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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yverse Oct 24. 2020

겨울 왕국

프렌치 엔딩, 1막의 결말

내년이면 우리도 벌써 결혼 3주년이다. 사실 우리는 사귀는 동안 결혼이나 결혼식에 대해 큰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3년 동안, 결혼에 대해 가장 질문을 많이 했던 건 우리가 아닌 양가 부모님이었다. 우리는 때가 되면 스스로 결정할 것을 부모님이 걱정해주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막말로 아직 만난 지 3년 차인데 결혼을 하기 싫으면 헤어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얘기만 나오면 요리조리 잘 피해 가던 결혼 얘기가, 이제는 양가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프러포즈를 했으니 결혼은 해야 할 텐데, 서로 다른 나라에 살면서 결혼은 어떻게 하고, 결혼식 준비는 어떻게 하냐며 부모님들이 더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나 남편이나 한국식 결혼식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왕 할 거면 경치 좋은 남편 시댁 근처에서 프랑스식 결혼식을 하는 게 더 흥미로워 보였다. 게다가 남편 동네에는 베르사유궁 다음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큰 성인 샹보르 성이 있었다. 성에서 결혼식을 하거나 피로연을 하는 건 꿈만 같고 비용도 엄청 많이 들었지만, 성 안에 있으면서 규모는 훨씬 작은 채플에서는 누구든 신청만 하면 아담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시댁은 프랑스 현지에서 나름 우리 가족을 맞을 준비와 함께 간단한 결혼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대한민국 여권으로 쉔겐 지역에 관광목적으로 무비자 입국을 했을 경우 180일이라는 기간 내에 90일까지 만을 연속으로 머물 수 있다. 8월 초에 인도네시아에서 프랑스로 건너가 90일을 연속으로 유럽에 있다가 11월 초에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그다음 해 2월이 돼야 다시 쉔겐 지역에 재입국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댁에서는 2월 이후로 우선 시청 결혼 날짜를 신청하기로 했다.
 
 “우리 결혼식을 밸런타인데이로 할까?”
 
