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프랑스란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과, 이 글에 나올 내용을 살고 있을 당시 내 상황이 너무 비슷하다. 이 챕터에는 인도네시아를 무작정 떠나 다음 행선지를 정할 때까지 프랑스 시부모님 집으로 돌아온 후 우리 커플이 처해 있던 상황 그리고 그 당시 내 느낌을 담고자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음 행선지가 되었던 뉴욕을 떠나 프랑스에 돌아와 있는 상황이고, 아직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무한 반복인 국제 미아 커플의 삶이 슬슬 힘에 부치고 지쳐가기 시작한다.
한국은 살고 있을 때면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고, 떠나 있을 땐 그리운 곳이다. 영국에서 살던 유년 시절에도 해외에 나와있다는 사실이 좋긴 했지만 한국 음식, 한국 음악, 한국 드라마, 한국 연예인이 왜 그렇게 그리웠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 커플은 소속감이 없는 상태에서 어디론가 ‘돌아간다’ 면 항상 프랑스를 택했다. 남편에겐 프랑스가 고국이었고, 나에겐 나름의 휴식 장소였다. 한국으로 떠나면서 집이며 차며 다 팔아버리고 새 삶을 사는 기분으로 프랑스를 떠나온 남편은 이제 프랑스에 돌아가도 자신의 소유인 가구 밖에는 따로 돌아갈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네시아를 떠나 7개의 짐가방을 들고 남편의 부모님 집에 떡하니 신세를 지게 되었다. 얼마나 머물게 될지 예상하지 않고 도착한 남편의 부모님 집에는 여름 햇살이 가득했다. 시아버지가 직접 땅을 파서 지은 커다란 수영장 앞에 남편 형 가족과 시부모님이 시원한 와인을 마시며 유러피안답게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3년 동안 힘겨운 외국 생활을 하고 귀국한 아들과 아들의 여자 친구를 모두 반겨주는 가족과 함께 우리도 시아버지가 정원에서 직접 키운 야채로 만든 건강한 점심 식사를 하고 오랜만의 여유를 즐겼다. 남편의 오래된 애완견 에덴이 귀를 쫑긋 세우고 뛰어다니는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다.
내가 현 챕터까지 시부모님이니 남편이니 하지만 그건 현재 상황에서 그러하기 때문에 쓴 것이고,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결혼을 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부모님은 시부모님과 다름없이 항상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고 자기 딸처럼 챙겨주셨다. 워낙 자유로운 소통이 일상적인 남편네 집 식구들은 심각한 문제이든 별거 아닌 문제이든 함께 논의하고 의견을 주고받기 나름이었는데, 처음에는 마치 싸우는 것처럼 들렸던 그들의 대화가 이제는 건설적인 소통의 장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각자 객관적인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주관적인 입장이 대립할 때면 아빠고 아들이고 할 것 없이 큰소리로 소신껏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같은 맥락에서 시부모님은 나와 대화를 할 때는 내 입장에 대해 항상 물어봐 주셨고, 본인들의 아들 여자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내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고 나를 위한 조언을 해주셨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크게 따지지 않고 순전히 나를 위한 생각을 해 주시고 그걸 끄집어내어 말해 주실 수 있다는 것 만으로 항상 감사했다. 사실 남편을 ‘따라다니는’ 입장이 되어버린 내 속마음은 항상 편하지만은 않았음에도 시부모님이 얼러주지 않으셨다면 더더욱 서글펐을 것 같다.
