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는 왜 자살했을까? 이 글엔 답이 없다.
마가렛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눈먼 암살자(The Blind Assassin)>>는 긴 소설임에도 이틀 만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다. 시작은 주인공(Iris Chase: 아이리스 채이스)의 여동생 로라(Laura)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그녀의 죽음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빨간 글씨로 크게 쓴 “위험(Danger)”이라는 표지판이 다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그러나 로라는 그곳으로 차를 몰고 가서 추락했다. 계곡으로 추락한 차는 불길에 휩싸였고 그녀의 흔적은 거의 남지 않았다. 동생의 사고 소식을 접한 아이리스는 동생이 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했는지 안다. 동생은 겨우 25살이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일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독자는 그 상황을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알 수 있다. 이유는 독자가 추측해야 한다. 로라는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로라는 아이리스에게 특별한 동생이다. 엄마는 로라의 동생을 유산하고 사망하기 전 9살 아이리스에게 6살 로라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리스는 그저 병약한 엄마 곁에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서 어릴 때부터 조용히 동생을 돌보긴 했지만 사실은 동생이 귀찮고 얄미워서 엄마가 안 볼 때는 동생이 불러도 모른척하고 온실에 숨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가 동생에게 잘해주는 착한 언니라고 단정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엄마의 생각은 배지처럼 그녀의 마음에 고정됐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른이 되어 엄마가 자주 아파서 함께 놀지 못한 게 섭섭했고, 자기도 아직 어린데 왜 언니만 동생에게 잘해줘야 되고 동생에겐 언니에게 잘해주라는 말을 하지 않았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엄마가 이 세상에 없으니 아이리스는 어른이 돼서도 9살 때 기억이 아프다.
다행히 두 자매에겐 엄마처럼 자매를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가사 도우미 리니(Reenie)가 있었다. 그녀는 13살 때 아이리스의 할머니 아딜리아가 암에 걸려 사망하기 바로 전에 채이스 집안에 어머니와 함께 들어와 채이스 집안 살림을 거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매에게 채이스 집안의 역사를 알려준다. 아이리스의 증조할아버지는 캐나다 온타리오(Ontario)의 작은 마을 티콘더로가 항구(Port Ticonderoga)에서 제분소를 소유했고 벤자민 할아버지는 26살에 공장을 물려받아 미국에서 단추 만드는 기계를 수입해서 단추 공장을 운영하고 사업이 번창하여 다른 공장도 인수한다. 그렇게 부를 축척한 벤자민 채이스(Benjamin Chase)는 40세에 품위와 안목을 갖춘 위그노 프랑스 가문 출신의 23세 아딜리아(Adelia)를 중매로 만나 아내의 취향으로 설계된 아빌리옹(Avilion) 저택을 1889에 완성한다.
아쉽게도 벤자민 할아버지의 세 아들은 아무도 단추 공장을 물려받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모든 걸 바꿨다. 1914년 8월 전쟁이 터지자 세 아들은 모두 자원 입대했는데, 아이리스의 아버지 노발 채이스(Norval Chase)만 살아 돌아온다. 군에 입대하기 바로 전에 노발은 아이리스의 어머니 리리아나(Liliana)와 결혼했다. 리리아나는 채이스 공장의 변호사의 딸로 굳이 일을 할 필요가 없었으나 신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늘 자신보다 불우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믿어서 교사가 되어 가난한 동네에 가서 일했던 사람이다. 노발이 전쟁터로 가기 전에 해리팩스에 있다는 전갈을 받고 혼자서 기차를 타고 남편을 만나러 가며 남편과 같은 많은 젊은이의 죽음이 느껴져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아빌리옹에서 자선 바자를 열고 목도리와 장갑을 떠서 보내는 일을 조직하고 불구가 된 군인들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 돌보며 몸을 혹사한다.
