨던 그는 갑자기 우리가 커플이라고 하자 500달러를 더 내야 한다고 값을 올려 불렀다. 나는 순간 첫자리 숫자가 2로 변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해 1600달러로 낮춰 불렀다.
“알겠어, 1800불에 하고 대신 보증금을 반으로 깎아줄게.”
“딜!”
“넌 근데 어느 나라 사람이야?”
“한국.”
“역시..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까먹지 말고 계약서나 보내줘.”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를 쏴 줬다. 그렇게 나는 한 주안에 몇 달 동안 찾아다니던 두 개의 계약서를 사인했다. 하나는 집에 하나는 좝에. 이 정도 했으면 이제 진정한 뉴요커가 된 거 아닌가. 앞으로 열심히 착하게 살아야지 하고 다짐하며 리스 보유자와 새로운 집 키를 카피하러 집 옆 슈퍼로 향했다.
*더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the_young_hei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