남편은 로맨틱한 아이디어인 마냥 제안했다. 첫 밸런타인 때 많은 추억을 만들었던 게 생각이 났고 남편의 아이디어도 나쁘진 않았으나 세상의 모든 커플이 축하하는 날을 우리 결혼기념일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전에 가능한 날짜인 2월 10일을 택했고, 그렇게 시청 결혼 날짜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달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같은 날 샹보르 성 채플에 날짜를 배정받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편은 시청에서 간단한 서약만 하고 결혼식은 나중에 뉴욕에 가서 다시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해외 드라마를 보면 커플 둘이 시청에 가서 법적으로 결혼 서약을 하고, 그 후에 친구나 가족들과 뒤풀이를 하는 게 소위 로맨틱한 결혼인 것처럼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한국 같으면 거창한 결혼식 이후 따로 서류처리만 할 혼인신고를 해외에서는 실제 결혼식으로 대체하기도 하는가 보다. 막상 내가 그런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남편과 둘이서 프랑스 시청에 가서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로 서약이나 하고 끝내야 한다면, 아무리 미래에 결혼식을 기약한다고 해도 첫 결혼인데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았다. 혼전 동거를 하고 풍습을 타파하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나일지언정 사랑을 믿는 로맨티시스트인 나는 결혼은 아무 느낌 없는 서류 처리로 적당히 끝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 성격상 미래로 미루겠다는 말은 실제로 현실화될지 안 될지 불분명하다는 뜻인 것을 나나 남편 식구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왕 시청에서 서약할 거 식구들과 다 같이 모여서 서약식을 하고 피로연을 해서 간단하게라도 결혼식을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시아버지가 역제안을 하셨다. 어른 말이라고 다 공경하지 않는 프랑스에서도 이럴 땐 어른의 말이 좀 필요했다. 남편은 본인도 뾰족한 수가 없는 만큼 간단한 결혼식으로 치르는 데에 동의했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시아버지의 선견지명으로 다행히 소소하게나마 가까운 가족들만 부르는 결혼식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래도 결혼식이라는 본식은 생략하는 만큼, 양가 가족이 만날 준비와 나의 경우 결혼 서약 때 입을 드레스 말고는 크게 준비할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하나하나 직접 챙기기 시작한 결혼 준비는 결국 우리가 다 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가끔 결혼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이래저래 후회가 많이 든다. 피로연 드레스를 하나 더 준비할걸, 머리도 내가 직접 한다고 고집부리지 말고 미용실에 가서 할걸, 사진사를 다른 사람으로 부를걸 등 눈에 거슬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D사에서 매일같이 드레스를 보고 지내던 나는 자연스레 내 웨딩드레스도 그 당시 출시되었던 스타일의 드레스이길 바랬다. 하지만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들어 가격이 천만 원을 훌쩍 넘는 D사의 드레스는 소소한 내 결혼을 위해 구매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코르셋과 같은 심플한 상체 디자인에 넓게 퍼지는 롱스커트 형식의 하체가 특징이었던 드레스는 당시 D사에서 출시 후 인기몰이를 해 타사 드레스 디자인에도 유용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비슷한 스타일의 드레스를 미국의 아웃렛 웹사이트에서 저렴하게 사고, 대신 D사의 시그니처 재킷을 빈티지샵에서 오프 화이트로 찾아 같이 스타일링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의 유명한 웨딩드레스 메이커인 M브랜드에서 70프로 이상 세일하는 드레스를 찾아 미국에 사는 사촌이 한국에 들어오는 길에 공수해다 주었고, 온라인 빈티지샵으로 유명한 V사이트에서 D브랜드의 크림색 재킷을 찾아 주문했다. 다 합쳐도 D사 드레스의 반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매일같이 온라인 사이트를 뒤져서 찾은 두 아이템을 가지고 완성한 내 스타일이 그 당시엔 너무나도 맘에 들었으나, 지금 다시 보면 굳이 D사의 디자인을 고수하지 않고도 나에게 더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곤 한다. 그러고 보면 그 당시 급한 마음에 내 결혼 드레스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조차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결혼하는 남편에게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건지, 결혼을 하는 내가 아름답게 느끼고 싶은 건지, 최대한 내가 돋보였으면 하는 건지, 지나고 나니 정말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채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언제 다시 이런 드레스를 입을 일이 생길까 싶다. 혹시 아직 결혼 전인 여성이 내 글을 읽고 있다면, 웨딩드레스의 스타일뿐 아닌 의미에 대해 꼭 한 번 생각해보고 드레스 쇼핑을 가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한국에서 다 같이 프랑스로 건너갈 계획을 한 우리 가족은 틈틈이 시댁 식구 선물도 준비했다. 그래서 나는 쉬는 날이면 엄마랑 서울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녔다. 그중 가장 시간을 많이 쏟았던 건 바로 맞춤 한복이었다. 한국 결혼식이 아니기에 폐백을 따로 준비하지 않은 우리 커플은 따로 한복을 입을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한국 결혼식에서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신랑 신부 입장 전에 촛불을 밝히는 두 어머니를 생각하며, 엄마는 시어머니와 함께 맞춤 한복을 입고 싶어 했다. 엄마는 나만큼이나 엄마도 딸의 결혼식에 친정 엄마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엄마는 가족이 다 같이 프랑스에 가 드디어 시댁 식구를 만난다는 것에도 들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드디어 정식으로 결혼을 한다는 것 자체로 그동안의 걱정을 말끔히 씻어버리는 듯했다. 굳이 집고 넘어가자면 우리가 양가 부모님을 생각해 결혼을 결심한 건 절대 아녔지만, 그동안 우리의 고난과 역경을 잘 아는 부모님들에게 있어 우리의 결혼은 당연히 축하할만한 일이었다. 이런 소소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우리는 양가 부모님 그리고 남편의 형제들만 불러서 축하하기로 했다.
 
반면 12월 초에 D사에 입사한 나는 채 3개월도 안돼서 결혼 휴가를 신청해야 했다. 가족과 같이 갈 예정인 이상 남편과 허니문을 가기에는 애매한 상황인 데다가 휴가 날짜도 충분히 받지 못할 것을 알기에, 우리는 결혼식을 치르고 다 같이 파리에서 며칠 놀다가 나는 다시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렇게 해도 족히 10일은 휴가를 내야 했다. 출산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이사님에게 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프랑가 본사인 만큼 프랑스 출장이 잦았던 우리 회사 사람들은, 프랑스로 결혼식을 올리러 가는 것을 크게 되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마침 구정 연휴까지 길게 끼어있던 덕에 총합 열흘 정도의 결혼 휴가를 승인받을 수 있었고, 나름 회사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나는 가족과 선물 보따리를 들고 프랑스로 향했다.
 