1916년 6월 아이리스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다 두 아들이 사망했다는 전갈을 받은 벤자민 할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리리아나만 벤자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서 실상 며느리가 공장을 운영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 되고 노발은 한쪽 눈을 잃고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대위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오랜만에 만난 부부는 어색하다. 노발은 악몽을 꾸고 갑자기 화를 내고 물건을 던진다. 남편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다. “참호 위에서 신은 풍선처럼 터졌고, 위선의 더러운 조각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Over the trenches God had burst like a balloon, and there was nothing left of him but grubby little scraps of hypocrisy.)”라고 한다. 아내는 놀란다. 남편은 아내를 생각해서 술을 마실 때만 그런 말을 하지만, 아내가 위로하려 해도, 혼자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신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며 회사 가든파티에서 연극을 함께 하고, 리리아나 떠준 장갑과 목도리를 두르고 함께 스케이트를 탄 후 청혼을 했던 노발은 이제 없다.
리리아나가 아이를 유산해서 피를 쏟고 있을 때도 노발은 집에도 공장에도 없었다. 아내가 사망하고 노발은 두 가지 일을 한다. 하나는 캘리라는 여성 조각가에게 “지친 군인(The Weary Soldier)” 동상을 건축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아이리스와 로라를 위해 가정교사를 고용해 교육시킨다. 아이들은 미스 바이올런스(원래 이름은 바이올렛 고어햄 -Violet Goreham인데 아이리스가 바이올런스-Violence라는 별명을 붙였다) 선생님의 자유로운 수업을 좋아했지만, 노발은 아이들이 프랑스어, 수학, 라틴어를 배우고 좀 더 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미스터 얼스킨을 고용한다. 그러나 남자 선생님이 로라를 성추행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리니는 선생님 침대 밑에서 불미스러운 여자 사진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여 얼스킨을 해고시킨다. 성추행은 사실이었지만 물증이 없어 리니가 기지를 발휘하여 사진을 증거로 내세운 거다.
어느새 14살이 된 로라는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17살 아이리스는 아버지에게서 단추 공장의 대차대조표 업무를 배운다. 그리고 노동절에 열리는 단추 공장 피크닉에서 아이리스는 두 명의 남자를 만난다. 한 명은 로라가 초대한 알렉스 토마스(Alex Thomas)고 다른 한 명은 아버지가 초대한 리처드 그리펜(Richard Griffen)이다. 아이리스는 노조를 조직하는 알렉스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아버지의 단추 공장을 살리고 로라가 경제적으로 편하게 지내려면 신흥 갑부인 리처드와 결혼해야 한다. 19살 아이리스는 35살 리처드와 결혼한다. 리처드에게는 오빠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7살 아래 여동생 위니프레드(Winifred)가 있다. 남매는 합심하여 아이리스와 로라 자매를 가스라이팅 한다. 아이리스가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가 있는 동안 노발이 사망했지만 아이리스에게 알리지 않았다. 병원에 자원봉사를 나갔던 로라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며 발작했다고 언니에게 알리지도 않고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이런 일을 당하면서도 아이리스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리처드와 위니프레드처럼 악랄한 사람에게 맞서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정말 다행스러운 건 리니가 있다는 거다. 고아가 된 자매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채이스 집안의 가사 도우미였다. 로라는 정신병원에 갇혀 언니와 리니에게 편지를 썼다. 물론 편지가 외부로 나가는 게 금지됐지만 로라는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편지를 유출시켰다. 언니에게 보낸 편지는 리처드 남매에 의해 차단됐지만 리니에게 전달된 편지는 곧바로 로라의 구출 작전으로 이어졌다. 리니는 아이리스 자매의 친척 변호사를 통해 로라를 정신병원에서 빼냈다. 리처드 남매는 당황했고 아이리스는 엄마처럼 자매를 돌봤던 리니가 아파서 만나러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고향에 돌아가 로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도대체 왜 아이리스는 리처드 남매의 기만을 의심하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을까?
