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사람들은 우리를 '차박 전문가'로 추켜세우기도 한다. 일견 일리 있는 말이다. 차박 유튜버 생활을 5년 넘게 했고, 가 봤던 차박지 역시 300곳이 넘으니까. 그러나 이런 우리에게도 감추고 싶은 흑역사는 있다.
을왕리와 연천에 다녀온 이후 차박에 자신감이 붙은 우리는 처음으로 멀리 나가보기로 했다. 목적지는 강원도. 우리의 계획은 '무계획'이었다. 대충 동해로 행선지를 정한 뒤, 근처에 있는 해수욕장을 쭉 둘러보기로 했다. 그중 괜찮은 곳을 골라 1박 2일 차박을 하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우리는 주로 네이버 카페를 통해 차박지 정보를 얻었다. 회원님들은 친절하게도 노지의 상태는 물론, 차박이 가능한지의 여부, 나아가 주변의 맛집까지 사진으로 찍어 올려주셨다. 그러나 문제도 있었다. 후기만 보고 덜컥 따라갔다가 '차박 금지' 현수막이 붙어 있는 걸 보고 허망하게 돌아온 적도 많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뭐가 됐든, 일단 떠나보자.
세 시간이 넘는 시간을 달려 우리는 가까스로 동해에 도착했다.
무계획으로 왔어도 의외로 차박 할 만한 곳을 찾기는 쉬웠다. 해수욕장 주차장에 캠핑카나 스타렉스, 도킹 텐트들이 보이면 그곳이 바로 명당이니까.
느긋한 마음으로 몇 군데 쭉 둘러본 우리는 대진항 주차장에 자리를 잡았다. 대진해수욕장은 아직 사람들이 많이 붐비지 않는 한적하고 조용한 바닷가였다. 게다가 깨끗한 화장실도 있었다. 이만하면 1박 2일 차박을 하기에 손색없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보기만 해도 가슴이 부풀어 오를 만큼 황홀했던 바다의 풍경이었다.
어스름 해가 질 무렵의 대진항은 살면서 봤던 바다 중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다웠다. 노을에 반짝 빛나는 윤슬. 맨바닥이 다 보일만큼 깨끗한 바닷물. 잔잔한 파도가 밀려드는 고요한 소리까지.
"여기 진짜 대박이다."
나는 혼잣말을 주억거리며 쉴 새 없이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세 시간을 걸려 달려온 것이 전혀 후회되지 않을 만큼의 값진 사이트였다. 그래서 좀 더 가까이서 즐기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다만 실컷 보고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은바도 신이 난 모양인지 바닷가 앞쪽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차박은 어쨌든 지금 내가 차를 세우는 곳, 그곳이 바로 사이트다.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까지 가 보자.
"민바야. 좀만 더 앞으로 갈게."
어느새 백사장 앞에 차가 다다랐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가볼까?"
그렇게 좀만 더, 더, 하다 보니 결국 사달이 났다.
"엇. 이거 왜 이래?"
느긋하고 침착한 성품의 은바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덜컥 겁부터 났다. 아니나 다를까. 앞바퀴가 백사장에 빠져 헛돌고 있었다. 후진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졌다.
게다가 우리의 팰리세이드는 이륜이었다. (심지어 아무런 옵션도 넣지 않은 깡통 차였다) 모래에 바퀴가 빠진 건 처음이라 온몸에 땀이 다 났다. 과연 차박은 할 수 있는 걸까? 지금 상황에선 그런 생각마저 사치다. 일단 어찌저찌 검색을 해서 렉카부터 불렀다.
"허허, 아니 거길 왜 들어가셨대?"
핸드폰 너머로 담당자 아저씨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예, 그러게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종종 있는 일이에요. 금방 가요."
금방 오겠다는 선생님께서는 바닷길을 달리고 달려, 무려 삼십 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도착하셨다.
은바가 다시 운전석에 올랐다. 그제야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렉카와 팰리세이드를 겨우 연결했다. 반대쪽에 있는 렉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래를 파고든 팰리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심장이 또다시 두근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의미한 5분이 지났다.
"사이드 푸셨죠?"
