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로의 첫 발걸음
집에 혼자 돌아가서 나름의 허락을 받고 계속 동거를 하는 동안, 차차 남편도 집에 정식으로 인사를 하러 가 엄마가 끓여준 삼계탕도 먹고 엄마, 아빠와 이야기도 나눴다. 한국의 식문화가 여전히 낯설었던 프랑스인 남편은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을 해준 엄머와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우리 부모님에 대해 알아갔다. 사실 만나기 전부터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엄마와 남편은 대립관계에 놓여 있었다. 나의 자유를 대변해주려던 프랑스인 남편과 나의 안전을 지켜주려던 한국인 엄마의 어쩔 수 없는 대립이었다. 어찌 보면 내가 해결해줘야 했을 법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입장은 또 달랐다. 정작 나의 입장이나 의견은 아무도 물어봐 주지 않는데, 내 주변인이라고 해서 둘 사이를 얼러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 페이지를 빌러 내 입장을 말하자면 나 역시도 헷갈리고 두려웠다. 남편 이전에 남자 친구를 사귀어본 적은 있었지만 외국인 남자 친구는 처음이었고, 게다가 이렇게 동거까지 한 것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나와 같은 문화권에서 자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수용해주고 이해해줘야 할지 항상 헷갈렸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때에는 사랑의 힘으로 버텨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는 상황에 들이닥칠 때에는 두렵기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소위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는 남편의 일방적인 엄마에 대한 발언에도 동의할 수 없었고, ‘우리나라에 있으면서 우리 문화를 너무 이해해주려 하지 않는다’는 엄마의 남편에 대한 발언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봤을 땐 세 사람의 의견 충돌이었고, 그럴 경우엔 삼자대면을 하던, 각자 대면을 해서 푸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남편과 함께 한 7년 동안 엄마와 남편 사이의 무언의 힘싸움은 계속되었고, 내가 프랑스에서 출산을 해 우리 가족과 아기를 돌봐주러 한 달간 와서 봉사하는 엄마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남편은 엄마에게 좀 수그러든 듯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의 피를 자랑스러워하는 모든 프랑스인이 그렇듯 남편은 본인의 자유와 선택권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고, 그에 반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끝까지 자기주장을 하고야 마는 고집불통의 카리스마를 절대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서울에서 시작된 우리 관계가 어느덧 6개월로 접어듬과 동시에 우리 커플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한국에 발령제로 나와 있던 남편은 서울에서 2년 차 근무에 접어들었고, 현지 고용 계약기간이 끝나가자 아시아 본사였던 홍콩 사무실에서는 아시아내 다른 국가로 이동 하기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이동 가능한 국가는 태국 아니면 인도네시아였다. 나에겐 둘 다 가본 적도 그다지 살고 싶은 곳으로 상상했던 곳도 아니었던 두 나라로의 제안은 우리 커플에게 또 다른 의미였다. 계속 함께 하기로 결정하고 내가 남편이 이동할 국가에 함께 가느냐 아니면 여기서 모든 걸 끝내고 각자의 길을 가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하긴 나는 남편과 굳이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예전에 했던 염려처럼 외국인과 사귀면 해야 할 걱정거리 때문에 님편과 그만 사귀어야지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생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 막상 닥쳐보니 내 예상과 같은 건 별로 없었다. 외국인을 사귄다고 해서 꼭 롱디를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고, 꼭 국제 미아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커플이 서로를 계속 사랑하고 함께 있고자 한다면, 같은 나라에 있으면 되는 것이었고, 어디로 갈지도 함께 의논해서 결정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 맞는 돈벌이를 하면 되는 21세기에 살고 있었다. 꼭 직장생활을 해야만 돈을 버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내가 남편과 함께 이동하면 항상 함께할 수 있었고, 그 나라에 가기 전이나 그 나라에 가서 내 직장 혹은 돈벌이를 구하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지 7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간 두 번 나라를 바꾸었고, 각자 세네 번 직장을 바꿨다. 나라를 바꾸는 중간중간 우리는 프랑스에 있는 남편 부모님 집에 신세를 질 수 있었지만, 가끔은 다음 정착지를 정하지 못해 불안정한 시기도 있었고, 나의 경우 직장이 바로 구해지지 않아 노는 기간도 많았다. 현재 우리는 프랑스에서 남편이 직장을 구해 출산도 하고 처음으로 프랑스 생활도 하고 있지만, 다음 정착지로 또 다른 목적지를 찾아볼지 아니면 계속 프랑스에 남을지 고민 중이다. 이런 고민을 할 때마다 과연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사귀어서 결혼을 했다면 이런 걱정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우리가 만약 내 직장을 위주로 움직였다면 어디로 이동했을지, 내가 돈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내가 그에 대한 답변을 찾기 전에 나름 국제적인 직업인 제과제빵 셰프인 남편이 꼭 어디선가 채용 공고를 찾아내고, 나는 그 이후에 직장을 구하든 아니면 그 상황에서 돈을 벌 궁리를 하는 게 우리 일상이 됐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이 꼭 직장이 있어야만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 경제적인 고민은 계속되었고, 이 주제는 원점복귀 챕터에서 더 언급해보려 한다.
