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해서 청춘이다?
생초보 인수봉을 오르다
내가 처음 오른 산은 북한산이었다. 그것도 숙달된 등반기술과 전문가용 장비가 있어야 오를 수 있는 인수봉이었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북한산으로 갔으나 정릉 계곡에서 김밥을 까먹고 온 게 다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망우산 송충이잡이에 동원된 적도 있었으나 역시 등산을 간 건 아니었다. 거대한 혹처럼 솟아있는 묘지 사이 장승처럼 서 있는 소나무 솔잎을 갉아먹는 송충이 사냥이 목적이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인수봉에 올라간 건 연극 동아리에서 만난 이승호라는 친구의 꾐에 빠져서였다. 고교 시절 산악부에서 활동했다는 승호는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에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평소 말도 없고 조용한 성품을 지닌 승호가 암벽등반을 즐긴다는 게 주로 까불이들이 모인 연극반에 들어왔다는 것만큼 신기했다. 2층 높이에서도 다리가 떨리던 내겐 매우 과격하고 위험한 취미로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암벽등반을 즐기자고 꾄 건 아니었다. 우리 같은 생초보를 데리고 등반하는 게 얼마나 위험할지 그 친구도 모를 리 없었다. 어느 정도 친해지기까지 암벽등반 얘기도 일절 하지 않았다. 아마도 고교 시절 산악부 선후배들과 어울려 등반을 즐기곤 했겠지. 그러다 마침내 손을 내민 건 우리 학교가 인천에 있다는 지정학적 이유 때문이었지 싶다.
아는 이들은 알지만, 인천 남구에 소재한 인하대학교는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으로 설립된 학교였다. 한국전쟁 이후 황폐해진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에 보탬을 되라는 교포들의 염원을 바탕으로 1954년 인하공과대학으로 출범했다. 교명인 인하는 인천의 하와이라는 의미로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따서 명명했다. 무려 이승만 대통령의 발의로 설립되었으며 초대 이사장은 부통령 이기붕이었다.
내가 입학하던 해인 1979년 인경호라 불리는 호수 인근 정원에 설립자인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듬해 서울의 봄 당시 적지 않은 학생들이 학내 민주화를 외치며 동상 철거를 시도했으나 불발되다가 1984년 운동권 학생들의 시위 끝에 철거되었다. 당시 나도 시위에 참여했는데, 강제 징집을 당하면서 제적되었다가 1983년 말 갑자기 취한 전두환의 유화정책 덕분에 복교한 뒤였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샜다. 다시 돌아가 승호가 산에 가자고 나를 꾀었던 이유를 살펴보면, 인하대학교가 가진 지정학적 특성 때문이었음이 분명했다. 명문사학답게 전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많았는데, 수도권 출신이 가장 많았다. 특히 서울에서 등하교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청량리에서 서울역 거쳐 인천역까지 이어지는 전철을 이용했다.
전철이 학교까지 바로 연결되지 않아 보통 주안역에서 하차해 버스로 갈아타야 했으며 등하교 때마다 만원 전철, 만원 버스에 시달리곤 했다. 교통편이 열악해 학교 후문 근처에서 하숙하거나 자취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학교 주변이 학생들의 주요 생활권이 되면서 만나는 이들도 한정되어 갔다. 신입생 시절에는 그래도 서울에서 알았던 친구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점차 힘들어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미팅이나 소개팅도 학교 주변이나 인천에서 하게 되었다.
승호 역시 학교가 아니면 산 친구를 찾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런 환경 변화가 나와 같은 생초보를 산으로 이끌게 된 배경이었다. 확실했다. 나 말고도 오현창, 안홍식 같은 동아리 친구들도 승호의 꾐에 빠진 걸 보면 알 수 있다. 나만큼이나 산하고는 담을 쌓고 살았던 친구들이었으니까.
