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얘기했듯 무스펙 비전공자 백수인 내게 편집자란 직업은 너무 멀어 보였고, 슬슬 푼돈이라도 내 힘으로 벌어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청년 인턴 사업에 이력서를 넣었다. 한 POD(주문형 출판) 업체에서 인턴 면접 제안이 와서 덜컥 물었다. 그때 내가 제출했던 희망 연봉은 1,440만 원. 인턴임을 감안하더라도 터무니없는 수준이지만, 이 연봉이 잘못됐다고 알려 주는 사람은 가족을 포함해 한 명도 없었다.
라노벨 편집자라는 꿈도 폄하되기 일쑤였지만, POD 편집자의 위상은 그보다 더했다. 나는 월 120만 원 언저리를 받으면서 공장처럼 돌아가는 POD 업체에서 갈려 나갔다. 난생처음 편집이랍시고 맡게 된 책은 사이비 종교의 교리서였다(POD 업체에 사이비 종교 책 주문이 제법 많이 들어온다). 그 외에도 분야를 가리지 않고 한 달에 종이책 마감이 20권씩 쏟아졌다. 담당 분야고 뭐고 없이 닥치고 아무 책이나 마감했다. 그때의 나 자신과 저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쓰레기 같은 책들을 양산하는 데 제법 기여했다.
근로 계약서상의 복지 조항은 지켜지지 않았고, 매일 아침 7시 반까지 출근해서 밤 11시까지 일했다. 출판의 보람을 전혀 못 느끼는 것도 문제였지만, 바쁜 와중에 일주일에 3번 이상 강제로 술을 퍼먹이는 사내 문화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한번은 유명 작가를 접대하는 술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기도 했다. 몇 년 뒤 SNS에서 터졌던 #문단_내_성폭력 태그에 이 경험을 폭로한 적도 있다(내 개인정보가 특정될까 우려되어 자세히 적지는 않겠다).
POD 출판사에서 어찌어찌 정직원도 되고 2년여를 버텼으나, 어느 날 집에서 엄마와 밥을 먹다 수저를 손에 든 채로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출판 노동자의 삶이 괴로웠던 것이다. 엄마 앞에서 드라마 <추노>의 유명한 짤방처럼 입에 밥덩이를 물고 서럽게 울었다. 그 뒤 아무 대책도 없었지만 퇴사했다. 나는 단지 재미있는 소설을 읽으면서 돈도 벌고 싶었던 평범한 취준생이었다. 출판사 다니면 힘들다, 힘들다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지옥일 줄은 몰랐다.
이후 반년 정도는 대치동 학원에서 수업 교재 타이핑 알바를 했다. 2년간 갈리면서 한글 프로그램 쓰는 실력만 늘었더니 잘한다면서 나를 고용해 줬다. 하지만 이때쯤 유명 작가의 성희롱을 SNS에 고발하고 정신질환을 얻으면서(사회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단순 타이핑 알바조차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고용주는 내 저조한 성과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수능 시즌이 끝나자 일감이 없다며 나를 해고했다. 나도 죄송한 마음으로 해고 사실을 받아들였다.
다시 백수가 됐다. 새출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POD 업체에서 갈린 경험은 출판업계가 아니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나는 꿈을 잃고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았다. 농협 전산 콜센터 인바운드, 우체국 콜센터 아웃바운드, 홈쇼핑 방송 보조 계약직 등에 지원했다. 우습게도 글 쓰는 실력은 남아 있어서 지원하는 족족 자소서가 통과해 면접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면접관들의 질문은 하나로 귀결했다. “전문직으로 일하다가 왜 굳이 여길 지원했나요?”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무스펙으로 보이기 싫어서 POD 편집자로 일했던 경력이라도 기재했더니, 도움이 되기는커녕 나는 남이 보기에 편집자라는 전문직을 실패하고 도망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면접관들이 대단한 인사이트나 비판 의식을 갖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도망자였던 나는 제 발이 저려 그럴싸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나는 모든 자소서를 통과했으나 모든 면접에서 탈락했다. 3년 전인 2017년 봄이었다.
어쨌든 편집자
브런치 소개글에는 ‘DOGI, 6년 차 웹소설 편집자 겸 어쩌구’라고 써 놨는데, 솔직히 사기 치는 게 맞다.
말했다시피 2년은 POD 편집자로 일했고 반년은 교재 타이핑 알바로 일했다. 6년 차라는 말은 5년을 꽉 채웠다는 뜻이니 5년 중 절반이 날먹 경력이다. 그런데 더 고백하자면 나머지 2년 반도 순도 높은 웹소설 편집자는 아니었다.