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함께 이동하기로 한 첫 번째 나라는 결국 인도네시아가 되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인도와 뭐가 다른 지도 모르는 나라였던 인도네시아는 알고 보니 발리가 있는 그 나라였다. 내 주변에도 살피고 보니 인도네시아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좀 있었는데, G백화점 근무 시절 친했던 직장 동료가 유년시절을 보낸 나라이기도했다. 나보다 먼저 직장을 그만두고 이태리에서 가죽 공정 과정을 숙지한 후 자신만의 가죽 브랜드를 론칭한 친구는 북촌 한옥 마을 근처에 뜨고 있는 디자인 거리에 작은 부티크를 내고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로 떠나기 전 친구가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도 물을 겸, 인도네시아에 대한 조언도 받을 겸 친구 부티크에 놀러 갔다. 커피에도 일가견이 있는 친구는 몇 평 안 되는 가게에서 따뜻한 에스프레소를 내려주며 나에게 말했다.
‘쓸라 맛 빠기!’
‘그게 뭐야?’
‘빠기~ 몰라?’
인도네시아 어식 아침 인사였다. 처음 들어보는 언어가 어색하고 웃기기만 했다. 한국으로 대학 진학을 하기 전까지 꽤 오랜 기간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냈던 친구는 인도네시아어가 쉽다며 몇 마디 알려주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그 나라에서 살다 온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인도네시아라는 낯선 나라가 그나마 좀 친근하게 느껴졌다. 당시 남편과 결혼을 한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비자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나는, 직장을 구해 비자 스폰서를 받는 방법밖에는 그 나라에 장기 체류할 방법이 없었다. 이를 이해한 친구는 나에게 잘 맞을 것 같다며 글로벌 성공시대에 나온 적이 있는 한국인 CEO의 회사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생각해 보면 그 친구에게 대놓고 내가 동거를 하고 있고, 인도네시아에도 미혼인 상태로 남편과 함께 갈 예정이라고 꼭 집어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충 내 상황을 이해하고 나를 편견의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고 나에게 맞는 조언을 해준 친구가 고맙기만 했다. 내가 인도네시아로 이동한 후에도 친구는 종종 내 안부를 묻곤 했다. 간혹 내가 인도네시아에 가서 직장 구하랴, 해외 생활에 적응하랴 힘들어하고 있는 걸 보면 친구는 이것저것 다 따지지 말고 힘들면 한국으로 그냥 돌아오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친구의 부모님은 은퇴 후 계속 인도네시아에서 생활 중이셨는데, 내가 힘들어할 때쯤 본인 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따로 불러내 밥 한 끼 사주시며 내 생활을 응원해 주셨다. 유년 시절 해외 생활을 오래 했지만 오히려 한국으로 돌아와 본인의 브랜드를 설립한 후 지금은 본인과 같은 길을 걷던 남편을 만나 열심히 자신의 브랜드를 키우고 있는 친구를 보면, 난 해외 생활한다고 온갖 벼슬은 다 부리곤 결국 남는 게 뭔가 싶을 때도 많다. 해외를 많이 돌아다니니 그마만큼 영감을 많이 받아 나도 친구처럼 언젠가는 내 브랜드를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무엇보다도 한 군데 정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내 나름의 길은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로 먼저 유명세를 탄 뒤 나만의 브랜드를 론칭하는 것이다. 이 다짐은 나름 인도네시아에 있을 당시 하게 되었는데, 사실 거의 6년이 지난 지금 난 엄청난 인플루언서로도 자리잡지 못한 상태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해내지 못하는 이유를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내가 속해 있거나 적중하는 타깃 마켓이 없어서 인가라는 생각을 종종 해본다. 유투버나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들이 아무리 여행을 많이 다니고 해외 활동을 많이 하긴 하지만 보통 본인이 속한 사회나 국가가 있는 상태에서 그 나라 언어로 그 나라 사람들을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밤 12시 5분. 아기와 남편이 잘 자고 있어 잠시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며, 아무리 여러 나라를 다니더라도 내가 속한 곳이 있어야 뭐든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그게 직장이든, 사업이든, 콘텐츠 크리에이터든 내가 생산해내는 일에 대한 관객이 있어야 결과도 따라주는 것이라는 매우 쉬운 진리를 순간 깨달았다. 그리고 이다음 우리 가족이 향할 길에는 내 관객이 있는 곳이길 마음속 깊이 바라본다.
*더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the_young_hei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