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의 귀국
아기를 키우다 보면 인간의 본능적 표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기는 원하는 게 있으면 대부분 울음으로 표현하는데 아무리 울어도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으면 때를 쓰다 결국 서러운 눈물을 흘린다. 그렇담 슬픔을 느낄 줄 아는 어른은 언제 눈물을 흘릴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시던 시아버지가 가슴이 아파서 그랬던 것처럼, 진정한 슬픔을 느껴서 눈물을 흘릴 때도 있지만 어린 아기와 똑같이 원하는 것이 안 이뤄질 때 울 수도 있다.
즐거운 이태리 여행을 마치고 베프가 먼저 영국으로 출국한 후, 나는 한국으로 출국할 날까지 밀라노로 돌아와 있었다. 혼자 돌아온 밀라노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마냥 비가 엄청 내리고 있었다. 여행 중 말썽을 부리던 카드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드디어 통장 잔고를 들여다본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카드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통장에 잔고가 얼마 안 남아 있었다. 내 미래를 위한 투자 차원에 온 이태리에서 열심히 놀기만 하고 결국 블로거로선 큰 진전을 하지 못한 나는 예상치 못한 남편의 프러포즈를 받았지만 내 꿈은 여전히 못 이룬 거 같아 주룩주룩 눈물이 났다. 내가 원하는 건 왜 항상 이뤄지지 않을까. 내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은 게 큰 원인일까, 아니면 원한만큼 열심히 노력을 안 해서 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이뤄내지 못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며칠간 열심히 일자리를 알아봤다. 블로거가 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게 벌써 거의 3년 전이지만, 그동안 커리어를 아예 안 쌓은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열심히 다니던 첫 직장에서 탄력을 받아 패션 블로거가 되려고 했었으니, 다시 패션분야에서 직장을 구한다면 내가 원하는 바운더리에서 크게 벗어나진 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아무런 대책 없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있을 순 없었다. 이미 인도네시아를 떠나 여행만 하고 놀고먹은 지 3개월이 돼가고 있었다. 블로거를 때려치우고 직장을 다니며 커리어를 쌓는다고 하면 너무 긴 공백이 이력서상 좋을 리가 없었다. 어찌 보면 직장을 찾아 다시 월급쟁이로 돌아가는 것이 원점 복귀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누가 날 고용이라도 해 준다면 상관없다는 생각에 열심히 구인 광고를 뒤졌다. 그리고 나름 내 커리어와도 맞는 몇몇 패션 브랜드 공고에 이력서를 보내 놓고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태리와 프랑스를 둘 다 가로질르는 알프스 산맥은 이태리 상공에서도 잘 보였다.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을 바라보며 꿈만 같았던 유럽에서의 3개월을 되새겼다. 그리고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면 앞으로 남편과의 미래는 어떻게 이어갈지, 내 미래는 어떻게 될지, 내 꿈은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알프스 산맥도 내 미래도.
13시간의 긴 비행 후 무사히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3년 만에 귀국한 딸을 보러 엄마 아빠가 차를 몰고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주셨다. 시댁 식구가 아닌 우리 가족과의 상봉은 항상 따뜻하고 편안했다. 3년 전 한국을 떠날 때는 나름의 대립관계가 풀릴 듯 말듯한 상태에서 나와 남편을 공항까지 데려다주셨었던 부모님이었지만, 그동안 서로 자주 보지도 못하고 멀리서 통화만 하다가 만나니 마치 아픈 감정은 다 사라지고 다시 한 가족이 된 느낌이었다. 아직 결혼은 안 했지만 친정에 돌아온 느낌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편안하게 부모님의 차 뒷좌석에 늘어지게 앉아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이태리 여행 얘기도 하고 극적인 프러포즈 이야기도 했다. 프러포즈를 받았다는 뜻은 곧 남자 친구였던 남편과 결혼을 한다는 뜻이니 부모님을 심적으로 힘들게 했던 동거가 드디어 막을 내린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원하는 미래도 희망하는 대로 펼쳐갈 수 있을지 걱정하셨다. 우리 커플의 커리어 문제는 국제 연애를 하면서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지만, 나는 잘 풀어내겠다는 오기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틈만 나면 나의 커리어를 위해 새로운 상황을 찾았다.
