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가족?

둘째의 탄생을 기다리는 요즘의 우리

by 여행하는가족

곧 임신 28주 차로 접어든다. 살얼음 위를 걷는 마음으로 임신 초기를 보내던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중기를 지나 며칠 후면 임신 후기에 접어든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언제나 그러하듯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흐르고 거대한 바위처럼 버티고 섰던 고민들도 뒤돌아 보면 실은 돌멩이에 불과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작게 느껴진다.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고 담당의사 선생님의 조언도 있었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서 누워 지내던 날들에 안녕을 고하고 요즘의 나는 바지런히 움직이며 매일을 살고 있다. 이제는 제법 배가 불러온 까닭에 다 내려놓고 좀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많다.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두바이를 떠나 서울의 집으로 돌아갈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니 정리해야 할 것도 처리해야 할 일들도 많아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다. 게다가 첫째인 여행이를 지난 12월 초까지만 학교에 보내고 이후로는 내가 집에서 데리고 있기로 했기 때문에 하루가 더 짧은 것만 같다.

온전한 내 시간은 새벽뿐이다. 그래서 해뜨기 전에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자다가 내가 사라진 것을 깨달은 여행이가 엄마 어디 있냐고 자기 곁으로 와달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보통은 잠결에 하는 소리라는 것을 아는 이젠, 마음 굳게 먹고 그냥 하던 일을 한다. 둘째까지 태어나면 이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더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피곤해도 더 아등바등 나의 새벽을, 나의 독서를, 나의 글쓰기를 지키고 있다. 그러다 보면 동이 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일어나면 아침을 해 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집안일을 조금 한다. 그러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점심때가 되어 밥을 지어 먹이고 또 설거지를 하고 아이랑 조금 놀아 주거나 때로는 아이의 친구와 만나 몇 시간 놀게 하고는 나는 다시금 짐을 정리한다. 어느새 저녁 즈음. 이번에는 저녁밥을 지어 먹이고 어김없이 설거지를 하고 또 하다 만 짐 정리를 이어하다 아이를 잠자리에 눕히고 책을 읽어주다 보면 어떤 날은 여행이보다 내가 더 먼저 잠이 들어 버린다. 이게 요즈음 나의 하루다.


사실, 두바이에서의 마지막 몇 주는 여행이를 위해 쓰고 싶었다. 그동안 가봤던 곳들 중에서 또 가고 싶다는 곳이 있으면 다시 한번 데려가고, 방문하고 싶었으나 아직 방문하지 못했던 곳에는 이번 기회를 빌어 함께 찾아가고도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거의 종일 영혼은 빼고 입으로만 놀아주고 있으니 아이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이런 상황인데 인사를 나눌 사람들이 뭐 그리도 많은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 어제는 한 마디 하고 말았다. 이사를 앞두고 있지 않았더라면, 내가 둘째를 임신해서 몸이 이렇게 피곤한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그래, 고국 떠나 일하느라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고 두바이에서 맺은 인연들에게 제대로 안녕을 고하고도 싶겠지라고 마음 넓게 쓰며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안다. 내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많은 일들을 그도 열심히 처리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워낙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니 여기에서도 귀한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는 걸. 떠난다고 남편을 불러내어 환송회를 해주시분들께 고마운 마음도 있다. 하지만 어제는 너무 힘들어서 속에 담아둔 말도 몇 마디 못 했는데 눈물부터 터져 나왔다. 몸보다 마음이 힘들어서.

여행이는 긍정적인 성격을 타고난 아이다. 그리고 어떨 때는 어른인 내가 봐도 존경스러울 정도로 성숙한 태도를 보여주곤 한다. 아이 앞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지만 엄마도 사람인데 엄마라고 다 참으란 법 있나, 어제는 나도 스스로가 컨트롤이 잘 안 되어서 그냥 울어버렸다. 그랬더니 아이가 다가와 날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달래주었다. 분명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내가 우는 이유를 알아챈 아이는 아빠는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서 나만 다른 쪽으로 이끌더니 조용히 말했다. 엄마가 왜 우는지 알고 있고 엄마가 요즘 스트레스받고 힘든 것도 잘 안다고, 그런데 우리 앞으로 몇 달만 고생하면 서울에서 다시 즐겁고 편하게 지낼 수 있지 않느냐, 그 준비를 자기랑 나랑 아빠랑, (그리고 내 배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바다랑 함께 하는 거다. 엄마, remember, friends come and go, but family stays라는데, 아이의 조그만 입에서 나오는 그 어른스러운 이야기에 나는 내가 점점 더 부끄러워졌다. 안 그래도 감정이 북받치는데 꼬마인 줄로만 알았던 나의 아이가 엄마인 나를 어찌나 부끄럽고 만들고 동시에 감동시키던지. 나는 더 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도로 집어넣었다.


큰 일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매일이 피곤하고 힘든 것만은 아니긴 하다. 기쁜 일들도 있다. 나와 남편이 다시 한번 신생아를 맞이하는 부모로서의 준비를 해나가고 있듯 여행이도 첫째로서의 준비를 해오고 있었던가 보다. 동생이 태어난다는 소리에 충격을 받았던 아이가 이제는 그것을 많이 극복했는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불룩 솟은 내 배를 어루만지며 “바다야~~.”하며 제 동생의 태명을 부른다거나 하는 일도 잦아졌다. 가족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가장 먼저 내 배에 손을 얹고 동생도 함께 찍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는 것도 다름 아닌 여행이이고. 우리 가족은 요즘 둘째, 바다의 태명을 짓기 위해 즐거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이미 여행이의 이름을 지은 나는 생각해 둔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한 발짝 물러났고 지금은 남편과 여행이가 각자 원하는 이름을 바다에게 주기 위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우리 둘만 있을 때 남편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이 밀고 있는 이름으로 바다를 불러 내 웃음보를 터지게 만든다.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여행이도 제 아빠가 근처에 없을 때면 슬쩍 다가와 제가 선택한 이름으로 동생을 부르곤 한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나에게 웃음을 준다.


언제나 그러하듯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흐르고 거대한 바위처럼 버티고 섰던 고민들도 뒤돌아 보면 실은 돌멩이에 불과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작게 느껴진다. 지금, 내 눈앞을 캄캄하게 만드는 바윗덩어리 같은 일들도 앞으로 몇 달, 아니 어쩌면 몇 주 후면 간단히 건너뛸 수 있는 작은 돌멩이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제저녁, 여행이가 나에게 들려준 조언을 떠올리며 오늘 하루를 시작해 봐야겠다. 내 뱃속의 바다는 이미 깨어났는지 벌써부터 꼬물꼬물 아침 체조를 하고 있다. 좋은 꿈을 꾸는 건지 잠을 자다가 씩 잘 웃곤 하는 여행이는 내가 우는 걸 봐서 그랬는지 어젯밤에는 짜증 섞인 말투로 잠꼬대를 몇 번이나 했다. 여행이도 곧 깨어나겠지. 그러면 오늘은 활짝 웃는 모습으로, 기운차게 아이를 맞이해야지.


며칠 전, 남편과 산책 중에 발견한 카페. 그래, 산책도 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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