급기야 렉카 선생님이 은바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왜 사이드가 안 풀리지?"
은바는 그 말만 반복하며 당황한 듯 연신 좌우로 눈동자만 굴려댔다. 또다시 무력하게 10분이 흘렀다.
"사이드가 안 풀려 차를 뺄 수가 없다네요."
렉카 선생님이 다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30분 뒤. 긴급 출동 서비스가 도착했다. 어찌저찌 몇 분 동안 애쓴 끝에 자동차 스캐너로 겨우 사이드를 풀었다. 팰리세이드는 지친 패잔병의 모습으로 그렇게 모래 속으로부터 질질 끌려 나왔다. 장장 2시간 만에.
이미 해가 져 버린 지 오래였다. 해수욕장엔 어둠만이 감돌았다. 차박을 하고 싶은 의지도,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이럴 거면 도대체 여기까지 나를 왜 데리고 온 거야? 허탈한 마음으로 바닷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은바는 슬슬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카 텐트를 트렁크에 씌웠다. 기분을 풀어주겠다며 훈제 삼겹살도 구워줬다. 속도 모르고 삼겹살은 또 맛있었다.
돌아오고 난 뒤 영상 편집을 시작했다. 어찌나 당황했던 모양인지 백사장에 빠져 있는 팰리의 모습만 잔뜩 찍어왔다. 이런 허접한 영상을 사람들이 과연 봐줄까? 어설퍼 죽겠다고 욕이나 하는 건 아닐까? 여러모로 속이 상했다. 어찌저찌 겨우 영상을 업로드 한 다음 날.
"자기야! 대박이야!"
은바가 활짝 웃으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뭐가 대박이라는 건데? 아아, 200개가 넘는 악플이? 내가 너무 속상해하니까 먼저 선수 치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댓글 창엔 악플이 가득했다. 스크롤을 넘겨도 넘겨도 끝이 없었다.
(뒤에 욕은 생략)
(역시 뒤에 욕은 생략)
(악플 관전 중인 구독자님)
(그 와중에 이렇게 따뜻한? 댓글도 있었다)
"지금 이거 보여주려고 나 부른 거야?"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다 났다. 그런데 은바의 시선이 아까부터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대박이 났다. 조회수가.
무려 10만 뷰를 넘었다.
세상에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물론 어그로를 끌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우리 채널도 10만 뷰 넘는 영상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이없이.
좋다고 실실 웃고 있는 은바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은바는 나와 달리 맷집이 좋은 편이다. 나는 2017년에 뮤지컬 작가로 입봉 한 이래 지금까지도 악플만 보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혹여나 부모님이 내 공연을 보러 오실 때면 일단 당부부터 한다.
"제발 화장실에는 가지 마."
가장 빠르게, 가장 신랄하게, 비평의 장이 열리는 곳이 바로 공연장 화장실이다. 물론 관객들이 공연을 보고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건 그들의 자유다. 그러나 혹여 부모님이 안 좋은 소리를 엿듣고 (그러니까 주로 대본 욕) 속상해할까 덜컥 겁부터 났다.
하지만 은바는 좀 다르다. 자신이 출연한 공연에 대한 악의적인 비평 글도 여러 번 정독하고, 심지어 파일로 정리까지 해 두는 악취미를 지녔다. 어쩜 이렇게 재미있게 악플을 쓸 수 있냐며 캡처까지 하는 이상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은바는 악플보다 대박이 난 조회수에 더 기뻐했다. 그리고 참 이상하게도 바바TV는 그 영상을 기점으로 구독자 수가 날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주 뒤.
주로 바다만 찾아갔던 우리는 열심히 서치를 한 끝에 '비내섬'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이미 여러 차박러들로부터 '노지 성지'로 인정받은 곳이었다. 남한강 물줄기가 시원하게 뻗어있고, 무엇보다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섬이어서 그런지 경치가 기가 막혔다. (지금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캠핑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이번에는 은바와 같은 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기까지 합류하기로 했다. 민기는 우리보다 몇 년 일찍 캠핑을 시작한 전문가인데 특히 '그릴'을 잘 다뤘다. 이번에 함께 가는 이유 역시 우리에게 그릴로 훈제 고기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신상 '웨버 그릴'과 통목심을 챙긴 우리는 2시간 만에 비내섬에 도착했다.