출판업계 탈출에 실패한 다음, 나는 버릇처럼 구직 사이트를 뒤적거리면서 ‘편집자’라는 키워드를 검색했다. 이렇게 취업하기 힘든 와중에도 출판사들은 늘 편집자 모집 공고를 쏟아내고 있었다. ‘자소설’ 하나는 기깔 나게 쓸 줄 알았기에 2년 반의 조잡한 경력을 그럴싸하게 가공해서 열몇 개 공고에 이력서를 돌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만화와 라노벨을 취급하는 한 출판사로부터 면접 제안을 받았다. 2014년 한겨레 예비 편집자 과정에서 라노벨 편집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 지 3년 만이었다. 신기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꺼내지 않아 주름진 정장을 다려 입고 면접을 보러 갔다.
그런데 편집자 공고를 보고 간 면접 자리에서 엉뚱하게도 ‘전자책 영업자’를 해 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까지 나는 종이책만 다뤄 봤었고, 전자책이라곤 종이책 인쇄하고 남은 PDF 파일의 용량을 줄여서 교보문고 파트너 사이트에 등록해 본 게 전부였다. 하지만 무늬만이라도 서브컬처 회사에 다녀보고 싶었기에 덜컥 수락했다. 그렇게 출판사 잡탕 경력이 이어졌다.
편집자가 아니라 영업자로 취직해, 전자책의 생태와 도서 영업을 기초부터 배웠다. 이때 웹소설이란 단어도 처음 알았다. 종이책을 출간할 땐 교보문고가 서점의 왕이었는데, 웹소설 쪽에선 그다지 힘을 못 쓴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웹소설 시장은 네이버, 카카오, 리디북스가 삼분하고 다른 서점들이 나머지 부스러기 파이를 나눠 먹는 구도였다.
쥐뿔도 없는 지식으로 네이버, 카카오, 리디북스 등에 어리바리하게 B2B 미팅을 다녔다. 당시 미팅 자리들을 돌이켜 보면 쪽팔려서 지우개로 기억을 밀고 싶은 수준이다. 다행히 첫 직장과는 다르게 일 잘하고 친절하신 영업팀장님을 사수로 만났다. 그분의 도움을 받으면서 나는 높아만 보였던 과거의 꿈에 사다리를 놓고 천천히 올라갔다. 라노벨 편집자는 아니었지만, 라노벨을 취급하는 출판사의 직원이 된 것이다.
그 회사에는 정말 오타쿠가 많았다. 자리마다 만화, 게임 포스터와 피규어가 널려 있었다. 모니터에 ‘19세 이하 관람불가’ 빨간 딱지 스티커를 장식처럼 붙인 채로 일하는 직원도 있었다. 회사는 만화, 라이트노벨, 작법서, 웹소설(판타지, 무협, 로맨스, BL) 등의 다양한 사업을 총망라했다. 각 사업에서 제작된 책들의 프로모션을 영업팀 2명이서 전부 소화했다. 사업마다 영업 방식이 다른지라 적응하기 힘들었고 실수투성이였지만, 여기만큼 내게 다양한 기회를 깔아 준 회사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 준 회사라서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곳도 1년 3개월 만에 퇴사했다. 사유는 누구나 불쌍하게 여기는 ‘월급 밀림’이다. 출판사업부에서 번 돈으로 무리하게 다른 사업을 확장하느라 대표가 출판사업부 직원들 월급에 손을 댔다. 월급은 직장인의 마지노선이다. 박봉인 것도, 일이 힘든 것도 참을 수 있지만, 월급에 문제가 생기는 순간 직장과 나의 계약 관계에 치명적인 금이 간다.
어쨌든 여기까지 좌충우돌하며 3년 9개월의 출판사 경력을 쌓았다. 이후의 과정은 자세히 풀면 주변에서 나를 특정할 수 있기에 생략하고자 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나는 박봉조차 위협받는 출판업계에 실망해서 또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그리고 다시 사회불안장애가 도졌다. 병원에 다니면서 이겨 내는 동안 3년 9개월의 경력이 담긴 자소서를 새로 작성했고, 그것으로 지금의 회사와 연이 닿아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지금은 웹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명함을 내밀면 알아봐 주는 정도의 웹소설 회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얼마 전엔 몇 년치 경력을 인정받아 승진도 했다. 나는 아직 대단한 실적을 이룬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꿈 언저리라도 맴돌면서 어떻게든 굶어 죽진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과정도 나름대로 기구했는데, 현 직장 일이라 얘기할 수 없어서 아쉽다. 언젠가 여기도 퇴사하면 전부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