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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yverse Oct 20. 2020

서류상 위장 결혼

우리에게 인도네시아란

앞서 말하지만 이 챕터의 제목처럼 내가 정말 위장 결혼을 했다거나 다른 범죄를 지르고 이실 직고를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살다 보면 많은 일이 실제로 돈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직 부정부패가 심한 행정 기관은 아는 사람이 있던가 돈이 있던가 둘 다 있으면 모든 일이 빨리 해결된다. 어찌 보면 아직 그런 방법이 먹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비전 자화에 있지 않을까 싶다. 아직 대부분의 업무가 서류 위주로 돌아가는 행정 시스템은 받는 사람도 피곤하지만 제출하는 사람은 더 피곤하다. 인도네시아도 자국의 발전을 위해 부정부패를 타파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내 비자 발급을 위해 이런저런 서류를 때야 했던 나는 거주자 증명서를 떼어야 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동사무소에서 땔 수 있는 서류였기에 동네 노인들이 항상 모여있던 놀이터 앞 건물이 왠지 동사무소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짧은 인도네시아어로 거주자 증명서를 어디서 떼냐고 어른들에게 물어보니 거긴 동사무소가 아니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거주자 증명서는 동네 이장님이 띄어주는 거라는 거다. 갑자기 1박 2일을 찍는 줄 알았다. 아직까지 동네 이장님이 존재한다니. 어쩔 수 없이 안 괴롭히려던 집주인에게 연락을 취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동네 이장님을 어디 가면 찾을 수 있는지 물었다.

가사 도우미를 두고 본인은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던 집주인은 가사 도우미가 알려줄 거라며 마지막 한마디를 더했다. 참고로 우리 커플이 결혼한 상태라고 말했으니 그리 알고 있으라고 말이다. 언제 나에게 우리가 이웃사람들에게 결혼한 상태라고 거짓말한 상태라고 말해줄 꺼였을까? 만약 내가 거주자 증명서를 때려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알아야 할 수도 있는 이 거짓말에 대해 절대 몰랐을 것 아닌가? 순간 큰 상관은 없는 거 같으면서도 집주인이 나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맘에 걸려 굳이 되돌려 물었다. 혹시 왜 그렇게 해야만 했냐고 말이다. 집주인 왈 미혼이라고 하면 같은 집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럼 동거가 불법이란 말인가? 이제 남편과 지내면서 나도 프랑스인의 피가 조금씩 불 끓기 시작하는지 굳이 납득이 안 가는 건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불법까진 아니지만 아시아계인 집주인 입장이 곤란해지고 싶지 않아 일부러 그런 말을 해 두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단 즉슨 적어도 집주인은 같은 아시아계인 내가 프랑스인 남자 친구와 동거를 한다는 사실에 대해 한번쯤은 편견의 눈으로 봤을 거라는 뜻이고,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에 본인이 직접 거짓말로 결혼했다고 입막음을 해 놓을 생각을 했다는 뜻 아닌가. 그 생각을 하니 순간 집주인에게 좀 부끄러웠다. 여태까지 몇 번을 만났지만 한 번도 그런 언급을 일부러 하진 않았었다. 내가 민망할까 봐 그랬지 않았나 싶다. 모든 게 더 부끄러웠다.

가사도우미와 함께 동네 이장 할머니 집엘 찾아갔다. 닭 두 마리가 마당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조그마한 집에서 살고 있돈 할머니는 꼬깃꼬깃 감춰놓은 도장을 어디선가 가지고 나와 잉크가 다 마른 잉크 패드에 찍어서 손수 적은 거주자 증명서를 떼어주셨다. 왠지 거짓말에 낙인을 받는 거 같은 느낌이었다. 원래 거짓말하는 데에 소질이 없는 나는 적어도 나를 동네 이장님 집까지 데리고 가 준 가사 도우미는 사실을 알지 않을까 싶었다. 돈도 받지 않는 동네 이장 할머니에게 차라리 깨끗하게 서류 발급비를 내고 떳떳하게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선심 쓰듯 거주자 증명서를 때 주시던 동네 이장님에게 괜히 혼자 부끄러웠다.