그렇게나 감사했지만 왜 이 챕터의 제목은 시댁 아닌 시댁 살이라고 지었냐 하면, 사실이 그랬기 때문이다. 처음 프랑스에 돌아가서 몇 주 동안은 남편의 친척들도 만나러 다니고, 다른 유럽 국가로 여행도 하며 나름 긴 여름휴가 마냥 그 순간을 즐겼다. 하지만 그렇게 1달, 2달이 지나가고 나니 결혼도 안 한 남편의 부모님 댁에서 삼시 세끼를 얻어먹으며 아무 대책 없이 지나고 있다는 내 자신이 조금씩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남편이야 본인의 부모님 댁이고, 나름 다음 갈길을 찾는다며 그 이유를 댈 수 있었지만, 남편이 다음 목적지를 찾게 내버려 둔 나는 마치 아무 하릴없이 허송세월을 보내는 생각 없는 여자 친구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집안일을 허점 없이 깨끗하게 하시기를 좋아하는 시어머님은 아무래도 ‘손님’이 계속 있다 보니 밥하시랴 일하시랴 힘에 부치시는 눈치였고, 아들인 남편은 느끼지 못하는 나만의 부담감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항상 나에게까지 최선을 다 해주시려는 두 분을 생각하면 남편에게 내가 계속 있기 불편하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미안했지만, 무튼 말을 해도 남편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영국에 있는 친구도 혼자 보러 갔다 오고 며칠이라도 집을 떠나 있으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 무작정 시간을 보낸 지 3달째가 되자, 쉔겐 지역 무비자로 입국한 나는 더더욱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전에 어디론가 떠날 줄 알고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프랑스로 바로 입국했던 나는 3개월을 꽉꽉 채우고 나면 반드시 쉔겐 지역을 떠나야만 했고 우리는 그때까지도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못했다. 그럴 때면 꼭 하게 되는 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남편과 내가 프랑스에서 둘이 사업체를 여는 것이었다. 제과제빵 셰프인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일을 시작해 여러 사업체를 보며 경험을 쌓아왔는데, 프랑스에서는 남편이 빵을 굽고 부인이 판매를 하는 동네 빵집을 하는 게 흔한 일이었다. 해외 경험을 하면서 비즈니스 마인드를 키워온 남편은 동네 빵집으로 시작하더라도 향후에 프랜차이즈로 키우고 싶은 큰 꿈을 가지고 있었고 그 안에 항상 내가 들어있었다. 명품 바이어를 하면서 마케팅을 담당해온 나는 판매로 시작해 브랜드를 키울 수 있는 전문 마케터로 남편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패션을 너무 사랑해 명품 바이어를 하게 된 나로서 베이커리에서 판매를 하는 역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걸 잘 아는 남편이 사업 얘기를 꺼낼 때면 우린 항상 싸우기 십상이었고, 어찌 보면 그래서 한 군데 정착해서 사업을 시작하기보다는 계속 새로운 나라를 전전하며 각자의 커리어를 쌓는 삶을 택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댁 아닌 시댁에서 시댁살이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남편 하고도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생각 없이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에덴을 데리고 동네 숲 속에 산책을 하던 남편의 아버지와 하루는 함께 산책을 나갔다. 항상 나를 위한 좋은 말을 해 주시던 시아버지는 세월아 내 월아 지내고 있는 남편을 걱정하며 더불어 나에 대한 걱정을 표현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내가 여기 계속 있는 게 불편하고 답답하면 원하는 곳으로 가도 된다고, 그게 오히려 남편을 자극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마침 그 당시 어차피 떠야 할 유럽이면 쫓겨나기 전에 꼭 가보고 싶었던 이태리 밀라노를 계속 생각하고 있던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더욱 힘을 받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다. 남편에게는 이별을 하려는 게 아니라 나는 어차피 한국으로 우선 떠나야 하니 그 시간이 오기 전에 이태리에 갔다가 귀국하는 거라고 열심히 설명을 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남편은 마치 내가 이별을 하고 싶은데 마침 핑곗거리가 생긴 것처럼 여귀기 시작했고, 왠지 그런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슬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계속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미 표도 끊어 버리고, 유럽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 이태리에서 만날 계획까지 세워버린 나를 남편은 말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막지 않았다. 그리고 시아버지는 남편이 힘들어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서인지 직접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시겠다고 하셨다.
