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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성 Feb 21. 2022

달에서 내려온 전화를 읽고

글지마 "달에서 내려온 전화"

인간은 무엇으로 생의 의지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인간은 왜 죽음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많은 답들이 늘어지게 나올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생의 의지를 그저 동물적 감각이라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멋진 이유를 붙여 설명하기도 한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생의 의지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선 먼저 생이 무엇인지 논해야 할 것이다.

셀리 케이건이 말하는 생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수명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다면 살아 있는 것일까? 그리고 생물학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욕망이 생의 의지일까? 아도르노에 따르면 꼭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또한 하이데거의 진술을 따른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존재 생기란 생물학적 있음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달에서 내려온 전화"는 생에 대해 말한다. (책의 줄거리는 책의 후면인 두 번째 사진이 다 했다. 나는 줄거리가 아닌 내 생각을 끄적이고 싶다) 사실 이 책의 주요 사건은 죽음이다. 그러나 이 죽음의 사건은 역설적으로 생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달에서 내려온 전화"는 특정한 장소와 조건을 통해 개별자가 스스로 자기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살이라는 자기 살인의 방식과는 그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일종의 안락사와 유사하다. 

이 책에서 나타나는 저승 개입 안락사들의 사례 중 하나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싶다. 그리고 이 사례를 통해 생의 의지와 죽음 충동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마흔 쯤에 결혼한 한 여인이 있다. 이제 60대가 된 그녀는 남편을 먼저 보냈다. 슬프게도 그녀에게 슬하의 아이가 없었다. 대신 강아지 두 마리를 자식과 같이 키웠다. 강아지들도 장수를 한다. 정말 정성스럽게 키웠던 것 같다. 그렇게 강아지도 모두 생을 마쳤다. 그리고 그녀는 저승 개입 안락사를 신청한다. 그리고 그녀는 묘한 단정함과 예의바름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자, 다시 나의 이야기를 끄적거려 보고자 한다. 그녀는 자기 삶에 충실했다. 힘들고 춥고 배고픈 시간도 그녀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이겨내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생명에 대해 책임감을 가졌으며 그들이 생을 마칠 때까지 충실히 자신의 사랑을 실천했다. 그리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후, 그녀는 죽음을 선택했다. 

나는 그녀가 진정한 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의 의무, 혹은 주체의 의무인 사랑을 충실히 실행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실행했기에 충만하게 죽음을 맞이 한다. 비롯 두렵고 떨리는 죽음이지만 그녀는 이 죽음 앞에 굴종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죽음 충동은 생의 의지가 다 했기에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의 의지로 전환된다. 그녀는 여전히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 충만했다. 

하이데거가 말한 바와 같이 생은 그저 살아있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존재의 생기를 통해 진정한 삶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죽음 역시 이 생의 충만감을 통해 또 다른 삶의 영역으로 나아감이 아닐까? 

나는 글지마 작가의 의도는 모른다. 다만, 작품의 주인공인 저승차사 한봄의 마지막 선택(이건 스포라 구체적 기술은 생략한다)을 통해 생의 본질이 살아 있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 대한 의무를 짊어지고 그것을 충실히 이루며 사랑의 생기로 숨 쉬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살아있다. 그렇지만 때로는 죽어있다. 이를 아도르노는 주체성을 상실한 불구이자 눈을 뜬 시체로 묘사한다. 우리의 주체성이란 무엇인가?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주체성이라면 인간은 금수와 무엇이 다를까? 인간의 주체성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성에 있다. 즉 타자의 얼굴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 주체의 본질이기에 인간의 본질은 타자성이다. 그렇기에 키에르케고어가 진술한 것과 같이 인간은 사랑해야 한다. 

이 책 역시 나에겐 그렇게 소리치는 것으로 들린다. 그저 살아가던 저승 차사가 진짜 생을 살아가는 존재론적 전환 혹은 도약은 바로 사랑과 의무였다. 그저 업무에 매달려 체제 유지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한 아이를 사랑하고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한 생의 의지와 의무가 진정한 삶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 책은 분명 판타지이다. 그러나 이 책은 실존적 리얼리티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진정으로 삶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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