그때, 엄마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뜻밖에도 엄마에게 온 전화는 나에게 온 전화였고, 다행히도 비행기에 오르기 전 지원했던 공고에 내가 엄마 핸드폰 번호를 남겨놔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너무 신기하게 받게 된 그 전화는 헤드헌팅 회사에서 명품 브랜드를 담당하는 헤드 헌터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리고 내가 지원한 공고 말고도 나에게 더 잘 맞을 것 같은 기회가 있다며 관심이 있으면 이력서를 재구성해 지원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G백화점 바이어 시절, 워낙 많은 명품 브랜드를 거래처로 만나다 보니 어떤 브랜드 본사가 탄탄하고 규모가 있는지, 어느 계통이 월급 수준이 좋고 어느 계통은 박봉인지 간접 경험을 했었다. 내가 최초에 지원했던 F 브랜드는 명성에 비해서는 그렇게 크지 않은 한국 본사에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헤드 헌터가 제안해온 D브랜드는 내가 알기로도 본사가 탄탄하고 해외 본사의 지원도 많은 브랜드였다. 게다가 내가 이제는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가 본사인 명품 브랜드였다. 나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하고 단숨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해외에서 살다가 한국에 돌아와 연예인 활동을 해 성공한 케이스들을 보면 해외에서의 생활이 특별나서라기 보다는 그 특별한 경험을 하고 한국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더 큰 작용을 한다. 그리고 한국을 베이스로 성공적인 활동을 했을 때 해외 진출을 해 더 큰 성공을 누리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자국이라는 곳은 누구에게나 큰 힘이 되는 중요한 홈베이스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첫 직장이 나에게 엄청난 힘을 준 이유도 내가 자국에서 갑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고, 내가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우리나라 임원진들에게 해외 바이어들을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을 떠나면 다시 가고 싶은 아이러니는 나에게 커리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낀 지난 3년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취업이 되면 어떤 상황이든 최선을 다해 임하고 보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에 답변이라도 하듯 D사와의 입사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운이 좋게도 D사와의 면접에서 바이어 시절 알고 지내던 임원진과 만나게 되어 좋은 점수를 얻었다. 그렇게 약 2주 동안 진행된 한국 본사 그리고 홍콩 지사와의 면접을 거쳐 D사 입정이 확정되었다. 이태리에서 돌아온 지 딱 한 달 뒤의 일이었다.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줄기 빛과 같았던 D사로의 입사에 신이 난 나는, 남편도 잘 아는 프랑스 브랜드에 입사 확정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남편은 너무 좋아라 하는 나와 같이 기뻐해 주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 함께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한편으로는 롱디가 계속될 우리 커플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프러포즈를 했으니 마침 시댁이 있는 도시 시청에 내년 2월에 자리가 나 결혼을 하면 좋겠다고 나름 프랑스 현지에서 결혼 준비를 해 온 남편은 이 상황이 좀 난감하기까지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프랑스로 돌아간 이후 남편은 아직까지 다음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 와중에 내가 한국에 먼저 돌아와 입사를 한 마당에 딱히 다른 제안을 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처음으로 롱디에 접어들었고, 그 참에 나는 오랜만에 회사 생활을 하며 럭셔리한 명품의 세계를 즐기기로 했다.