일회용 용기에 훈연칩과 맥주를 놓고 그 위에 통고기를 올렸다. 훈제에 걸리는 시간은 장장 5시간.
고기도 올려놓았겠다, 우리는 민기가 뚱땅뚱땅 연주하는 기타 소리에 맞춰 느긋하게 노래도 불렀다. 평일이라 그런지 비내섬엔 우리 이외에 스타렉스 한 팀밖에 없었고 그래서 더 여유롭게 차박을 즐길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은바의 목소리에 이상한 효과음이 얹어진 건 그때였다.
"야, 저거 뭐야? 설마...."
그러니까 그 소리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헬기 소리였다.
헬기가 왜 이쪽을 향해 턴을 하는지 이유는 몰랐지만, 어쨌든 봉변을 당했다. 도마 위에 가니쉬로 먹을 야채를 올려놨는데 흙바람에 다 날아갔다. 저녁 메뉴가 뚜껑을 덮고 하는 훈제 고기여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흙만 잔뜩 씹다 돌아올 뻔했다.
그 밖에....
이렇게 바람에 날아가는 텐트를 간신히 부여잡은 적도 많았고,
세상 온갖 벌레들과 씨름하며 잠 못 이룬 날도 많았다.
어쨌든 이렇게 고생스럽게? 차박 한 영상은 조회수가 잘 나왔다.
이쯤 되니 바바TV 구독자분들은 우리가 X고생하는 걸 유독 좋아하는 악취미를 가진 분들인가? 싶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솔직히 우리도 그 영상을 보면 재밌다. 그때의 에피소드는 지금도 훌륭한 안줏거리다.
깨끗한 캠핑장에서 좋은 장비 갖추고 쾌적하게 차박을 한 건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노지에 가서 있는 대로 고생했던 차박은 지금도 세세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의 감정, 그때의 풍경, 그때 나눴던 대화까지 모두.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언젠가부터 노지 차박을 가지 못했다. 차박 인구가 많아지면서 흔히 말하는 '차박 명당'이 죄다 막혔기 때문이다. 바로 쓰레기 때문에.
차박을 하면서 생긴 생활 쓰레기는 물론, 커다란 텐트와 장비까지 버리고 가는 사람들도 봤다. 게다가 '불멍'은 꼭 화로대 위에서 해야 하는데, 그냥 맨바닥에 장작을 깔아놓고 불을 붙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 개념 없는 차박인들로 인해 지역민들이 고통을 겪다 보니, 지자체에서 어쩔 수 없이 '차박 금지' 현수막을 내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여러 번 생각해도 역시 차박의 매력은 잘 갖춰진 캠핑장이 아니라 노지에서 하는 차박이다. 일단 보이는 풍경 자체가 다르다. 아무리 조경이 완벽한 캠핑장이어도, 자연이 깎아 놓은 주상절리를 이길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설령 노지로 차박을 가게 되더라도 정확한 장소는 절대 영상 안에 노출시키지 않는다. 영상을 찍어도 많은 부분을 '클린 캠핑' 캠페인에 할애한다. 쓰레기봉투도 일부러 큰걸 들고 가서 우리가 만든 쓰레기도 챙겨 오고, 주변에 보이는 쓰레기들 역시 주워서 온다.
음식물은 맛집에서 포장해 가거나 먹을 만큼만 싸간다. 처리하기 어려운 국물 요리 같은 건 최대한 배제한다. 일회용 그릇은 쓰지 않고 나무 그릇을 쓴다. 음식이 좀 묻더라도 물티슈로 가볍게 닦은 다음 집에 와서 다시 설거지하면 그만이다. 자연에 빚진 차박을 하는 만큼 이런 룰은 더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쩐지 요즘따라 노지 차박을 자유롭게 즐겼던 예전이 많이 그립다. 여러모로 어설펐고 사건 사고도 많았지만 그래서 더 재미는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어쩌면 그때가 우리의 흑역사가 아닌 차박 호시절이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