프랑스에서 이태리, 이태리에서 한국으로 귀국할 티켓팅까지 다 마치고 떠날 날짜와 비행기 시간이 정해졌다. 인도네시아에서 싸들고 온 7개 가방 중 4개는 내 옷가지로 가득했는데, 이코노미 좌석을 끊은 나는 내 짐을 다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그리고 마음은 서글퍼도 헤어지는 게 아니라고 한 이상 굳이 짐을 다 가지고 갈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11월이 다가오던 계절에 맞게 가을, 겨울옷을 채워 가방을 2개로 줄이고 떠날 채비를 했다. 주택에 살고 있던 시부모님은 지하에 주차 공간 및 별도의 창고가 있었다. 가방을 싸느라 창고를 왔다 갔다 하던 떠나기 전날, 시아버지는 지하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50대 중반에 일찌감치 은퇴를 하신 아버지는 항상 정원을 꾸미고 집을 가꾸시느라 분주하셨다. 지하에 자신만의 아뜰리에가 있던 아버지는 지하에 내려온 나를 마주하고는 갑자기 내 손을 본인의 심장 위에 가져다 대셨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직해 보이시고 쾌활하시던 분이 안경 너머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셨다.
“내 가슴이 아프다.”
그 말을 정확히 어떤 뜻으로 하셨는진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보며 나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명확히 말씀드렸다. 내가 지금 떠난다고 해서 남편을 떠나는 게 아니라고. 아버지는 그건 본인도 아신다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하지만 떠나는 나를 보고 혹시 찾아 올 수도 있는 이별에 가슴이 아프신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듬과 동시에 우리의 이런 삶이 원망스러웠고,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우리의 상황이 슬프게 느껴졌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렇게 서로의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았고, 무엇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못 견뎌낼 것 같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나는 남편에게도 나는 떠나는 게 아니라고 계속 말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떠날 날이 찾아왔고, 아침에 일어나 어머님이 출근하시기 전 인사를 하려고 안방으로 찾아가는 길에 어머니와 마주쳤다. 이층 집에 있던 남편 방과 어머니 방 사이 복도에서 만난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멈쳐섰다. 갑자기 큰 눈을 가지신 어머니가 안경 너머로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나도 또 눈물이 나왔고, 내가 아무리 떠나는 게 아니라고 해도 계속 눈물을 흘리는 남편의 가족들을 보면서 우리의 상황에 대해 계속 생각이 났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떠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아마도 내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국제 연애의 비애가 아닐까 싶었다.
결국 아버지만 보낼 수 없었던 남편은 아버지와 함께 나를 데려다주러 공항으로 함께 향했고, 나를 떠나보내는 두 남자의 눈에는 마지막까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하지만 나는 쾌활하게 떠날 때까지 곧 다시 만날 거라고 말했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기둥 같았던 시아버지와 고집불통 같던 남편이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나를 보고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던 마지막 순간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3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프랑스에 돌아와 있다. 아직 쓰지 않은 챕터에서 더 자세히 쓰게 되겠지만 그동안 우리는 결혼도 하고 아주 최근에 첫아기도 낳았다. 그리고 3년 전의 프랑스에서와 아주 비슷한 상황으로 되돌아와 있다. 다음 행선지는 아직 없고, 남편은 프랑스에서 같이 사업을 하자고 거의 조르고 있는 상황.
남편의 너무 간절한 소원인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남편이던 누구든 꿈은 소중한 것이고 이뤘을 때 누구보다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도움이 됐으면 참 좋겠지만, 그와 동시에 남편도 내 꿈에 대해 더 소중히 다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약간의 대립, 간간한 말다툼을 종종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귀여운 남자아이를 낳고 더 단단해진 우리의 사이와 가족의 탄생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감정들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의견 대립을 하는 것이 당사자들에게도 쉬운 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의 힘으로 지금을 버텨내고 있다.
하지만 남편의 꿈도 그렇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내 힘도 그렇고 언젠가 결말은 있어야 할 것이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인기인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보면 프렌치 엔딩은 좀 더 현실적이고 혹독한 것이라는데, 미국물을 좀 먹은 우리 부부가 원하는 엔딩은 해피 엔딩이다. 아직 찾지 못한 그 해피 엔딩을 위해, 그리고 내가 뽀뽀만 해줘도 활짝 웃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자그마한 아기를 위해 우리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다.
*더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the_young_hei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