첫 번째 여름방학 때였다. 승호의 꾐에 빠진 나와 현창이는 우이동에서 만나 산행을 시작했다. 변변한 등산화는커녕 운동화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등산복이 따로 있다는 것도 몰랐던 시절, 교련복 바지에 면티 한 장 걸치고 나선 나와 현창이는 제대로 차려입고 배낭에 자일과 카라비나, 하켄 따위를 가득 담아 온 승호를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모해서 청춘이다
그렇게 도선사 광장에서 지금은 폐쇄된 깔딱고개 코스로 숨이 턱에 찬 상태에서 할딱거리며 두 시간여 올라가 마침내 능선에 섰다. 연기 자욱한 계곡 건너로 위용을 자랑하는 백운대와 인수봉이 보였다. 연기는 등산객들이 밥을 짓거나 고기를 구우며 만들어낸 것이었다. 아직 국립공원에 지정되기 전이라 불을 피운다고 제재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철이나 고속버스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밥 해 먹을 장비도 시간도 없어 승호가 준비해 온 주먹밥과 햄으로 간단히 요기를 때웠다. 그때 먹어본 스팸의 짭짤하고 고소했던 맛이 지금도 기억난다. 태어나서 그런 맛은 처음이었다. 알고 보니 승호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랬으니 제대로 된 등산화에 멋진 등산복, 각종 장비를 갖추었겠지.
인수봉 하단 대슬라브 측면에서 등반을 시작했다. 승호가 선두를 맡고 현창이가 중간, 내가 후미를 맡았다. 키 큰 내가 선등 하는 친구들을 확보하면서 사용한 장비를 거두며 올라가는 후미가 어울린다고 승호가 맡긴 참이었다. 처음 시도한 암벽등반은 참으로 힘겨웠다. 그냥 등산도 어려운데 밤톨보다 작은 홀드에 의지해 가파르고 미끄러운 바위를 오르다니, 한 피치를 마치기도 전에 엄청난 두려움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했다. 하산하려면 자일을 안전하게 걸칠 수 있는 고정 피톤이나 거목 등이 있어야 하는데, 등반 도중에는 그런 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초주검 상태에서 인수봉 정상에 섰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바로 하산해야 했다.
그렇게 난생처음 올라선 정상을 즐길 겨를도 없이 난생처음 배운 압자일렌 기술을 이용해 하산을 마쳤을 땐 완전히 해가 저문 후였다. 다음 날 아침 문자 그대로 피똥을 싼 나는 암벽등반은커녕 다시는 산에 가지도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승호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피식 웃으며 커다란 봉지 하나를 건넸다. 키는 작지만 발은 컸던 승호가 신던 등산화와 스팸 두 캔이었다.
일주일도 되기 전에 다시 바위에 붙었다. 다만 인수봉처럼 초급자에게 위험한 코스는 타지 않았다. 나보다 빨리 등반기술을 익힌 현창이는 승호랑 짝을 이뤄 어려운 코스도 오르곤 했으나 원체 겁이 많고 체력도 약한 나는 쉬운 코스만 겨우 따라 올랐다. 그러다 도봉산 선인봉 표범 코스를 오르던 도중 승호의 실수로 추락할 뻔한 다음에는 암벽등반을 끊었다. 그나마 대학을 졸업한 후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일절 산에 가지 않았다.
산이 좋고 등산이 즐거워 하필이면 산이 많은 대한민국에 태어나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노래를 하는 나지만 지금도 인수봉 올랐던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이 조여든다. 제대로 등반기술도 익히지 않았던 내가 체력도 젬병인 내가 어떻게 인수봉에 오를 생각을 했을까? 승호는 무엇을 믿고 나 같은 친구를 데리고 인수봉을 오르려고 했을까?
무모함이었다. 청춘이었다. 죽음이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 죽음이 실감되지 않는 나이, 내일도 없고 미래도 없는 것 같아 모든 게 아득해지고, 그래서 더욱 우울해지던 시절, 그런 시절의 치기, 그런 무모함. 아파서가 아니라 무모해서 청춘이라고나 할까? 어느 정도 끝이 보이는 나이가 되니 그 시절, 그 청춘, 그 무모함조차 새삼 그리워지긴 한다.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인수봉 오를 생각은 안 할 것 같다. 무모해서 아름다웠던 시절, 청춘은 지나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