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예방접종
독감 환자가 계속 늘고 있다. 가까운 주변에는 없지만, 건너 건너 소식이 들려온다. 그래서 나도 예방접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 놀이 시간에 외출을 내고 옆 반 선생님과 함께 가까운 보건지소로 향했다. 자가용으로 8분 거리. 선생님 차를 얻어 타고 가는 길에 내가 스마트폰으로 티맵을 켜 들고 있자 선생님이 주소를 말하며 차량 내비게이션을 켰다.
“어, 선생님 차에 있는 내비로 가게요?”
“아... 네. 폰 계속 들고 계시면 선생님 손목 아프시잖아요. 차 내비로 가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선생님의 따뜻한 말에 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이런 스윗함이라니...’
선생님 나이가 내 큰애보다 두세 살 많다. ‘참 고운 사람이다’ 싶은 생각과 더불어 문득 큰 애와 작은 애도 사회에서 이렇게 누군가에게 배려를 주고 살아가고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해본다.
마을을 지나자 도로 양옆으로 광활한 논이 펼쳐졌다. 추수가 끝난 지 한참이라, 잘린 벼 끝 사이로 기름진 흙빛이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집 담벼락마다 감나무가 서 있었고, 가지마다 주홍빛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차창을 열면 손을 뻗어 닿을 듯 가까웠다. 하지만 남의 감에 손을 대는 건 요즘 세상엔 범죄에 해당되니, 그저 눈으로만 감탄했다.
‘올해는 감이 풍년인가!’
어제 우리 반 아이가 감 열 개를 들고 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중 한 아이는 자기 집에 큰 감나무가 있어 매일 따먹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부러웠다.
하긴, 나도 어린 시절 살던 집 뒤뜰에 감나무가 있었다. 게다가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사과나무도 있었다. 주렁주렁 열린 열매들이 모두 내 차지였기에,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 많던 과일나무는 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열 살이 될 무렵 집을 허물고 땅을 파헤치며 목욕탕을 겸한 모텔이 들어서면서 어딘가로 실려 갔던지 그대로 말라죽었을지 모르겠다. 인간이란 믿을 게 못 된다는 비명을 지르면서 말이다. 이제는 그 건물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낡아, 다시 원룸으로 바뀌었다고 들었다.
가끔 그 동네를 지나칠 때면, 유년의 풍경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세월의 잔해가 먼 기억을 끄집어낸다. 내 영역이 사라져 버린 쓸쓸함이 명치끝을 건드리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면 다행이다. 적어도 내 안에는, 그 시절 감나무와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사과나무가 여전히 자라고 있으니까. 그 기억으로 난 가끔 숨을 쉰다.
늦가을의 고요한 풍경 속을 달리다 보니, 간이휴게소처럼 생긴 작은 조립식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보건지소였다. 푯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만큼 작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닥에 고무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 안에는 할머니 두 분이 전기장판 위에서 노란빛, 빨간빛 아래에 누워 계셨다.
“어떻게 오셨나요?”
모퉁이 안쪽에서 젊은 공중 보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독감 예방 접종하러 왔습니다.”
우리는 서류를 받아 이름과 주민번호를 적고 확인란에 체크했다. 그런데 보건의가 내 신분증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혹시 이 지역 분이 아니신가요?”
“네. 직장이 이쪽이라 왔어요. 사는 곳은 ○○시예요.”
“아… 여긴 지역 주민만 접종이 가능하거든요. 혹시 아까 전화 주신 분인가요?”
“네…”
보건의 표정이 진심으로 미안해 보였다.
“아이고, 이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우리도 “괜찮아요” 하면서 웃었지만,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깝다. 중간 놀이 시간만 날렸네…’
보건지소를 나와 다시 차에 올랐다. 출발 전에 이런 걸 꼼꼼히 물어보지 못한 건 우리 불찰이지만, 그래도 괜히 허탈했다. 차는 먼지 자욱한 시골길을 따라 되돌아갔다. 그러다 우리 앞에 아주 큰 농기계를 실은 트럭이 나타났다. 날개처럼 뻗은 쇠창살이 도로 가장자리의 나뭇가지를 여지없이 베어내며 지나갔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아이고, 참…”
맥없이 잘려 나가는 가지들을 보며 동시에 탄식을 내뱉었다. 마치 나무의 비명을 대신해 주듯이 말이다.
시계를 보니 중간 놀이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독감 예방접종이라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데다 배까지 고프니 괜히 손해 본 기분이었다. 학교로 돌아와 교무실에서 선생님들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모두 안타까워했다. 그때 교감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좋은 날씨에 잠깐 머리 식히고 드라이브했다고 생각해요.”
맞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하지 않던가. 교감 선생님의 한마디에 불과 몇 분 전까지 느꼈던 허망함이 스르르 풀렸다. ‘오늘은 접종은 못 했지만, 덕분에 늦가을 풍경을 실컷 보고 왔으니 그걸로 충분하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독감 예방주사는 맞지 못했지만, 오늘은 몸 대신 마음이 예방접종을 받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