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반겨주기라도 하는데 11월인 요즘은 창밖을 봐도 세상이 온통 차가운 보랏빛이라 일어나기 더욱 싫어진다.
가만히 앉아 흙탕물처럼 희뿌얘진 머릿속을 가라앉혀보지만 서두르라는 소리에, 정신없이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한다. 어제 태권도 수업이 끝나고 바로 집에 왔어야 했건 걸까? 시간이 남아 친구들과 뛰어논 탓에 너무 무리했던 건지 몸을 비틀거리다 화장실 문지방에 발을 찍히고 말았다.
"아야!!!"
너무 아프다. 마치 백두산을 통째로 내 발끝에 떨어트린 것 같다.
제정신이 아닌 아침부터 이 고통을 감내하기에 8살인 내 나이는 아직 너무 어리다.
나를 깨워준 아빠도 걱정이 되는 마음에,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와 괜찮냐고 물어봐 주지만 누군가를 탓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억울해, 눈물을 흘리며 오늘도 난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초등학생이 되면서 부모님이 도와주시던 샤워하기, 옷 입기, 등교하기 등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더 이상 선생님만 졸졸 따라다니는 유치원생이 아니기 때문에, 힘을 내 보지만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집까지 가는 길은 아직 내게 버거운 일이다.
저녁 6시, 밖은 이미 캄캄한 밤이 되었다. 태권도 수업이 끝나고 그 시간에 맞춰 아빠가 데리러 왔다. 평소에는 엄마가 퇴근하는 길에 나를 픽업해 가지만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면 아빠가 데리러 온다.
나: 엄마 오늘 늦어?
아빠 : 응 오늘 일이 있어서 거기 들렀다가 온데
나 : 힝~ 엄마 빨리 오면 좋겠다. 아빠 오늘 저녁은 나 그거 먹을래, 오므라이스
아빠 : 또? 안 질려?
나 : 왜~? 오므라이스 맛있잖아!
아빠 : 알겠어, 집에 가서 오므라이스 해줄게!
내 나이 5살에 지금의 아빠를 만났다. 언제부터인가 친아빠와 단 둘이 살게 되었고 2주에 한번 엄마의 얼굴을 잠깐씩 보고 올 수 있었는데, 엄마와 헤어지기 싫어 친아빠에게 투정을 부려보아도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한 번은 엄마가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을 소개해주고 싶다며 나에게 말했고 "엄마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야"라고 소개해준 사람이, 잘생기고 요리 잘하는 지금의 아빠다.
7살이 되던 내가 너무 많은 투정을 부린 탓일까? 어느 날 갑자기 친아빠가 엄마랑 살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평소에 엄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던 나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에,바로 받아들였다.
며칠 뒤 나는 사는 동네가 바뀌었다.
엄마랑 살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내 손톱은 항상 짧게 잘려 있었으며 옷과 머리를 매일 단정하게 하고 밖을 나서는 등 귀찮은 일들 투성이었다. 사는 집은 훨씬 좁아졌고 늦게 잠자는 것과 늦게 일어나는 것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친아빠와 엄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다시 살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나에게, 지금의 아빠는 좋으면서도 매우 불편한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아빠는 나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준다. 가끔은 키가 커야 한다며 버섯과 미역국 등 존재하지 말아야 할 음식들을 나에게 주지만, 그다음 날에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말하면 무조건 OK 해주기 때문에, 나름 괜찮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 아빠는 요리뿐만 아니라 노래도 엄청 잘 부른다. 얼마 전 엄마와 결혼식을 하였는데 그때 엄마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모습이 어찌나 자랑스럽던지, 노래가 끝나자마자 환호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아빠는 나와 스파이더맨으로 통한다. 스파이더맨 광팬인 나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아빠는 나에게 베스트 프렌드 이기도 하다.
집에 들어와 나는 제일 먼저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아침의 악몽이 떠올라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문지방을 넘어 재빠르게 손을 씻고 나왔다. 책가방을 정리하고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있으면 아빠는 주방에서 요리할 준비를 시작한다. 샤워를 하는 동안 주방에서는 '통통통 통통' 하는 도마 소리가 맛있게 들린다. 샤워를 마치고 뜬금없는 호기심에 아빠에게 가서 오므라이스 만드는 법을 물어봤다.
나 : 아빠 나 궁금한 거 있어
아빠 : 스파이더맨?
나 : 아니야! 오므라이스는 어떻게 만들어?
아빠 : 갑자기?
새로운 주제의 질문에 당황을 한 건지 아빠가 요리하던 손질을 멈추고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 : 응 갑자기 궁금해졌어
아빠 : 음... 우선 야채를 이렇게 작게 준비해야 해
아빠가 내민 그릇 안에는 잘게 썰린 파가 들어있고 다른 그릇 안에는 감자와 양파 그리고 싫어하는 당근이 밥톨만 한 크기로 작게 썰려있다.
큼지막한 야채들이 어떻게 저렇게 작게 잘렸을까? 역시 우리 아빠는 요리 천재이다.
재료의 설명을 마친 아빠는 요리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설명하며 알려주기 시작했다.
