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임신을 하게 되면서 막연히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십 여년간 도시에서 화실을 하던 나는 많은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었다. 수업시간외에도 남아있는 아이들과 화실에서 오랜시간 지낼만큼 아이들을 이뻐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같이 있는 시간들이 줄어들었다.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화실은 많은 일과중 거쳐가는 하나가 되었다. 아이들은 할 일이 많아졌고 쫒기듯 바뻐졌지만 무엇을 그려야 할 지 모를 만큼 빈곤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너무 바쁘면 안된다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결국 세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머리 속에 그려보았던 그림 같은 삶을 '마음속 이상향'으로 남겨둘 뻔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인지 행운인지 모를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마음껏 아이들이 뛰어다니면 좋겠어.’ 라고 했던 막연한 상상이 현실이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첫 아이, 바다라는 태명의 아이가 우리에게 왔다. 엄마 아빠가 바다를 좋아하고 바다에서 만났기에 바다라고 이름 지었다. 아이는 2박3일 긴 진통속에 어렵게 왔었고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풍욕과 일광욕을 하며 행복한 한달을 보냈다. 하지만, 누가 한치앞을 못보는 것이 인생이라 했었나. 마치 폭풍처럼 변주되는 악장이 난무하는 공연이 될 것이라고는 그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고요한 서막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가 테어나고 한 달무렵부터 얼굴에 뾰로지가 하나 둘씩 나더니 번져갔다. 여러 병원을 다녀도 태열이라고 했고 크면서 없어진다고 했었다. 하지만 아이의 발진은 점점 몸으로 퍼져 나갔고 발진에서 멈추지 않고 진물이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아토피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해 볼 수 있는 방법을 다 해본 우리는 결국 마지막으로 지리산으로 아이들을 데리고가서 단식을 시켰다 그리고 자연의 아이로 키워야한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면서 시골로 가는 것으로 결정을 하게되었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나는 화실을 정리해야 했으니 어찌보면 무모한 결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힘들어 하는 아이를 바라보면 무엇이든 해야만 했었다.
가기로 마음을 먹기까지가 어려웠지 그 다음은 간단했다. 지도를 펼쳐놓고 어디로가야할 지 결정하고 맑은공기와 좋은 자연, 그리고 편리한 도시의 생활이 가능할 것같은 춘천의 사암리로 이사를 갔다. 좋은 집을 찾았다며 구경을 가던 날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 날은 비가 왔다 그친오후무렵이었다 남편이 대문을 열고 다시 차에 타더니 집안으로 차를 몰고 내려가는 데 비가 그친 다음이라 땅위에 물안개에 피었고 수분이 가득한 공기로 시야는 뿌옇게 아련했다. "어머, 세상에나, 이런집을 어떻게 찾았어?" 오래된 시골집이었지만 집 주변의 대지가 6천평으로 광활했다. 낡은 집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인아주머니를 만나 바로 그자리에서 계약을 하고 그집을 빌렸다. 그야말로 저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은 아니어도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300여미터의 아름다운 벚꽃길이 펼쳐지는 그런 집 , 집안에 개울이 흐르고 갖가지 과실나무가 있어서 철마다 아침 산책에 한바구니 주워 담아 집으로 올 수 있는 그런 집을 빌릴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자연에서 산다는 것은 사계절을 온 몸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느끼는 만큼 그것은 온통 내 몸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소유 할 수는 없으나 소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자연이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길은 계절이 바뀌어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만들었고 이내 붉게 빛났으며 겨우내 눈꽃을 피웠다. 계절마다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탄성을 지르게 했으며 밤마다 생애 처음의 노동으로 신음을 내게 했었다. 흐드러지게 내리는 꽃비는 바닥의 꽃을 쓸어모아 하트를 만들어 사랑을 고백하게도 했지만 아름다움에 홀려 놔두었다가 봄비라도 내리면 바닥에 들러붙어 치우는 것을 고되게 만들기도 했다. 낙엽역시 탄성과 신음을 서라운드로 만드는 요물이었지만 그 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나가던 차나 사람들이 무심결에 들어오게 되는 우리집은 낯선이가 들어와 말을 건네야 사람 구경을 할 만큼 외진 곳이었지만 자연속에서 자유롭게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건 우리 부부가 포기했던 것들의 보상으로 충분했었다.
다섯명이서한방에 누우면 꽉 찼던 시골집 , 추운겨울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면 등은 뜨겁고 코는 시렵고 입을 벌리면 허연 김이 입으로 뿜어져 나왔던 그 곳에서 30대를 뼈 빠지게 일을 해야 했다면 그 시절이 너무 고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사암리 넓은 잔디밭과 벚꽃길, 그리고, 그 아래에서 게임속 카트라이더처럼 붕붕카를 타고 내려오던 개구쟁이 아이들, 이름모를 수많은 야생화를 알아가며 그림을 다시그리게 된 그 순간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돌아서면 집안일이었고 돌아서면 바깥일 이었던 그 시절을 이제는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 ’으로 기억한다. 기억은 언제든지 나에게 유리하게 편집할 수 있는 나의 것이니깐.