주민등록증에 종교를 명시해야만 하는 인도네시아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봤을 때에도 말이 안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이 챕터를 쓰면서 이전에 등장한 전 회사 부사장과 카톡으로 대화를 할 일이 있어 물었다. 내가 사실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미국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 후 쭉 인도네시아 생활을 해온 부사장은 아무리 그래도 꼭 그렇게 해야 하냐고 놀라 했다. 한국에 비해 오히려 개방적인 편인 인도네시아는 때때론 우리보다 자유로운 것 같으면서도 때때론 말이 안 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담배를 피우던 나와 부사장이 서로 맞담배를 피거나, 남자 동료들과 가끔 담배를 피우는 것은 절대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다. 또한 회식자리가 있거나 회사 행사가 있을 때 개인적인 이유로 불참하는 것도 전혀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다. 하지만 간혹 어이없는 일들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먼저 인도네시아로 간 남편을 따라 그다음 달에 수도 자카르타에 도착한 나는 오랜만의 재회에 신이 나 있었다. 남편이 일하던 몰에 퇴근 시간에 맞춰 가 장을 보기로 한 우리는 별생각 없이 손을 잡고 볼에 뽀뽀를 하며 슈퍼마켓이 있는 층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우리 뒤에서 따라 내려오고 있던 한 무슬림 아주머니께서 갑자기 혀끝을 차며 여기는 무슬림 국가이니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고 손가락을 흔들어댔다.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남편은 나는 크리스천이라 상관없다고 말하고 에스컬레이터를 계속 타고 내려갔다. 별 희한한 일이 다 있다고 생각한 우리는 되수롭게 여기지 않고 슈퍼에 가서 장을 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아주머니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셨는지 들고 있던 태블릿을 가지고 대놓고 우리 사진을 찍고 휙 돌아갔다.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있다고 생각하고 어서 장을 보고 집에 가려고 서둘러 계산을 하고 슈퍼마켓을 나섰다. 그랬더니 슈퍼마켓 출구에 이번엔 아주머니가 몰의 보안요원들과 함께 우리 길을 막고 섰다. 아주머니가 보안요원들에게 무슨 설명을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영어를 못하시던 아주머니를 대신해 보안 요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주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사과를 해달라고. 갑자기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고, 프랑스인 남편은 말도 안 된다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남편은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우리는 아무 잘못도 안 했다고 보안요원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보안요원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거의 비는 수준으로 그냥 아주머니에게 사과를 하고 끝냈으면 하는 듯 말했다. 그 말에 더 열이 받은 남편은 같은 건물에 있던 인도네시아 매니저에게 전화를 했고, 결국 본인 입으로 일자리까지 어딘지 밝혀버렸다. 결국 인도네시아 매니저가 와서 되려 열을 받을 때까지 받은 남편의 화를 좀 가라앉혔지만 보수파 아주머니의 기분은 가라앉힐 수 없었다. 요약해 말하지만 그 후 매장으로 계속 찾아와 남편을 고소하겠다는 아주머니를 피해 우리는 싱가포르로 몇 주 피난을 갔고, 결국 아주머니는 남편을 고소까지 하진 않았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볼에 뽀뽀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렵게 깨달았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인도네시아에서 거의 3년을 산 우리는 첫 해외 동거 생활을 하며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해외에서 동거를 한다는 것도 커플의 관계에 있어서 큰 난관이었고 새로운 도전이었다. 아직 서로에 대해 알아가야 하는 것에 더해 해외 생활에 적응도 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우리를 강하게 만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자의 문화권이나 가족의 잣대가 없다 보니 더더욱 객관적이고 올바른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도 나름 우리에게 큰 경험이 되었다.

역마살이 낀 커플처럼 3년 차가 되니 인도네시아를 뒤로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커 저만 갔다. 상해, 싱가포르 남편은 또 이곳저곳 옵션을 가지고 왔다. 확정을 하지 못한 채 우리의 인도네시아 권태기는 커져만 갔고, 여름이 되자 유럽에 가서 가족들과 휴가철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다음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 8월 어느 날, 우리는 여행가방 7개를 끌고 프랑스로 향했다.


 *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the_young_heiress

인도네시아 시절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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