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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Nov 18. 2024

두 번째 독립

1회

영숙은 만수가 나가는 소리를 들렸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새벽에 갑자기 더워서 응접실에 나와 잠이 들었다. 몇 시에 방으로 돌아갔는지는 생각이 안 난다. 영숙이 잠에서 깬 시간은 9시 34분. 분명히 눈을 떴는데 눈이 부어서 그런지 완전히 눈이 떠지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눈꺼풀이 전보다 더 내려온 느낌이다. 느낌만이 아니라 거울에서 봐도 전보다 눈이 작아졌다. 나이가 들었으니 당연히 피부가 늘어진 거지만 전보다 속도가 빠른 걸 느낄 수 있다. 영숙은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짧게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 문득 자신이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해피 데이스>의 위니처럼 하루를 시작한다고 느낀다.


부엌 싱크대에 시리얼 먹은 그릇이 수저와 함께 물로 채워져 있다. 만수는 벌써 10년이 넘게 주중에는 시리얼만 먹고 출근한다. 체중 조절 때문이라고 했지만 영숙이 저녁에 콩나물 국이나 굴 국을 끓여 놓으면 아침에 데워서 먹고 간다. 어제 마오타이주를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아 아침 출근을 걱정했는데 괜찮았던 모양이다. 예전에 회식에서 과음을 하면 집에 와서 일부러 토를 하고 숙취 해소 음료를 마시고 잤다. 


요즈음 만수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다. 코로나 이후로 회식이 줄고 특히 MZ세대 의사들은 건강을 생각해서 회식 때도 밥 먹고 커피만 마시고 귀가해서 술 마실 일이 없다고 했다. 어쩌다 술을 마시고 오는 날은 옛날 제자나 선배를 만난 날이었다. 영숙은 내심 이런 술자리도 더 이상 없기를 바랐다. 


"술집 운영하는 사람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술 때문에 건강 해치고 운전하다 사고 나고… 요즈음 술 문화가 바뀌는 건 정말 잘 된 일이에요. 난 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지 이해가 안 가. 막걸리는 달달해서 마실 만하지만 그것도 아침에 머리가 아픈 걸로 봐서 별로 좋지 않고. 암튼 난 포도주 마시고 죽을 뻔해서 그런지 몰라도 술은 정말 독이라고 생각해요."


영숙은 비행기에서 주는 포도주를 마시고 급채를 해서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실로 수송된 적이 있었다. 미국의 911 사태 이후 비행기를 타기 전에 학교 일이며 집안일을 모두 잘 마무리해 놓고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내가 죽은 뒤에 누가 우리 집에 오면 치울 게 없어야 한다. 내가 하기로 한 일은 끝내야 한다. 