일단 20세기초 2차 세계대전 전 여성들은 직업을 갖고 경제적 독립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수잔 비 앤토니와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톤의 노력으로 1920년 여성이 투표할 수 있었고, 캐나다의 경우 유명한 5명(Famous five) 중 한 명인 넬리 마클렁이 1914년 모의국회를 열어 남자가 투표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토론을 열어서 여성의 참정권을 부정하는 게 터무니없는 처사라는 걸 강조하고, 1916년 마니토바(Manitoba)에서 처음으로 여성 참정권이 주어지고 1918년 캐다가 여성들은 투표를 할 수 있게 됐다. 이와 같은 여성 사회 참여는 상류층 여성에게 가사 책임 외에 정치, 사회, 예술 분야에서 일을 하도록 격려했다. 그래서 위니프레드는 토론토 교향악단의 초기 이사회에서 활동했으며, 온타리오 미술관과 캐나다 암 협회의 자원봉사 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 반면 아이리스의 경우 남편과 시누이의 감시 속에서 인형처럼 집에만 있었다. 남편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선 평화롭고 안정된 가정이란 이미지가 필요했다. 사회봉사는 시누이가 맡으면 됐다. 상류사회의 약육강식에 맞서 권모술수에 경험이 없는 어린 아내는 그저 집에서 헌신적이고 조신한 아내의 이미지만 지키면 됐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인형처럼 살 수 없었다. 리처드 남매가 아이리스를 감시한다고 해도 둘 다 사회 활동으로 바쁘고 요즈음처럼 감시 카메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이리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바람을 피운다. 난 외도에 대해 심한 편견을 갖고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책에서 조차 좋아하지 않지만 왠지 아이리스의 외도는 용서가 됐다. 마가렛 애트우드는 독자에게 서스펜스를 주기 위해 소설 속에 소설을 넣는 기법으로 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전개한다. 바로 이 소설의 제목 <<눈먼 암살자>>는 이 소설 속 소설의 제목이다(eponymous). <<눈먼 암살자>>라는 제목이 붙은 챕터가 나올 때마다 독자는 남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둘은 대화를 하고 사랑을 나눈다. 장소는 매번 바뀐다. 여자는 소설가인 남자에게 이야기를 요구한다. 남자는 옛날에 세 개의 달이 있던 마을에서 눈먼 암살자와 제물로 받혀진 혀가 잘린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제로 메소포타미아나 히타이트 문명에서 아이들이 오래 카펫을 만드는 과정에서 눈이 멀기도 했다는 전설이 있어서 남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독자는 어느 순간 소설 속 소설의 여자가 아이리스고 남자가 알렉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리스가 결혼 전 노발의 단추공장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불이 났을 때 알렉스가 방화범으로 몰리자 자매는 알렉스를 다락에 숨겨줬고, 그때 아이리스는 알렉스와 첫 키스를 했다. 그래서 결혼 후에도 만남이 이어졌지만 독자는 소설 속 이야기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따라서 아이리스가 21살에 난 딸 에이미(Aimee)는 리처드의 딸이 아니다. 아기의 머리가 엄마처럼 금발이 아니라 놀라자 간호사는 신생아 머리는 곧 빠지고 색이 바뀐다고 하고, 아이리스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검은 머리였다고 하자 리처드 남매는 별 의심 없이 넘어간다. 그러나 나이 든 아이리스는 그때를 회상하며 정신병원에 있던 로라가 에이미를 봤다면 누구 아기인지 금방 알아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2차 세계 대전, 1945년에 로라가 사망하고, 1947년에 리처드가 자살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쓴 게 아니라 80세가 넘은 아이리스가 과거를 회상하며 소설 속 소설인 <<눈먼 암살자>>까지 넣어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산만하지 않고 아름답고 창조적인 표현으로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서 빨리 끝나는 게 아쉽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하지 않은 물음이 있다. 로라는 왜 자살했을까? 또, 아이리스는 로라가 사망하고 자신이 쓴 <<눈먼 암살자>>를 로라를 작가로 내세워 출판했는데, 왜 그랬을까? 그건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마가렛 애트우드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녀가 쓴 책 중에 처음으로 읽은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The Heart Goes Last)>>를 읽을 때만 해도 공상 과학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다양한 어휘로 맛깔스러운 표현을 잘하고 현실감 나는 설정을 재미있게 써서 놀랐다. 그러나 워낙 안 읽은 책이 많아 그녀의 작품을 더 이상 찾아 읽지 않았는데, 이번 소설을 읽고 몇 권 더 읽게 될 것 같다.
<참고자료>
Atwood, M. (2000). The Blind Assassin. Vintage Books. New Y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