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한 끗 차이

by 고요


물티슈를 꺼내 가스레인지 후드를 닦았다. 가스레인지 주변과 싱크대 바닥 여기저기를 닦고 버린다.
다시 또 한 장을 꺼내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휴지통이 금세 차기 시작한다. 행주를 빨지 않아도 되니 일이 간단했다. 바닥을 닦을 때에도 걸레를 사용하지 않으니 손목이 시큰거리지 않았다. 물티슈 하나 쓰지 않는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지 않은 오늘 하루, 락스 한통을 쓴다고 죄짓는 것이 아니라고!

그냥, 이런 날이 오늘 단 하루로 끝난다 하더라도 지독한 세제를 사용하여 편하게 청소를 마쳤다. 아이들에게 인스턴트를 먹이지 않는다고, 재활용을 해서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다고 눈에 띄게 나아지지는 것도 아닌데 좀 더 편하게 사는 것이 뭐 어떻다고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왔던가.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만 미련 떨기로 했다. 살던 방식에 물음표가 생기니 그동안 맞다고 생각했던 삶에 자신이 없어졌다. 한 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좌표를 잃은 배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 멈춰서 버렸다.

꿈 2019

거센 비바람이 몰아칠 때는 어떤 우산으로도 막아지지 않는다. 우산을 바로 쓰려해도 이리저리 흔들려 비를 맞기 십상이고 갑자기 강한 바람으로 우산이 뒤집어지면서 우산은 망가지고 머리를 타고 빗물이 흘러내린다. 이럴 때는 우산을 쓰기보다는 비바람을 그냥 맞는 것이 더 편하다. 어차피 맞을 비를 우산으로 요리조리 피해봤자 이미 옷은 젖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젖어버릴 것을 이리저리 몸은 부산하기만 했다. 어디로 급하게 비를 피할 것인지 머리를 움직여본다. 카페로 뛰어들어가 뜨거운 차를 마실까? 그대로 맞으며 집으로 뛰어가 샤워를 할까? 스치는 많은 생각들을 하며 발걸음을 종종거린다. 우리는 순간순간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들을 대처하면서 위기를 모면한다. 섣부른 판단이 더 위험한 상황을 만들기도 하지만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된 판단이 필요하다. 위기상황에서 슬기로운 판단과 선택은 어떻게 해야 빛이 날까?


어처구니없는 나의 행동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으니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위로도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사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면서 불쑥불쑥 들어오는 다양한 변수들은 나를 단련시키기도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사이즈는 포기라는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삶을 포기한다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은 아직도 잃을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느 날 목구멍 깊은 쪽에서부터 욕이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 나를 죽이고 싶다 “

”나를 죽여버리면 좋겠어 “


그리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우산을 다시 써본다. 흔들리던 우산이 바로 세워지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우산으로도 막아지지 않았던 비바람이 빗겨 지나가고 위로가 위로로 들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감당이 안 되는 고통을 겪으면 ’ 죽고 싶다 ‘라고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죽고 싶다가 아니라 죽이고 싶다니 이건 또 어떤 감정일까? 어떤 심리이면 나를 죽이고 싶다는 것일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결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른데 이번에는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과 다르게 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뭐지? 살면서 처음 겪는 고통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단지 그것이 피해 금액의 크기만은 아니었다.

왜 나는 도망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을까?

겸손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기에 타인을 존중했고 좀 더 불편하거나 손해 보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지 않아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내 행동은 분명 실수였다. ’ 나도 잘못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은 곧 ’ 나에게 자만했었구나 ‘라는 말로 대신했고 교만했던 내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교만함이란 자신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기 때문에 때문에 나도 모르게 계속 가속페달을 밟으며 끝없이 달리게 만들 수도 있다. 늘 겸손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겸손과 교만의 경계에서 그 미묘한 한 끗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라는 후회 속에서 본능적으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도움을 요청하고 이렇게 사람들을 향해 글을 쓰면서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다. 나를 나에게서 분리해서 바라보니 시야가 좀 더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 자기 연민이 문제안으로 깊게 자리를 잡으면 걷잡을 수 없이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해서 감정을 소비하게 한다. 나를 타자화하면서 그것을 걷어내려 했던 마음이 내 입에서 “나를 죽이고 싶어”라고 나오게 했던 것이었을까?.


그 말은 아주 시원했고 통과했다. 죽고 싶다는 것은 그것으로 종료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뜨거워진 컴퓨터의 종료 버튼을 누르는 행동 하나로 모든 상황을 종료시키게 된다. 그런데 죽이고 싶다고 하니 그다음에 어떤 말을 하고 싶어 졌다. 죽이는 것은 끝이지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행동을 할 수 있는 내가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다. 끝이지만 끝이 아닌 것. 소멸되었지만 다시 생성하는 자연의 원리처럼 끝이 있는 나의 행동은 또 다른 생성을 위한 나를 만들고 있었다. 탄생과 함께 봄으로 시작해서 역동하는 여름을 지나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봄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다. 단식을 하면서 몸안에 남아있는 많은 당과 노폐물을 태우며 다시 나를 만들어내고 있다. 넘쳐났던 것과 부족했던 나를 떠나보내게 될 것이다. 수없이 향하고 뒤섞이고 해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더이상 쪽팔리지 않게!


어느 날, 오아시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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