연말이 다가왔고 D브랜드는 시기가 시기인만큼 각종 행사를 계획했다. 더군다나 내 근무지는 프랑스 본사에서 그룹 회장이 직접 땅을 사 건물을 올린 청담 플래그십 매장이라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는 곳이었고, 그래서 대부분의 행사는 파리 본사팀이 직접 와서 국내 본사 팀과 협업으로 진행했다. 12월 초에 입사한 나는 입사한 첫날부터 파리팀이 와서 진행하는 대형 행사를 치렀다. 홍콩 지사에서 나를 면접 봤던 매니저부터 홍콩 지사장, 그룹 내 타 브랜드 지사장 등 온갖 VIP가 다 방문하는 날이었다. 프랑스 최대 럭셔리 그룹인 그룹 본사에서는 보통 각 나라 지사장으로 프랑스 임원들을 파견했었는데,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매주 프랑스어 수업에 임한 덕에 이제 프랑스어가 좀 편해진 나도 직접 프랑스 임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행사에 앞서 전 직원은 새롭게 선보여질 컬렉션에 관한 트레이닝을 받았다. 트레이너는 매장 오픈 전 시간을 이용해 1층 입구에 놓인 D브랜드의 아이코닉한 가방 컬렉션을 둘러보며, 이번 컬렉션에 참여한 콜라보레이션 아티스트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을 해 주었다. 이번 콜라보레이션의 하이라이트는 유럽에서도 유명한 한국인 아티스트 이불 작가의 작품이었고, 가방의 전시와 함께 4층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었다. 깨진 거울처럼 플렉시 글라스를 조각조각 붙여 만든 이불 작가의 가방은 전 세계적으로 15개만 만들어져 판매될 예정이었고, 그중 5개가 우리 매장에 와 있었다. 말 그대로 리미티드 컬렉션이었다. 플래그십 매장 입구에 커다란 샹들리에도 선보인 이불 작가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을 때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매장 오픈 전이라 핸드폰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었지만 모두 설명을 듣고 있는 자리에서 받기는 좀 힘든 상황이었는데, 누군가 하고 보니 남편이었다. 어렵사리 지금 트레이닝 중이라고 문자를 보내고, 답문을 보내 놓으면 보겠다고 말했다. 성격이 급한 남편이 뭔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계속 울려대는 핸드폰으로 오는 문자를 확인해 봤다. 미국 뉴욕에 좋은 일 자리를 찾았다고.
미국 하면 캘리포니아 LA에서 사는 게 꿈인 나에게, 남편도 미국 하면 혹 할 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의식해서만은 아니지만, 우리가 둘 다 살고 싶어 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생각하다 남편은 업계 친구들이 많이 있는 미국에 일자리를 알아보게 되었고, 의외로 빨리 일자리를 찾은 듯했다. D사 입사 첫날이었다. 나는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다.
저녁 시간에 시작하는 행사라 메인이벤트와 애프터 파티까지 하면 적어도 밤 10시는 돼야 끝나는 공식 일정은, 직원들에게는 정리하고 집에 갈 채비를 하면 11시는 돼야 퇴근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VIP를 다 챙겨야 하는 보직을 맡은 나는 일반 직원들도 다 퇴근 한 뒤 한참 뒤에야 드디어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매장을 빠져나와 집에 가는 버스를 타러 가면서 재빨리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래도 영상 통화를 하며 서로 얼굴 보기를 좋아했던 남편은, 미국 소식을 전한 후 한껏 더 기분이 상층 돼 있었다. 안보는 사이에 시어머니의 맛있는 집밥을 먹으며 보기 좋게 얼굴에 살도 오른 남편은, 우리에게 최고의 기회라며 꼭 가야 한다고 했다. 나도 그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상황을 조금이라도 고려해서 시기를 선택하고 싶었다. 남편은 미국은 입국 비자가 까다롭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결혼을 한 뒤 같이 입국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남편은 결혼과 미국,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제시했다.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이실 직고를 하지만, 그렇게 결정된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두고 나는 D사를 미국 입국 비자 면접 날짜 직전까지 다녔다. 만약 D사에서 나를 아껴주셨던 임원분들이나 동료들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역시 그랬었다고 혀를 차실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총 5개월 정도 다니게 된 D사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커리어 이상의 의미였다. 우선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명품 브랜드 소속이 되어 꿈만 같은 컬렉션을 맘껏 보고 만질 수 있는 기회였고, 가장 럭셔리한 플래그십을 직장이라고 여기며 각종 이벤트, 연예인 그리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최근 너무나도 몸담고 싶었던 패션업계로 돌아온 것 같은, 아니 돌아올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5개월이었다. 마음만 같아선 남편이 내 직장을 고려해 한국으로 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음 했다. 하지만 나도 미국에서 한 번 생활해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고, 세계 4대 패션 위크가 열리는 뉴욕에 충분히 패션업계 일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한국에서 열심히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미국 회사에 입사가 확정된 남편은 동시에 미국 체류 비자를 진행했다. 서류 심사가 까다로웠던 체류 비자 진행은 약 4개월 정도 소요되었고, 모든 서류 제출이 끝나자 드디어 비자 인터뷰 날짜가 나왔다. 우리는 파리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서 비자 인터뷰를 보기로 정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인터뷰 날짜는 엄마 생일과 같은 날짜로 배정되었다. 올해도 엄마 생신은 당일날 못 치러 드리겠구나 싶었다.
