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밤과 아라비아의 말들과 우리

by 여행하는가족

아라비안 호스(Arabian horse). 굳이 영어로 불러줘야 입에 더 착착 붙는 것처럼 느껴지는 아라비아의 말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아라비아 반도를 원산지로 하는 종이다. 세계적인 명마(名馬)로 손꼽히는 이들은 고대 이집트 시대 예술품에도 등장했을 만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품종에 속하기도 한다. 스피드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지구력 면에서 탁월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라비아 반도 동부에 자리한 아랍에미리트에서도 이 유명한 말들을 만나볼 기회가 많다. 경마 전용 TV 채널이 따로 있고 누구나 쉽게 승마 레슨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처음에는 왕족이 아니라 이 나라의 인기 연예인인 줄로만 알았던 두바이 최고의 셀럽, 셰이크 함단 왕자까지 아라비아의 말과 함께 찍은 사진을 종종 공개할 정도니, 이쯤이면 이 나라 사람들의 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더 말할 나위 없겠다.


사막

아라비아 반도에서 보내는 첫 번째 겨울에 우리 가족은 아부다비 인근에 있는 사막 리조트로 여행을 다녀왔다. 아침에 일어나 밖을 내다보면 밤새 자리를 옮겨간 모래 때문인지 주변의 풍경이 전날과는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쉼 없이 몰려왔다 물러가는 파도 같았다.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면서도 보는 사람에게 불안함보다는 나른함을 선사하는 잔잔한 파도.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도 평온해지고는 했다. 작디작은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우리는 조용히 휴식을 취했고 그것이 우리가 그 겨울, 사막을 찾았던 이유였다.



그러나 한 순간, 딱 한 순간만은 우리 가족 모두가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적이 있었다. 바로 아라비아의 말을 코앞에서 만났을 때였다.


사막의 밤, 아라비아의 말들

숙소 주변에는 오로지 사막뿐이고 근처에 가게도 없어 우리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삼시 세끼를 모두 리조트 안에서 해결했다. 그날도 저녁 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을 방문한 참이었다. 타는 듯한 중동의 여름을 무사히 살아낸 이들은 드디어 선선해진 날씨를 즐기기 위해 너도나도 외부 테이블에 앉아 사막의 밤을 즐기고 있었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메뉴판을 뒤적이고 있는데 식탁에 앉아 있던 아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테라스 옆 잔디밭으로 급하게 뛰어 내려갔다. 아니, 갑자기 어딜 가는 거지? 저기 뭐가 있다고?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나도 급하게 일어나 아이를 따라갔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잔디밭에 서 있는 말 두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흰 눈처럼 새하얀 말 한 마리와 갈기를 여러 갈래로 곱게 땋아 멋을 낸 진밤색 말 한 마리였다.


"말에게 먹이를 주고 싶다고 레스토랑 직원에게 말하면 사과를 준비해 줄 거야."


한발 먼저 잔디밭에 내려가 말들에게 먹이를 주던 낯선 누나가 그 모습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이에게 고급 정보를 일러주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는 "땡큐!"라고 외치고는 날듯이 달려가 서빙하는 직원을 붙잡고 뭐라 뭐라 하는 눈치 더니 조금 후, 말에게 먹일 사과가 가득 담긴 커다란 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먹이를 받아오는 것까지는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해냈으나 문제는 말들에게 받아온 사과를 먹이는 일이었다. 아라비아의 말들은 몸체가 작은 편에 속한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키의 두 배쯤은 족히 넘어 보이는 동물 앞에서 아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엄마, 아빠를 향해 도와달라고 외치는 우리 집 꼬마에게 남편이 보무도 당당하게 다가갔다. 하지만 막상 말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두려웠던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아빠와 아들이 함께 조심조심 말들에게 다가갔다가 막상 그 동물들이 다가온다 싶으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기를 여러 차례. 이러다가는 두 남자 모두 오늘 밤이 다 가도록 말들에게 사과 한 그릇은커녕 사과 한쪽 먹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오늘도 어린이에게 배우는 어른이

시간만 야속하게 흘러가는가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시도를 거듭하며 조금씩 용감해진 아빠와 아들은 나중에는 제법 능숙하게 말에게 사과를 먹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과 한 조각이 두 조각이 되고, 한 그릇이 두 그릇, 세 그릇이 되었다. 나중에는 말들이 사과에 질려버렸는지 그것을 코앞까지 디밀어도 관심조차 주치 않고 묵묵히 풀만 뜯더니 급기야는 귀찮았는지 사과를 내미는 집요한 내 아이의 손을 피해 다그닥 다그닥 도망을 가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그날 밤, 우리 셋이 스스로의 입에 밥을 넣었던 시간보다 말의 입에 사과를 넣어준 시간이 더 길었을 게 분명하다.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 아라비아의 말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이는 우리 가족 중 나 혼자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식탁에 앉아 말들을 먹여 살리느라 고군분투하는 우리 집 두 남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새 말과 친해진 그들, 그중에서도 특히 과감해진 아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아, 이렇게 또 내가 아이에게서 배우는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하더니, 자기가 먹으라고 내민 사과를 진짜로 먹겠다고 말들이 주둥이를 내밀면 무서워서 사과를 집어던지고 도망가더니, 하지만 너는 포기하지 않고 한 발짝 한 발짝 말들에게 다가갔고 이제는 혼자서도 그 우아한 동물의 몸이며 얼굴을 쓰다듬기에 이르렀구나.


아이를 키우다 보니 가르침이라는 것은 반드시 부모로부터 아이를 향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나도 내 아이처럼, 처음엔 용기가 안 나는 일이라 하더라도 포기해 버리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해나간다면 이 세상에 못 이룰 일은 없지 않을까? 아이 덕분에 늘 삶의 지혜를 건지는 엄마는 캄캄하고 고요하던 사막에서의 밤, 예상치 못했던 아라비아 말들과의 만남을 아직도 종종 떠올린다.





[기고처] 브릭스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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