 매일매일 영상 통화를 했지만 서로 안 본 지 3개월이 넘어가는 남편을 오랜만에 만난다는 게 새삼 어색했다. 항상 엄청난 양의 짐을 가지고 프랑스에 갔던 나를 떠올리며 우리를 마중 나온 시아버지는 남편과 같이 봉고차를 렌털해와 공항 출국장에서 와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3개월 전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심정으로 나를 공항에 데려다주던 두 남자가, 이제는 결혼식을 위해 나와 우리 가족을 데리러 공항에 와 있다니. 파리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동네에 있던 시댁 집 근처에서 결혼을 할 예정이라, 잘 알고 지내던 파리지앵 포토그래퍼를 섭외하지 못한 나는 동행한 남동생에게 비디오그래퍼 역할을 맡겼다. 출국장을 나가기 전 동생에게 남편을 찾아 뛰어나가는 나를 찍어달라고 부탁하고는 출국장을 뛰쳐나가며 남편을 찾았다. 저 멀리 얼굴에 보기 좋게 살이 오른 남편이 온화한 미소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을 찾은 순간 나는 큰 내 덩치를 끌고 뛰어가 살짝 품에 안겼다. 몇 달째 상상만 했던 순간이었지만, 3개월의 공백이 생각보다 컸나 보다. 남편을 보자 만감이 교차해 눈물이 났지만,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나름 어색함이 감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됐다니. 이태리 여행을 같이 했던 베프와 대학교 때 합동 힙합 웨딩을 하자고 장난 삼아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만큼 힙합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형식적인 것이 싫었던 우리 둘은,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우리 식으로 하자는 의미에서 그런 농담을 했었다. 거의 십오 년이 지난 지금, 합동 웨딩은커녕 친구를 초대하지도 않을 정도로 소규모 웨딩을 하게 되었지만 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우리만의 프라이빗 웨딩을 하는데 '성공'했다.
 
 결혼식 이틀 전에 도착한 프랑스는 한창 추운 겨울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며칠째 추운 날씨가 계속되더니 우리 결혼식 전날에는 심지어 폭설이 내려 동네를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 야외 결혼식을 하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우리는 그래도 결혼식 전날까지 눈을 맞으며 열심히 동네 구경을 하러 다녔다. 그리고 그다음 날, 드디어 식 당일날이 되었다. 어제까지 내리던 폭설 위로 밝은 햇살이 쨍긋 솟아올랐다. 그리고 쨍쨍 비추는 겨울 햇살이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을 더욱 반짝반짝 비춰주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런 행운의 날씨에 모두들 찬사를 내뿜었다. 우리가 우리 뜻대로 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자연의 섭리였다. 그날 우리가 경험한 자연의 섭리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이렇게 돕는 것인가.
 
 밸런타인데이가 아닌 우리만의 웨딩 데이를 잡은 덕에 우리는 아름다운 날씨를 배경으로 꿈만 같은 웨딩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시댁에 놀러 가 있을 때마다 자전거를 타고 놀러 갔던 샹보르 성 앞에서, 우리는 영원히 기억에 남을 웨딩샷을 찍었다. 비록 채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우리에게 추억의 장소인 샹보르 성 앞에서 축복받은 날씨와 함께 아름다운 사진을 남길 수 있다는 건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남편과 나는 추위도 잊은 채, 오늘의 느낌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서로를 바라보았고, 아기 같은 얼굴이 남아있는 남편의 활짝 웃는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해 보였다. 깨지는 영상 너머 확신이 없는 얼굴로 눈물의 프러포즈를 할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나는 이렇게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우리의 프렌치 엔딩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했다.
 