미국 출국 일정이 확정되기 시작하면서, D사에도 이별을 고할 날들이 가까워져 왔다. D사에는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한 동료들이 좀 있었다. 특히 나와 동갑이었던 직속 상사도 미국 유학파였는데, 내가 이 사실을 말하니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거라며 나를 위해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했다. D사의 남성 브랜드를 담당하던 브랜드 매니저도 미국에서 유학을 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케이스로,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말렸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한 다른 동료는 나에게 왜 국제 미아가 될 길을 선택하느냐고 고생길이 훤하다고 말했다. 이미 나도 겪어보고, 예상도 한 만큼 5개월 동안 친해져서 나를 아껴주고 생각해주는 동료들이 하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나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모든 걸 돌이킬 순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말을 안 믿는 척 미국으로 떠나겠다고 했다. 나를 혹독하게 트레이닝시키시던 직속 이사님은 막상 내가 떠난다고 하니 굳이 가야 하냐고 말리셨고, 내가 이미 맘을 굳게 정한 것을 들으시고는 유종의 미로 매장 꼭대기에 있던 카페에서 엄마와 맛있는 디저트를 시식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직장에 계속 남아 있고 싶었다.
마지막 출근을 한 다음날, 엄마와 함께 카페에 디저트를 먹으러 전 직장을 찾았다. 봄바람이 살살 불던 4월 말이었던 그날엔 매장에서 각종 소소한 이벤트를 진행 중이라 모두 분주한 날이었다. 이제 손님으로 다시 찾은 나는 엄마와 함께 카페로 올라가 프랑스 파티시에 셰프가 만들어주는 예술 작품 같은 디저트와 티를 마시며 인증샷을 남겼다. 곧 있으면 환갑을 맞이할 엄마와도 앞으로 갖기 힘들 모녀의 시간이었다. 엄마 생신 당일날 나는 파리에서 미국 비자 인터뷰가 예정돼 있으니, 그 날 저녁에 엄마 환갑 디너를 하기로 예약을 했었다. 또 떠날 것이지만 오늘만은 엄마를 위한 날로 만들고 싶었다. 맛있는 디저트를 먹고 D사 플래그십을 나와, 발렛 파킹만 가능한 매장 앞에서 발렛 요원들이 차를 대기해 줬다. 직장 동료들이 평소 고객에게 하듯 다들 밖에 나와 우리가 차를 타고 매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가 진짜 손님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이런 대접도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동료들의 배웅이 미국으로 떠나는 나에게 해주는 응원처럼 보였다. 미국이라는 곳, 우리 커플에겐 또 어떤 추억과 어떤 아픔을 안겨줄까. 설렘 반, 두려움 반, 엄마 차를 타고 매장을 빠져나왔다.
이제 한 달 반 정도 된 아기를 키우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요즘, 유독 D사 생각이 많이 난다. 한국 지사지만 프랑스 그룹 제도대로 운영되던 D사는, 유독 여임직원이 많은 회사로 직원 복리후생이 좋은 것으로 유명했다. 패션계의 리더인 만큼 직원의 그루밍을 중요시한 D사는 직원의 미용이나 운동, 자기 계발을 위해 쓸 수 있는 복지 카드를 제공했고, 나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혜택을 잠시나마 누렸었다. 무엇보다 여성에게 한 때 직장이 아닌 평생직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출산 휴가와 복지가 특출 나기 때문이었다. 물론 직원마다 계약관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내 직속 이사로 있었던 플래그십 디렉터는 내가 입사했을 당시 출산 휴가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둘째를 출산하고 몸도 마음도 회복해 다시 날씬한 몸매로 D사의 시그니처인 바 재킷을 입고 복귀한 그녀는, 반년 이상 되는 출산 휴가를 마치고 다시 활기찬 모습으로 직장에 돌아왔었다. 워낙 에너지가 남달랐던 그녀는 복귀 후 육아의 피로보다는 불타는 의지가 눈에 더 띄었다. 당시 미국으로 갈 채비를 하느라 불안한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면서도, 은근히 나도 언젠간 아기를 낳을 텐데, 저렇게 당당하게 돌아올 수 있는 직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 아무런 대책 없이 육아에만 전념하고 있는 나를 보며, 그때 나도 언젠가 부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현실이 떠올랐다.
*더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the_young_hei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