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육아를 하겠다는 대단한 목표 아래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야무지게 실천에 옮겼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내가 그렇게 계획적이고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나는 책 읽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보니 같은 취미를 지닌 이에게 호감이 생겨 결혼이라는 문턱을 넘었고 배우자가 된 그와 함께 읽는 즐거움을 누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우리의 아이도 같은 취미를 가지면 좋겠다는 마음이 싹텄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우리 부부의 첫째, 여행이가 옹알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던 시절부터 매일매일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그래, 비록 지금은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네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언젠가는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너도 울고 웃게 되겠지. 그러다가 문득 네 조그맣고 귀여운 입으로 감상을 덧붙이기까지 한다면? 그런 사랑스러운 미래에 대한 상상을 해가며 오랜만에 다시 읽는 동화의 맛에 나조차 함빡 빠져들곤 했었다.
나는 국회도서관에 세계의 도서관 이야기를 기고하고 있다. 내가 취재를 간 사이, 책을 읽으며 날 기다리는 여행이의 모습을 남편이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고마워, 둘 다!
만으로 꽉 채운 아홉 살을 지나 열 살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는 여행이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다. 최근 몇 년 사이엔 점점 더 긴 시간을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며 보내려고 해서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행히 하루에 한두 시간은 꼭 독서에 할애한다. 몇 번이고 거듭 읽어 이제는 페이지가 나달 나달 해진 책을 손에 쥐고 책상 앞에 앉았다 소파에 누웠다 해가며 이야기의 세계에 푹 빠져있는 우리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과연 언제 올까 싶었던 날들이 어느새 내 곁에 와 있는 것이 실감이 나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서점이나 도서관에 자주 데리고 다녔다. 아빠와 '함께' 책을 '읽는 것 같은' 진지한 표정이 귀여워 사진으로 남겨두었던 패서디나 도서관에서의 추억
책 읽어주는 시간
“엄마, 오늘 밤엔 이 책 읽어주세요!"
스스로 읽는 것을 즐기는 아이지만 매일 밤 잠들기 전만은 여전히 내가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읽을거리를 고르는 것은 주로 아이의 몫인데 엄마가 내어준 팔을 베고 누워 자신이 선택한 이야기가 엄마 목소리를 통해 울려 퍼지는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좋은지 그 시간을 건너뛰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다. 그래서 나도 정말 피하지 못할 사정이 있는 날이 아니고서야 그 루틴만큼은 꼭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 한 장만 더, 한 장만 더 읽어주세요 조르던 아이가 스르르 잠이 들어 내 팔을 누르는 머리통이 더욱 묵직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난, 아, 이렇게 우리, 오늘 하루도 잘 살아냈구나라는 충만한 감정에 휩싸이곤 하는데 그것은 놓치고 싶지 않은 나만의 기쁨이기도 하다.
둘째 아이인 바다를 임신한 후,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내가 예전만큼 몸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도 큰 변화 중 하나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무거운 것을 들거나 힘을 쓰려고 하면 배에 통증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몸을 사리느라 여행이를 마음껏 번쩍 안아주지 못한다는 게 특히나 아쉽고 미안한 변화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잠자리 독서 시간에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것조차 숨 가쁜 일이 되었다는 것. 아이에게 책을 읽어 준 지 이제 곧 십 년이 다 되어가니 나도 이제 낭독 베테랑이 되어 잘못 발음하는 단어 하나 없이 책 한 권쯤은 물 흐르듯 후루룩 읽어줄 수 있다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뱃속의 바다가 성장함에 따라 누운 자세에서 끊임없이 말을 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아 졌고 책을 읽으면서도 한 문장 내뱉고 후우~ 또 한 문장 내뱉고 하아~ 숨을 고르는 시간이 잦아진 것이다. 세심한 여행이가 엄마의 변화를, 그리고 그 변화의 이유를 눈치챈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과는 다르게 더듬거리는 나를 바라보던 아이는 불룩해진 내 배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바다야, 너도 듣고 있니?”
여행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너무나도 다정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엄마의 배를 어루만진 게 아니라 어쩌면 자기와 함께 이야기의 세계에 빠져 있던 제 동생을 쓰다듬고있었던 걸까?
어쩌다 책 육아, 더불어 책 태교
그로부터 며칠 후, 다른 날 같으면 혼자서 원하는 책을 골라 왔을 여행이가 오랜만에 나의 손을 이끌고 책장 앞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제 손을 내 배에 올려두고 한다는 말이, “오늘은 네 인생에서 처음으로 선택을 하는 날이야.”란다.
“오늘은 네 인생에서 처음으로 선택을 하는 날이야. 잠자고 있는데 깨워서 미안하지만, 로빈슨 크루소가 읽고 싶으면 발을 한 번 구르고 장발장을 읽고 싶으면 두 번 구르고 보물섬을 읽고 싶으면 세 번 굴러봐.”
여행이의 이야기를 정말로 들은 것인지 바다는 발을 콩콩콩 세 번이나 굴렀고 그날 밤의 책은 보물섬이 되었다!
둘째 아이, 바다가 고른 책을 쥐고 첫째 아이, 여행이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로 보물섬을 읽던 밤 나는, 여행이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둘째, 바다까지, 두 아이를 내 품에 안고 책을 읽어주는 것만 같은 따스한 기분에 휩싸였다.실제로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오겠지? 여행이가 그랬던 것처럼 바다도 내 팔을 베고 누워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가 스르르 잠이 들어 좋은 꿈, 예쁜 꿈 꾸며 건강히 자라날 테지. 그런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오늘도 나는 얼떨결에 책 육아, 더불어 책 태교를 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