 비옥한 토양을 둘러싼 숲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시댁 집 지역에는 옛날부터 성이 많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저녁 식사 장소로 우리는 미슐랭 가이드에 오른 자그마한 성의 레스토랑에 큰 다이닝룸을 확보할 수 있었다. D사에서 자주 보던 베르사유 궁전의 디테일과 같은 다이닝 룸을 예약한 우리는 20명이 채 안 되는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 자리를 피로연처럼 진행했다.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온 나는 사위에게 줄 편지를 쓴 아빠의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읽는 법을 가르쳐 줄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저녁 자리에서 아빠는 사위에게 프랑스어로 본인이 직접 쓴 편지를 읽어주었다. 평상시에 우리 부모님과 영상 통화만 하던 남편은, 자신의 언어로 편지를  읽는 아빠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왜 그렇게 남이 우는 모습은 감동적 이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남편의 눈물이 전염이 되어 우리는 모두 행복의 눈물을 흘렸고, 너무 맛있었던 우리의 저녁 자리는 동시에 감동의 도가니가 되었다.
 
 한국에 있으면서 나도 남편을 위해 준비한 게 있었는데, 바로 내가 쓴 편지에 스토리를 입힌 영상 편지였다. 한국 결혼식에서 항상 인상에 남는 게 있었다면, 바로 식전에 틀어주는 신랑 신부에 대한 영상이었다. 대부분 결혼사진작가가 만드는 이 영상은 부부의 어린 시절 사진부터 최근 사진까지 짜깁기를 한 해설 없는 슬라이드 쇼였다. 가끔은 커플의 연애 스토리에 따라 억지 같아 보이기도 하는 이 부분을 나는 내가 직접 만들어서 모두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에 있던 약 세 달간 영상을 찍기도 하고 사진을 여기저기서 모으기도 해서 내가 직접 쓰고 읽은 프랑스어 내레이션과 함께 하나의 비디오로 만들었다. 비디오 BGM으로는 남편과 연애 초반에 매일같이 듣던 영화 <아멜리에>에 나오는 얀 티에슨의 피아노 연주곡을 넣었다. 안타깝게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선보이려고 챙겨간 프로젝터의 소리가 너무 작았던 바람에 내 비디오는 당일날 감동의 도가니를 불러일으킨 못했지만, 시댁에 돌아가서 소리를 켜고 함께 제대로 보고 나서는 다들 눈물을 훔쳐서 나름 세 달간 열심히 만든 보람 있었다. 사실은 남편에게 들려주려고 얀 티에슨의 피아노 연주곡도 열심히 연습해 갔었는데, 안타깝게도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피아노를 한 번도 찾지 못해 결국 남편에게는 내 피아노 연주를 들려줄 수 없었다.   
 
 결혼식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들 시댁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우리 부부만 동네 호텔에서 첫날밤 아닌 첫날밤을 보내기로 했다. 가족들과 너무 뜻깊은 시간을 보낸 우리는 호텔에 우리끼리 편하게 가는 게 좀 미안했다. 하지만 신혼 부부인만큼 오늘 밤은 편히 자고자 했고,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바로 뻗어버렸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호텔 조식은 굳이 먹지 말고 집에 가서 모두들과 함께 아침을 먹기로 하고 샤워를 했다. 남편이 먼저 샤워를 하고 내가 다음 타자로 샤워를 하고 나오자마자 갑자기 호텔룸 초인종이 울렸다. 룸서비스를 시킨 적이 없는데 뭐지 하고 남편이 호텔방 문을 열었다. 남편 남동생과 여자 친구, 동서 그리고 내 남동생이 이상한 국그릇을 들고 서있었다. 다들 호텔방에 온 게 반가워서 어서 들어오라고 하고 빨리 옷을 입고 다 같이 집에 가자고 하자 젊은 무리는 우리가 국그릇을 다 마셔야 갈 수 있다고 했다. 꼭 똥물같이 생긴 국그릇 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 같으나 뭔지 알 수 없는 이 정체모를 국그릇을 남편과 나는 반씩 나눠 마시고 드디어 호텔방을 떠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샴페인과 초콜릿, 바나나 등 집에 있던 음식들을 섞은 혼합물이었다. 결혼을 하고 첫날밤을 함께 보내며 같은 방을 나눠 쓰게 된 기념으로 요강이 있던 시절 요강에 결혼식 후 남은 술과 음식을 섞어서 부부에게 마시라고 하던 결혼 풍습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에서 함을 팔러 가듯, 프랑스에는 이런 풍습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국그릇을 다 마시고 차 한 대에 트렁크까지 꽉꽉 낑겨탄 우리는, 근처 빵집에서 크루아상을 잔뜩 사 가지고는 다 같이 아침을 먹으러 시댁으로 향했다. 원래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이런 순간들을 통해 더더욱 가족이 되었음을 느꼈다.
 
