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이에게

우리가 잊지 않은 너에게

by 여행하는가족

“엄마, 신선이가 자기 태명이 마음에 안 들어서 하늘나라로 돌아갔다가 다시 우리를 찾아왔나 봐. 바다는 마음에 들까? 마음에 들면 좋겠다.”

여행이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울컥해졌다. 현재의 행복에 도취되어 잊고 살았던 신선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주 잠시간이었지만 우리 가족을 찾아왔다 떠나간 동생을 지금껏 잊지 않고 기억해 준 첫째, 여행이에게 너무나도 고마워서였다.

신선이

첫째 아이가 태어난 해로부터 5년 후, 나는 다시 한번 아이를 가졌었다. 그때도 난 하나로 만족해야 하나 아니면 한 명 더 낳아야 하나 마음의 갈피를 정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임신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찾아와 준 생명이 너무나도 반가웠고, 무엇보다 그즈음 더욱 적극적으로 동생을 낳아달라고 조르던 여행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선사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더할 나위 없이 기뻤었다. 물론 둘째도 여행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선물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니 두 아이가 함께 자라나는 풍경을 상상만 해도 나의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고나 할까.

동생이 생겼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나도 기뻤던지 여행이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우리 엄마 뱃속에 내 동생이 있어요.”라고 자랑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친척들이나 어린이집 선생님, 친구들에게 동생 이야기를 슬쩍 꺼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디에서 무얼 듣고 왔는지 대중교통을 타면 아직 배가 나오지도 않은 내 손을 잡아끌고 임산부석이나 노약자석으로 가서 큰 소리로 엄마 여기 앉으라고, 엄마 뱃속에 동생이 있으니까 엄마는 여기 앉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만 다섯 살도 안 된 꼬마가 넉살도 좋게 난생처음 보는 옆자리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대뜸 제 동생이 태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건네고 덕담을 얻어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의 그 당당하고 싱글벙글 웃음 가득한 얼굴이란!

첫째 아이가 지어준 동생의 태명은 신선이였다. 동생 일과 관련해서라면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나서던 아이가 동생을 부르는 이름을 자기가 짓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그래 그럼 네가 원하는 이름으로 부르자 했던 것이었다. 신선이라니, 여행이 만큼이나 낯선 이름이었지만 부르다 보니 그 또한 입에 딱딱 붙고 그것보다 더 좋은 태명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신선아, 신선아, 우리 신선아.

신선이는 초음파 사진 안 작은 점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이미 우리의 가족 중 한 명이었다. 우리 부부에게도 그리고 여행이에게도 그랬다. 나는 그 작디작은 존재를 바라보며, 마치 여행이가 그러했듯, 그것이 무럭무럭 자라 얼굴을 갖추고 팔다리를 뻗어내고 수북한 머리카락까지 인 채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가족의 눈앞에 응애 건강한 울음을 터뜨리며 안겨올 날을 구체적으로 상상했었다.


안녕

하지만 우리 부부도, 그리고 첫째 아이도 동글동글 조약돌 같은 기쁨으로 반짝이게 만들었던 날들은 안타깝게 오래가지 못했다. 계류유산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내 안에서 여행이를 키워냈던 기간을 아무런 걱정도 어려움이 없이 보냈기에 나는 오만하게도 임신 중에 유산의 위험이라는 것이 동반될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산이라니. 남편의 손을 잡고 기쁜 마음으로 다녀왔던 산부인과에 정기검진을 하기 위해 혼자 찾아갔던 날 하필 그런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누구한테 나쁜 짓도 안 하고 이만하면 나 그동안 착하게 살아왔는데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마음으로 혹시나 존재할지도 모를 1%, 아니 0.0001%의 가능성에 기댔다. 의사 선생님은 해 봤자 소용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검사 결과를 듣고 병원을 나오던 날, 나는 난생처음 거리를 걸으며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인연

부부의 연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연도 하늘이 맺어주는 것이라 믿는다. 이 세상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부부와 우리의 아이가 서로에게 이어져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신비하고도 감사한 일인지. 평소에는 그 감사함을 잊고 상대방에게 투정을 부리고 비난을 퍼부을 때도 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이 귀한 인연을 나쁜 감정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주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우리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모이게 된 것은 저 드넓은 바닷가 모래밭, 그 안에 섞여 있던 작은 좁쌀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한 자리에 모일 가능성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희박한 확률이었을 텐데!


신선이에게

잠시, 우리 가족 곁에 머물렀던 신선이가 떠나간 지 5년 후, 나는 다시 한번 임신을 했다. 내 나이도 걱정이었지만 신선이 때의 기억 때문에도 나는 두려웠었다. 이번에 또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지. 서로 말은 하지 못했지만 남편도 같은 걱정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꼬마인 줄로만 알았던 여행이도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었나 보다. 새로 찾아온 생명에게 바다라는 태명을 지어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여행이가 불쑥 신선이의 이야기를 꺼낸 것을 보니.


신선아, 잘 지내고 있니? 여행이 말대로 정말로 하늘나라로 돌아갔다가 다시 우리를 찾아온 거니? 아니면 네가 먼저 도착한 곳에서 아늑한 집 짓고 우리 가족을 기다리다가 네 동생, 바다를 내려보내 준 거니? 네가 어디에 있든 우리는 아직 너를 잊지 않고 있어. 너도 우리를 기억해 줄래?


신선이가 떠난 후 남편, 여행이와 함께 다녀왔던 지리산에서 만난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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