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생기지도 않은 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침실 3단 서랍장의 오른쪽 맨 아래 서랍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너란다.
너의 할머니께서 깨끗이 그리고 소중히 보관하셨던 아빠의 배냇저고리가 보자기에 곱게 쌓여 있고
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을 갔던 스위스를 기념하면서 작은 아이 양말을 사 왔었단다.
그리고 엄마가 어느 플리마켓에서 발견한 가제손수건도 언젠가 네가 흘릴 침을 닦을 용도로 사두었었지.
아직 이것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손이 잘 닿지 않는 오른쪽 맨 아래 서랍에서 자리를 축내고 있지만
언젠가, 아니 조만간 너를 만나게 된다면 이것들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서랍 맨 위로 정리할 거야.
너는 우리에게 문정이라고 불리고 있어. 큰 뜻이 있는 건 아니야.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의 이름을 딴 것이지. 이 동네가 너의 고향이 될 테니 충분히 의미 있다 생각해.
너의 이름을 생각해 본 적 당연히 있어.
너의 아빠의 성이 '조'라서 꽤 고민이 많았단다.
조 씨가 뒤에 붙는 모음에 따라 자칫하면 욕처럼 들릴 수 있거든. 이름이 놀림거리가 되는 건 가장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아이들 사이의 룰이니까. 네가 마주할 현실도 어느 정도 고려하면서 생각해 보았어.
또한, 닉네임을 쉽게 지을 수 있는 이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요즘은 이름만큼 닉네임, 영어이름을 사용해야 하는 일들이 많거든. 실용적이지?
너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너에게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이름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한 스푼 더했고 말이야.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조이현.
joy라는 즐거움이라는 영어 단어를 녹이면서
'조'는 아빠랑 맞춘 거니까 나와 같은 글자도 하나 들어갔으면 해서 '현'을 넣어보았어.
근데 네가 '너희'면 어찌할 거냐고? 그건 조금 더 고민해 볼게.
너의 성별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딸을, 아빠는 아들을 그리고 외할머니는 아들을 선호하고 있어.
나의 주변 친구들은 나는 아들이랑 잘 어울릴 것 같대.
네가 아들이면 실망할 거냐고? 딸이면 더 좋아할 거냐고? 나도 선호라는 게 있는데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될 이유는 성별이 아니라 너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단다.
이미 너에게는 멋진 형제가 있어. 고롱이라는 갈색 털과 하얀 주둥이가 매력적인 고양이야.
이미 8살이나 된 성묘라 네가 큰 형처럼 모셔야 해.
난 네가 무엇보다 작은 생명도 소중히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무엇보다 가족, 형제들에게 말이야.
나와 아빠는 가족계획을 이왕이면 하나보다는 둘, 둘 보단 셋 주의이긴 해.
물론, 아직 육아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꿈꾸는 희망일 수도 있어.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건 내가 가진 걸 나눌 줄 아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난 너에게 형제가 그리고 더 많은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어.
너는 아마 넌 두 개의 생일을 가지게 될 거야.
하루는 네가 배아로 만들어져 나와 만나게 된 이식일
하루는 네가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될 날
시험관 시술의 장점을 그나마 뽑는다면 너의 존재의 시작을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점일 것 같다.
시술 후 배아 사진을 보여주며 '네가 이런 세포였단다.' '네가 이번에는 5번 A등급 배아였단다'
상상만으로도 기괴하면서도 웃긴 것 같아.
잠깐 이야기가 딴 곳으로 갔네. 다시 돌아오자면, 생일이 두 개인 거 멋지지 않아?
축하할 날이 두 개라는 거잖아.
같은 생일이지만 그 의미는 조금 다르게 기념할 거야.
네가 내 안에 들어온 날에는 나와 아빠를 위한 날로
그리고 네가 태어난 날은 너의 생일로 기념할게.
너를 만나기 위해서 노력한 나와 아빠의 노력을 치하하고 그 성취를 기념할 날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동시에 진정한 의미로 아빠와 나는 부모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 거니까.
충분히 생일의 의미에 부합한다고 생각해.
또는 가족의 탄생이라는 의미도 가질 수 있겠어.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준 모든 일들에 감사하고 기념하도록 하자.
벌써 <난임 신이 이리 어려울 줄 몰랐지>의 마지막 글이야.
너를 생각하면서 꾸준히 5달 정도 매주 일요일에 이 글을 써 내려갔어.
지루한 기다림에 긍정적인 생각과 의미를 이식시키고자 노력한 정신 승리의 사적인 기록이
모이고 모여 이렇게 하나의 시리즈가 되어 완결시키니 매우 뿌듯하고 나 자신이 기특하다.
너희 아빠는 이 글을 마지막이
'그래서 임신에 성공하게 되었고, 현재 N개월 차랍니다!'라고 끝나야 멋진 거 아니냐고 하더라.
맞아. 정말 극적인 일이고 드라마, 영화 같은 일이지.
하지만, 난 임신 성공으로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지 않았어. (임신을 하고 싶지 않다는 건 아니야)
결국 나는 되었으니 이 글을 읽는 여러분, 희망을 가지세요!라고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어.
난임이 괴로운 이유도 본질적으로는 누군가는 '되기 때문' 이거든.
선의로 뿌린 희망이라는 돌에 맞아서 상처받는 개구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어.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바라는 건 '결과'가 아닌 '공감' 이였으니까.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슬프기도 하고 풀이 죽기도 하지만 다시 전의를 다지는 이 모든 과정을 누군가는 이해해 주고 공감해 준다면 이 기록의 의미는 충분할 것 같아.
그리고 이 글의 마지막 독자는 네가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이 기록을 남기는 동안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