 꿈만 같던 결혼식과 파리에서의 열흘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나는 예정대로 비행기를 타고 가족과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남편의 미국 비자 인터뷰 날에 다시 만날 기약을 했지만, 그래도 결혼식을 하자마자 다시 떨어져 지내야만 하는 우리 현실이 야속했다. 그래도 이 시기만 지나면 다시는 떨어져 지내지 않으리라 우리는 굳게 약속하고, 가벼워진 짐가방을 가지고 나와 우리 가족은 한국행 출국장으로 향했다.
 
 친구나 직장 동료, 심지어 대부분의 친척들과도 함께 하지 못한 우리 결혼식을 나를 소셜 미디어에 여러 번 포스팅하고 직접 얘기하며 사람들에게 소감을 남겼다. 하나부터 열 끝까지 완벽하게 준비하고 진행한 그런 비싸고 멋있는 웨딩은 아니었지만, 우리 커플 그리고 함께한 가족들이 직접 준비한 무엇보다도 뜻깊고 의미 있는 자리였다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결혼식 중 뭐가 옳고 뭐가 틀린 건지, 뭐가 최고고 뭐가 최악인지는 따질 수 없었다. 다만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하고 영원히 기억에 남아있을 결혼식은 언제까지나 나만의 결혼식일 것이다. 고유의 귀차니즘으로 결혼식을 미루자고까지 했던 남편은 누구보다도 우리의 결혼식에 만족해했고, 더군다나 이번 경험을 통해 가지게 된 둘 사이의 더욱 뜻깊은 감정을 그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여겼다.


나름 프랑스와 한국에서 각자 준비한 수많은 결혼 기념품들을 하나하나 다 설명하기에는 이번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사진으로나마 우리의 특별한 날을 공유하고자 한다. 그 기념품들로는 시어머니가 직접 맞춘 내 부케, 친정 엄마와 내가 디자인을 골라 맞춘 맞춤 한복, 시댁에서 결혼식 주간 내내 마실 와인에 준비한 커플 라벨, 친정 엄마가 준비해 간 한복 와인커버 그리고 한국의 전통을 듣고 시아버지가 직접 준비한 초 등이 있다. 여태까지 디테일 있게 설명한 적 없었던 우리 결혼식에 가상으로 참석해 관심 있게 이 글을 읽어준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어설픈 우리의 셀프 웨딩에 당신에게도 귀감이 되었기를 바라본다.


 *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the_young_heiress

아기같이 활짝웃는 남편과 함께 샹보르 성 앞에서
겨울 왕국
엄마의 비하인드씬 사진
맞춤 한복을 입은 엄마와 시어머니와 함께
세 여자
남편 사촌들과 가족들과 함께
내가 만든 우리의 웨딩 e-초대장
시청에서 결혼 서약을 마친 나와 남편.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사진앞에서 한 컷
결혼 서약자리에서까지 부모님에게 프랑스어 통번역을 하게 된 나
결혼 서약식 중, 내가 도발적으로 남편에게 키스하는 듯한 한 컷
우리의 결혼이 가장 반가운 일인, 우리 엄마
결혼 서약 직후 눈시울이 붉어지신 시어머니와 함께
드디어 결혼에 골인한 우리를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시는 시아버지
시청에서 결혼 서약 사인 후 나와 남편
디너 자리에서 우리 케익과 한컷
프랑스어로 편지를 읽어주는 우리 아빠
아빠의 편지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남편
감동의 도가니로 변한 디너
결혼식 다음날 Pot de Chambre를 맛보고 있는 나와 남편
첫 커플 촬영을 했던 뽕 알렉산드르 3 다리에서 가족들과 파리 여행 중 다시 한컷
동대문에서 맞춤 한복을 착장중인 친정 엄마
결혼식 주간에 마신 와인에 사용된 커스텀 와인 라벨
전통적으로 하객들에게 주는 아몬드 사탕
파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아몬드 사탕과 한 컷
엄마가 준비한 한복 와인 커버 한 쌍
엄마의 맞춤 한복을 착장중인 나
헤드피스로 살뻔한 웨딩 헤어핀. 남편의 사촌동생들이 내가 이 스타일을 선택하지 않아 가장 아쉬워했다
너무너무 추웠던 파리 에펠탑 꼭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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