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심리학이 조언해 주는 인생의 중간 항로에서 헤매지 않는 법
건강 검진 결과가 좋지 않았다. 조직 검사를 받고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몇 년 전에도 조직 검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결과가 나쁘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해피엔딩일 거라 생각하면서 기다림의 시간을 채워갔다. 검사 결과는 절반만 해피엔딩이었다. 양성이지만 악성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큰 병원으로 가서 수술받기를 권유하였다. 대학병원에 가서 조직 검사 결과지와 의사 소견서, 슬라이드, 초음파 영상 CD 등을 제출하고 교수와 상담하니 동일한 의견이었다. 수술을 받는 것이 좋겠다는.
중년이라는 시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친구나 주변 지인들이 큰 병에 걸려 고생하는 모습을 보아 온 터라 이 정도의 결과에 만족하며 감사했다. 하지만 걱정거리를 나눠주고 싶지 않아 주위 분들에게 굳이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수술 일정과 수업 일정을 조율해야 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관계자분들께 말씀을 드리면 다들 걱정스러운 눈빛과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그분들이 배려해 주시는 마음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단단했던 내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중년의 위기라고 부르던가.
나의 경우처럼 건강에 이상 신호를 느끼거나 혹은 소중한 사람과의 사별을 겪으며 상실의 슬픔에 힘겨워하기도 한다. 배우자의 바람기나 이혼 등으로 원만하지 않은 결혼생활도 중년의 고민이다. 사춘기를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는 데 중년의 시기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삶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혼란한 중년의 시기를 슬기롭게 보내기 위한 가이드와 같은 책을 독서 모임에서 만났다. 그 책이 바로 제임스 홀리스의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이다.
저자인 제임스 홀리스는 이 책에서 융의 심리학을 바탕으로 중년 이후의 삶에서 겪는 심리적 어려움과 성장의 기회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중년의 시기를 중간 항로라 부르며 지금까지 우리가 진정한 자신에게서 멀어진 채 살아왔다는 내면의 신호가 나타나는 시기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유아기부터 가족과 문화로부터 얻은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그 렌즈가 실은 완전하지 않으며 세상의 일부만을 보여주고 이 불완전한 렌즈를 통해 잘못된 결정을 내려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간 항로를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12세부터 40세까지의 1차 성인기 동안 우리는 부모나 사회, 문화의 기대에 맞춰 사회화된 가면을 쓰고 페르소나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이 시기에는 자신의 개성과 감정을 억누르고, 진정한 본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 엄마이자 딸, 아내 그리고 강사 등 내가 맡은 사회적 역할의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간다.
중간 항로는 이러한 거짓된 자기를 깨닫고, 어린 시절의 자아인 내면 아이의 상처를 보듬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정하거나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개인의 모든 측면인 그림자를 직면하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삶은 천천히 사라지는 과정이자 상실을 경험하는 과정임을 인정한다. 부모와 남편 그리고 자녀를 완전한 타자로 바라보며 행복은 그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간 항로를 잘 지나간다면 위기라 여겼던 중년의 시기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더욱 풍요롭고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어쩌면 융의 말대로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을 넘어,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하여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내면의 모든 요소를 조화롭게 발달시켜 온전한 인격체로 거듭나는 심오하고도 중요한 심리적 여정인 개성화를 실현시킬 수도 있다.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서, 건강 이슈로 흔들렸던 나의 중간 항로를 이 책을 통해 다시 재정비하여 다가오는 노년의 삶을 웃으면서 맞을 수 있길 희망해 본다. 독서는 중년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긴 하루가 저문다.
느린 달이 오른다.
깊은 울림이 여러 목소리를
감싸고 돈다.
가자, 동지들이여,
새로운 세상을 찾기에
아직 늦지 않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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