아는 것이라곤 쑥밖에 몰랐을 만큼 무지했었다. 그 것도 확신이 안들면 냄새를 맡아봐야 했을 만큼 자연을 몰랐었다. 어느 날 아침, 풀 속에 새롭게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을 발견하고서야 그들의 존재감을 알게 되었다. 풀 속에는 다른 풀이 또, 다른 풀이 각기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단지 그 것을 뭉뚱거려 모두 하나의 풀이라고 생각했었다. 무심코 지나쳐 버린 나에게 보란 듯이 피어나는 꽃들에게 홀려 필름사진 찍듯이 매일매일 눈으로 찍었다. ‘찰칵찰칵’ 눈으로 셔터를 움직여 머리로 현상하고 기억으로 인화한다.
요즘은 모두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파일로 보관하기 때문에 종이에 인화되어 나오는 사진을 보기 힘들다.여권사진이나 만료되면 인화를 할까? 15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가야 하는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모바일폰의 카메라기능이 없었더 시절이어서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그것도 여의치않으면 눈으로 찍고 스케치를 했었다. 쑥도 냄새를 맡아야 알 수 있을 정도로 무지했던 나에게 아이가 이름을 물어보면 그 대답이 궁색해서 도감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숨은 그림찾듯이 발견한 풀이나 꽃을 도감에서 찾아보고 이름을 가르쳐주면서 나도 같이 배웠다. 오후가 되면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았던 큰아이와 작은아이 셋이 집을 나선다. 큰아이는 저 만치 걸어가고 있고 작은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뒤따라 서 가고 있다. 나와 거리가 떨어지면 큰 아이는 뛰어서 다시 되돌아와서 나에게 말을 건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야기하며 걷다가 지루하면 유모차로 드라이브하듯 빠르게 몰면 작은아이는 까르르 웃고 큰아이도 함께 뛴다. 그렇게 집에서 5키로 정도 떨어진 마을 도서관에 도착하면 도서관마당 벤치에 앉아 감자와 옥수수를 먹은 후, 도서관에 들어간다.
한두시간 책을 보고 큰아이는 그림책을, 나는 식물도감을 빌려 5키로를 걸어 다시 집으로 돌아 왔다. 빌린 식물도감을 펼쳐보며 아이들과 되돌 아오는 길에 이름 모르던 그 꽃에 제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들 의 이름은 애기똥풀과 닭의장풀, 패랭이, 채송화, 둥글레, 괭이밥, 쑥부쟁이, 원추리, 금계화라는 낯선 이름이었지만 기억하기도 쉬운 재미있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아주 흔한 꽃이었으며 선한 들꽃이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자연이 매일매일 가꾸는 꽃들의 잔치에 밥숟가락만 얹으면 되었다. 흔한 것은 몸에도 좋아서 원추리, 민들레, 질경이, 비름 둥글레 등등. 모두 나물로 먹을 수 있었고 설탕에 재우면 효소가 되었고 약이 되었다. “아, 어릴 적 교과서에서 배우고 노래불렀던 채송화가 이렇게 생겼구나.” 공부만 하면 뭐하냐 세상, 아는 것이 없었네. 그렇게 계절이 6번바뀌는 동안 셋이 걷던 길을 넷이 걷게 되었고 운좋게 퇴근하는 남편을 만나면 다섯이 힘께 걸었다.
어느 날 아침, 찬거리를 뜯으러 나왔다가 새색시 같은 꽃을 보았다. 보는 순간, 부끄럼타는 꽃이라고 이름을 붙여주고 꽃의 이름을 찾아 보았다. 결국 도감에서는 발견하지 못했고 며칠이 지나서 알게 된 이 꽃의 정체는 ‘꽃무릇’이라는 이름의 꽃으로 야생에서도 잘 자라는 꽃이다. 보통 상사화라고 불리는 이꽃은 종자가 다양해서 모양이 조금씩 달랐던 이유로 책에서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상사화라 함은 상사병, 즉 사모하는 꽃이라는 뜻이다. 꽃이 다 피고 져야 잎이 나오는 꽃으로 잎과 꽃은 서로 만나 볼 수 없다고 해서 "상사화"라고 불린다고 한다. 사모하는 꽃이라더니 서로 만나지도 못하는 그야 말로 비극의 주인공처럼 결국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의 꽃이라는 것이다. 꽃도 참으로 딱하지만 이 꽃을 보고 누가 상사화라고 이름지어주었을까? 그것도 궁금했다. 자신의 처지를 빗대서 꽃에 비유했을까? 정말 이루지 못한 사랑이었을까? 아님 다행히 헤어지지 않고 부부의 연을 맺기는 했는데 서로의 언어가 달라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남여의 현실을 비추었을까? 꽃 한 송 이를 보고 혼자서 소설 한 편을 썼다 지웠다 하고 있었다. 연하디 연한 분홍색의 꽃이 말을 못하고 서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롯이 그 감정의 서사가 애잔하게 전해져 머리속에 오래 자리잡은 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