덴마크로 여행을 떠나면서 학회지에 낼 논문을 다시 읽으니 고쳐야 할 부분이 보였다. 왜 진작 이게 보이지 않았을까? 시간이 많지 않아 조바심이 났지만, 3줄을 고치는데 2시간이나 걸렸다. 땀이 많은 만수가 건조기 드라이시트의 은은한 향기가 벤 고실고실한 이불에서 잘 수 있도록 이불 빨래도 하고, 마스크 쓰고 락스로 변기와 목욕탕 바닥을 박박 닦느라 3시간도 채 자지 못했다. 잠은 비행기에서 자면 되지. 서둘러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에 도착해서 점심도 거른 채 비행기에 탑승했다. 누군가 비행기에서 포도주를 한 잔 마시고 푹 자고 나면 비행이 덜 지루하다는 말을 듣고 평소에 마시지도 않던 포도주를 저녁과 함께 들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잠에서 깨며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옆에 앉아있던 외국인 승객에서 “제발 도와주세요. 숨을 쉴 수 없어요(Please help me. I think I can’t breathe.)”이라고 말했다. 유독 향수 냄새가 진했던 승무원에겐 “죄송하지만 향수 냄새가 너무 강해서 매스꺼워요. 다른 승무원이 도와줄 수 있을까요? I'm sorry, but I think your perfume is too strong and makes me nauseous. Would it be possible to send someone else to help me?”라고 부탁했었다. 비행기에서 지상에 있는 병원으로 전화를 걸고 비상 구급상자에 있던 주사를 맞고, 공항에 내리자마자 환자 이송 카트에 실려 공항 응급실로 갔다. 링거를 맞고 한 시간 자고 나니 말끔히 나아져서 비행기 안에서 수선을 피웠던 게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 사람이 이렇게 비행기 안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영숙은 전생에 술 때문에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왜 그렇게 술에 대한 거부감이 클까? 연고전이 끝나고 모두 맥주를 마실 때도 영숙은 고집스럽게 사이다를 마셨었다. 그렇다고 영숙이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건 아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시댁 식구와 콘도에 놀러 가서 전과 찌개를 끓여 먹으며 막걸리를 마셔봤고, 연말에 병원에서 부부 동반 모임이 있을 때 포도주를 몇 모금 마셔 보기는 했다. 그러나 다시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든 적이 없다. 아무리 티브이에서 연예인이 치킨과 맥주를 맛있게 먹고 마셔도 한 번도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다. 게다가 티브이에서 사람들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소주 마시는 장면을 보여주는 건 모두 상술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 나라는 모든 국민을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 작정인가? 분명히 맥주나 소주 회사에서 돈을 주고 만든 연속극일 거야. 아유, 아이들이 저런 걸 보니까 소주 마시고 담배 피우고 그러지.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 레지던트를 시작한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간 영숙은 RN 시험을 보고 간호사로 일했다. 당시 정신과 병동에서 일했던 영숙은 유난히 알코올 중독자가 많은 걸 보고 놀랐다. 티브이에서도 알코올 중독으로 인생을 망친 사람의 다큐나 영화를 많이 방영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숙은 알코올이 마약만큼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오헨리(O Henry)나 F 스콧 피츠제럴드 (F. Scott Fitzgerald) 같은 작가도 알코올 중독으로 40대에 사망했다. 최근에는 벤 애플렉(Ben Affleck) 다니엘 래드클리프(Daniel Radcliffe)처럼 잘 생기고 재능 있는 배우들이 알코올 중독을 시인하고 중독 치료를 받고 있으며 심지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18개나 딴 마이클 펠프스(Michael Phelps)마저 같은 상황이라고 했다. 그들의 최근 사진을 보니 확실히 나이에 비해 늙어 보였다. 다행히 만수는 회식이 없는 날 집에서 따로 술을 드는 일은 드물다. 일주일에 한두 번 맥주 한 캔을 마실 뿐이다. 그래도 영숙은 신문에서 읽은 내용을 외워서 조잘거렸다. 


당신처럼 맥주 한 캔만 마셔도 얼굴이 금세 붉어지는 사람은 체내에 알코올이 분해되면서 생기는 아세트 알데 하드를 분해하는 효소가 적어서 그런 거 알죠? 당신이 의사니까 더 잘 알겠지만, 아버님도 대장암으로 돌아가셔서… 걱정이 돼요. 지난번 대장 내시경에서 용종도 떼어냈다고 했잖아요. 


맥주 한 캔 정도는 괜찮아요.  


아유, 누가 또 술 선물을 준 거야? 정말 이 술 다 갔다가 팔아서 또 유럽 여행 가야겠어요. 


영숙은 명절 때 선물이나 제자들이 사 오는 선물 중 가장 못마땅한 게 술이라고 생각했다. 만수 몰래 장식장 하나를 가득 채운 양주를 팔까 생각했지만 혼자 집에 있을 때 양주를 매입하는 사람이 찾아오는 게 무서워서 남편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하고 양주를 매입한다는 전단지를 주며 직접 전화해서 매입자와 약속을 잡게 했다. 그동안 모아뒀던 양주 중 대부분을 매도했더니 260만 원이나 받았다. 태식은 너무 싸게 판 거라고 했지만, 영숙은 태식이 그걸 다 마시고 황천길로 갈 일 있냐고 쏘아붙이며 손에 든 현금을 다시 세었다. 영숙은 나머지 양주도 팔고 싶었지만 만수는 아이들이 결혼할 때 마실 거라고 다시 연구실로 가져가버렸다. 실제로 영숙은 그 돈으로 동부 유럽 패키지여행을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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