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끝
생각의 틀을 흔드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조세프 콘래드 (Joseph Conrad)의 <<Heart of Darkness (어둠의 심장)>>을 읽어보기 바란다. 처음 읽을 때는 재미없었다. 좋은 책이란 말을 들어서 집에 있었지만 읽으려고 할 때마다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그러다 드디어 작년에 지하철 안에서 일주일이나 걸려 155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책을 겨우 끝냈다. 책을 덮으며 든 생각은 지하철에서 안 읽었으면 못 읽었겠다 싶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말로'라는 사람이 탬즈강에서 배를 타고 가며 함께 여행하는 사람에게 콩고에 가서 컬츠라는 사람을 찾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콩고에 가기 전부터 사람들은 콩고에 가면 정신이 이상해지거나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다. 콩고에 도착하니 원주민은 쇠사슬로 묶여서 맞거나 굶주리고 백인은 아이보리로 돈 벌 생각에 혈안이 돼있다. 이런 이야기가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왜 그럴까? 그런데 1975년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가 이 책을 문학 장전에서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그랬을까? 소설을 다시 읽어야 했다.
아체베는 콘래드가 소설을 쓸 당시 아프리카에도 공예 조각 등 예술 활동이 이뤄지고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미개한 인종으로만 기록되었다고 했다. 콩고 인들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와 닮지 않았다"라고 하거나 식인을 하는 비인간적인 모습으로만 묘사되어 아프리카인에 대한 그릇된 고정관념이 영속될 수 있다는 거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콘래드는 당시 벨기에가 콩고에게 저지른 만행을 문학적으로 고발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체베처럼 흑인이 아니어서 흑인을 "N"단어로 부르며 "선사 시대 원시인""기괴한 가면 얼굴" "야만인""짐승" 등으로 표현한 부분에 덜 민감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흑인을 표현한 여러 대목에서 그들이 폄하되었다기보다 착취되었다는 느낌이 더 들었다. 오히려 백인이 비인간적으로 느껴졌고 돈의 노예 같았고 악행을 저지르며 정신줄을 놓은 것 같았다.
책에 나온 장면을 한 번 보자. "그들의 빈약한 가슴은 헐떡이며 격렬하게 확장된 콧구멍은 떨렸고 눈은 돌처럼 위를 응시했다. 그들은 불행한 야만인의 죽음과도 같은 완전하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나를 6인치 이내로 지나쳤다." 이건 목과 발이 쇠사슬로 묶인 여섯 명의 흑인이 일렬로 연결되어 걸어가는 모습니다. 비록 흑인이 자신들의 고통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분노가 느껴지지 않나? 게다가 뒤이어 말로는 언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폭력의 악마, 탐욕의 악마, 뜨거운 욕망의 악마를 보았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백인이 콩고에서 아이보리를 얻기 위해 취한 잔인한 행동이 도덕과 양심을 잃은 악마에 비유된 느낌이었다. 도대체 아이보리를 왜 그렇게 가져갔을까? 중산층이 즐겨 찾던 사치품, 피아노, 가구, 장신구 등에 쓰였다고 한다. 그러니 그런 물건을 사용한 사람도 모두 부도덕한 행동에 가담한 거다. 그러데도 유럽인은 식인을 하는 콩고 사람이 더 부도덕하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럴까?
내 생각엔 식인 이야기도 알고 보면 콩고 사람을 야만적으로 묘사한 게 아니다. 말로가 컬츠를 구하러 가는 과정에서 원주민과 대적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콩고인 대장이 말로에게 원주민을 "잡아서 우리 주세요.... 먹을 거예요"라고 한다. 사실 콩고 인들은 6개월이나 배를 타고 돌아다니며 썩은 하마고기로 버텼는데 그마저 떨어져서 엄청나게 배가 고픈 상태였다. 날씨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덥고 먹을 것은 없고. 배고프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두 세 페이지에 걸쳐 설명한다. 콩고 사람이 백인보다 훨씬 더 많은데 그들은 백인을 잡아먹지 않는다. 그래서 말로는 콩고 사람이 스스로 통제하는 의지가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들은 사치품을 사고팔려고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 죽지 않으려고 먹었던 거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도 기근에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식인이 야만인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비판한 사람들은 콘래드가 콩고 인을 동물처럼 이상한 소리나 내고 어쩌다 영어를 할 수 있는 콩고인도 "사람을 먹는다"든지 "컬츠가 죽었다"든지 부정적인 이야기만 했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영어를 배운 콩고 원주민이 콩고 말을 하지 못하는 백인들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인 중에 원주민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컬츠 밖에 없지 않나? 그런데 컬츠는 어떤 인물인가? 러시아 청년을 감동시킬 만큼 여러 주제에 관해 말도 잘하고 자신이 관찰하고 경험한 것을 자세히 기록하는 명석한 사람이었다. 부뤼셀에서 그를 알던 지인들도 그가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니체(Nietzsche)가 말하는 초인(ubermensche) 같았다. 아니 초인을 꿈꿨던 것 같다. 콘래드는 "모든 유럽이 컬츠를 만드는데 기여했다(All Europe contributed to the making of Kurtz)"라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일까?
유럽 특히 프랑스와 영국은 17세기 18세기에 계몽주의 사상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데카르트 뉴톤 루소 볼테르 존 록 등 누구나 다 아는 지식인들은 이성 사고 자유 평등 등 정말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다. 특히 과학적 방법으로 사회에 진보를 가져와야 한다고 믿었는데 이것이 식민지로 이어지게 된 건 아이러니하다. 과학 기술로 배를 타고 멀리 가서 무력으로 제압하여 자원을 약탈해서 수송해 왔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다윈도 한몫했다. 인간이 낮은 형태의 생명체에서 진화되었다고 했으니, 유럽인은 아마도 문명의 차이, 다른 유형의 사람을 보며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유럽인은 초인이고 다른 민족은 열등 인간(Untermensche). 컬츠가 원주민에게 초인이었다. 신과 같은 초인. 신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래서 컬츠도 반항하는 원주민 머리를 창에 꽂아 걸어놨다. 그러나 결국 그는 죽으며 "호러(horror)"를 두 번 외쳤다. 자신의 만행이 유럽인의 악행이 어두운 공포라고 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컬츠의 콩고 연인이 부뤼셀에 남겨진 연인보다 컬츠를 더 사랑하지 않았나 싶다. 러시아 청년이 그랬다. 어느 날 콩고 연인이 컬츠에게 소리 지르며 따졌는데 컬츠는 가만히 있었단다. 이건 보통 부부 같지 않나? 그래서 콩고 연인이 컬츠를 떠나보내며 눈으로 슬픔을 담아내는 대목에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병든 컬츠가 부뤼셀에 가서 회복되기를 바랐을 거다. 그에 반해 부뤼셀 연인은 자기가 바라는 모습의 컬츠를 잊지 못하는 것 같았다. 컬츠는 그녀가 만든 신이다. 그래서 자기가 누구보다 컬츠를 잘 안다고 했지만 컬츠의 마지막 말이 자기 이름이었다는 걸 확인해야 했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오디세이나 파우스트를 연상시키는 대목 등 이야깃거리가 많다. 결론적으로 이 책이 아프리카인을 멸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콘래드가 현대 기준으로 인종 차별주의자라 할지라도 그가 쓴 책은 분명히 19세기말 콩고에서 일어난 끔찍한 이야기를 알렸고 21세기 한국에 사는 사람에게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게다가 콘래드는 이 책을 20세가 넘어 배운 영어로 썼다니... 놀랍고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