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말거나라 시리즈
* 이전 글들에 공감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이론 대신, 생각을 다른 각도에서 건드려보고자
안쪽에 오래 넣어두었던 짧은 이야기 하나를 꺼냅니다.
‘정상’, ‘이상 없음’, ‘문제없음’, ‘정상’, ‘평균’, ‘보통’, ‘해당 없음’
닥터 레프가 들고 있는 자신의 검진 결과였다. 레프 씨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강연 초청을 받을 만큼 내과의사로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오랫동안 겪고 있는 복통의 원인과 치료에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글쎄, 진찰 결과 특별히 이상하거나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 아마도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위가 예민해 지신 것 같습니다. 일단 3 일분 약을 처방할 테니 이 약을 먹어보고 그래도 낫지 않으시면 다시 한번 검사하시죠.’ 세 번째 병원에서도 그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닥터 레프는 가장 먼저 자신이 근무하는 국내 최고의 종합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지만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의사라는 신분을 감춘 채 병원을 바꿔가며 청진기, 엑스레이, CT 촬영, MRI, 혈액검사, 위내시경 등등 첨단 정밀 기기를 이용해, 할 수 있는 검사를 했지만 다른 의사들 역시 그 정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생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닥터 레프 역시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기에 약보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닥터 레프의 복통이 시작된 건 약 다섯 달 전이었다. 아주 심하게 아픈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계속 아팠다. 복통은 한번 시작되면 금방 멈추지 않아 환자를 만나는 시간에도 계속되어 더 신경이 쓰였다. 닥터 레프는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을 빠짐없이 다 먹었지만 아픈 배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쓰면 쓸수록 아주 조금씩 더 아파지는 것 같았다. 병원에 다녀온 뒤라 힘이 빠져 저녁 식사를 준비할 힘도 없었다. 닥터 레프는 약을 먹기 위해서 뭐라도 먹어야지 하는 생각에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은 여러 가지 먹을거리로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딱히 먹고 싶은 건 없었다. 아니 먹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언제 사둔 건지 알 수 없는 인스턴트 음식, 냉장고 안에서 너무 오래 두어 푸른 싹이 많이 자란 감자, 짓물러진 치즈, 수분이 빠져 쭈글쭈글주름이 가득 잡힌 사과, 나무처럼 단단하게 말라버린 소시지 등. 그와 대조적으로 냉장고 문쪽의 칸에는 닥터 레프가 꼬박꼬박 챙겨 먹는 다양한 영양제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종합비타민, 피부 건강을 위한 보조 식품, 혈액을 맑게 하는 캡슐, 당뇨를 예방해 주는 건강식품, 피로를 풀어주는 스포츠 드링크, 근육발달에 도움을 주는 분말, 머리를 맑게 해주는 알약 등등. 닥터 레프는 평소처럼 일반 음식 대신 영양제와 건강식품 몇 알을 입안에 털어 넣고 냉장고 안쪽에 하나 남아 있던 콜라를 찾아 함께 삼켰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집안은 조용했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집안의 적막함 속에서 이상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작게 들리더니 신경이 쓰일수록 볼륨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그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갔다. 냉장고였다.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마련한 최신형 모델인데 불규칙한 기계음이 계속 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냉장고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A/S 센터에 연락했고 24 시간 대기 중인 A/S 센터에서는 수리 기사를 10 분 내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정확히 8 분 후 초인종이 울리고 냉장고 수리 기술자가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기술자는 닥터 레프가 생각한 것과 달리 무척이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레프 씨는 ‘냉장고처럼 첨단 최신 기술이 들어가 있는 제품을 이렇게 나이 드신 분이 이해하고 수리까지 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사이 노인은 천천히 냉장고 앞으로 다가가 냉장고의 문을 열어 본 다음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작은 공구 가방을 열어 드라이버를 하나 꺼낸 다음 냉장고의 뒤쪽으로 돌아가 얼마동안 수리를 했다. 그러자 냉장고에서 들렸던 이상한 소음이 모두 사라졌다.
레프 씨는 ‘아, 나이가 많으셔도 기술이 좋으니 아직도 회사에서 기술자로 고용하는구나~’하고 생각하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많이 늦은 시간에도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술이 무척 좋으시네요~”
그러자, 노인은 인상 좋은 웃음을 지으며 레프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냉장고 기술자가 냉장고 고치는 건 대단한 게 아니죠. 그런데, 요즘 배가 아프지 않으세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여쭤보자면 혹시 직업이 의사 아니신가요?”
레프 씨는 놀라움을 넘어 약간 공포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노인은 웃음을 띤 채 말을 이었다.
“하하,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복통이 좀 있으실 듯해서요.”
“마, 맞습니다. 몇 달째 복통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의산데 치료도 못하고…. 그런데 제가 복통이 있고 또 의사라는 건 어떻게 아셨는지.”
“의사 선생님들은 사람의 몸속을 어떻게 아시죠?”
“그야 물론 청진기와 엑스레이, MRI, CT 촬영 등을 통해서 알죠.”
“네, 의사 선생님들이 그렇게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보시는 것처럼 저처럼 냉장고를 50 년쯤 고쳐온 사람은 어떤 사람의 냉장고를 보면 그 사람의 속이 보입니다. 물론 가끔은 직업까지 알 수 있기도 하고요.”
“냉장고 속을 보고 어떻게 사람의 속을?’
“냉장고에 있는 것들이 결국 그 사람의 몸과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들이죠. 그러니 냉장고를 열어보는 건 그 사람의 몸을 열어보는 것과 같은 셈이죠. 그리고, 음식보다 약과 영양제, 건강보조식품을 신경 써서 채워 넣는 분들은 대개 의사나 약사시더라고요. 하하”
일 년 후 세상은 갑자기 나타난 ‘냉장고 의사’로 뜨거웠다. 소문에 따르면 ‘냉장고 의사’는 청진기, 엑스레이, MRI 같은 의료 기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치료했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 우연히 진료를 받아 오래된 병을 고친 사람에 따르면 ’ 냉장고 의사’는 진료를 받기 위해 자기 집 냉장고 속의 사진을 찍어 와야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칸막이 뒤에서 그 냉장고 사진을 보며 진료를 하기 때문에 ‘냉장고 의사’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그가 예전에는 냉장고 수리 기술자였다고 하자, 의사 면허 없이 진료를 할 수 없다고 따졌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가 유명한 내과 의사였을 것이라고 하자 의사가 점쟁이도 아니고 사진만으로 치료를 할 수 있냐고 되물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은 어쩌면 그 ‘냉장고 의사’가 한 명이 아닐 수 있겠다고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지만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날이 갈수록 그 명성이 높아져 가는 탓에 지금 당장 예약을 해도 일 년쯤 후에 진료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 (끝)
때로는 눈앞의 문제를 급히 해결하는 것보다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묻는 일이 먼저일지도 모릅니다.
[프롤로그]
• 001 발상법 책들이 실패하는 이유 : 수학을 잘하는 방법은 수학을 공부하는 것
[PART 1] 내일 아침-D-1 상황에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기술
Chapter 1. 갖다 붙이기의 기술
• 002 스퀴즈 번트: 레퍼런스 혹은 강제 결합
• 003 갖다붙이기 사례: ANA + 해양수산부
• 004 '갖다 붙이기'에 숨은 방정식: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차이
• ThinkingFable 1. 냉장고 의사
(* 아이디어의 뒷골목 이야기는 매주 화/목 10시에 업로드됩니다.)
Chapter 2. 더하고 빼고 비트는 기술
• 005. 나란히 3의 법칙과 크리에이티브의 전압(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