오므라이스는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만드는 것처럼 기름을 넉넉히 둘러주는 것이 포인트라며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는 잘게 썰은 파를 넣으셨다. 파의 향이 밥과 야채에 스며들면 훨씬 맛있어진다며 파의 겉면이 캐러멜 색처럼 변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손질해 놓으신 야채를 몽땅 다 넣었다.
아빠 : 원래 야채는 단단한 것들을 먼저 넣고 겉이 익을 때쯤 덜 단단한 야채들을 넣어야 해, 그래야 모든 야채의 식감이 살아나거든 근데 넌 야채를 싫어하니까 얇게 썰어서 몽땅 넣는 거야
나 : 응!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를 위해 무건가를 한 아빠의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었기 때문에 긍정으로 답했다. 뒤이어 냄비에 소금 한 꼬집을 집어넣고는 옆에 있던 식은 밥을 들어 냄비에 들이 붙는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며 밥알이 들러붙지 않고 기름에 잘 코팅되도록 뒤집게로 이리저리 신속하게 움직이는 아빠의 손놀림이 매우 멋있게 보였다. 그러던 중간에 싱크대 아랫 서랍을 열고 검은색의 정체 모를 무언가를 넣었는데 불안한 마음에 아빠에게 물었다.
나 : 아빠 그게 뭐야?
아빠 : 굴소스라는 건데 이게 들어가야 감칠맛이 더욱 살아나거든
굴소스를 한 바퀴 두른 아빠는 소스가 골고루 섞이게끔 다시 한번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냄비를 앞뒤로 휙휙 움직이며 현란한 손놀림을 보였다. 그리고 작은 밥그릇을 꺼내 잘볶아진 볶음밥을 꾹꾹 눌러 담더니 커다란 접시를 꺼내 그 위에 밥그릇을 올려놓았다. 그릇을 몇 번 툭툭 치고 들어 올리니 그 자리에는봉긋한 산봉우리 모양의 볶음밥이 기세 등등하게 놓여있었다.
나 : 와! 아빠는 진짜 세상에서 요리를 제일 잘하는 것 같아!
내 말을 듣던 아빠는 흐뭇한 표정으로 냉장고로 다가가 계란을 하나 꺼내왔다.
아빠 : 신기한 거 또 보여줄까?
나 : 응!
빈 그릇을 꺼내 계란을 한 손으로 들고 밥그릇 가쪽에 툭 치더니 그대로 계란을 벌려 투명하고 샛노란 계란 속살을 그릇 위에 툭 떨어트렸다.
아빠 : 어때 멋있지?
나 : 뭐가?
아빠 : 한 손으로 계란을 깻잖아 이거 어려운 거야
나 : 에이 뭐야 재미없어
기대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아빠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포크로 계란을 휘휘 저었다.
투명한 흰자와 샛노란 노른자가 섞이며 맛있는 황금빛이 만들어졌고 아빠는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황금빛을 부으며 계란은 쉽게 탈 수 있으니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약한 불에 오래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프라이팬 모양에 맞춰 계란을 넓게 퍼트리던 아빠는 한 가지 팁을 더 알려주겠다며 계란이 다 익기 직전에 계란을 꺼내 산봉우리 볶음밥 위에 올려놓았다.
계란을 다 익히면 퍽퍽하기만 해서 별로지만 익기 직전에 꺼내면 촉촉하고 부드러운 식감으로 먹을 수 있다고 한다.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케첩을 오므라이스 위에 지그재그로 뿌리며 요리를 완성 하였다.
산봉우리 볶음밥
촉촉하고 부드러운 계란
오늘 저녁 오므라이스 어떠세요?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어 계란과 볶음밥을 한가득 퍼 담아 입으로 향하는 순간, 급한 마음 탓인지 욕심을 부린 탓인지 계란이 옆으로 툭 떨여졌다. 재빠르게 왼손으로 계란을 집어 숟가락 위에 다시 올려놓고 한입 먹으려는데 느껴지는 시선에 아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빠 : 왜 그래야 하지? 굳이 손으로 계란을 집어야 했나? 손가락에 케첩 다 묻었잖아....
나 : 하하... 미안... 너무 배고파서
아빠 : 옷에 닦지 말고 휴지로 닦으세요.
나 : 응!
옆에 있던 티슈로 손가락을 대충 닦고 입안 가득 오므라이스를 집어넣었다.
파 기름으로 코팅된 짭짤한 맛의 볶음밥이 혀에 내려앉는 순간 부드럽게 흩어지며 입맛을 돋우었고
씹는 순간 촉촉하고 부드러운 식감의 계란이 새콤달콤한 케첩과 함께 볶음밥에 섞이며 입속에서 알록달록 무지개를 만들었다. 이렇게 피어단 무지개는 감자와 양파 그리고 당근에서 나오는 달달함 때문에 씹을 때마다 더욱더 밝은 빛을 만들어낸다.
재미있다. 그래서 맛있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한다.
이 벅찬 감동을 전달하고 싶으나 언어의 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움직이며 춤을 추고 거대한 킹콩이 된 것처럼 가슴을 있는 힘껏 두드린다. 내 마음이 아빠에게 전달되도록 더욱 현란하게 몸을 흔들 때쯤 아빠는 꼭 나에게 말을 건다.
아빠 : 그만~ 밥 먹을 때는 가만히 앉아서 드세요. 그렇게 움직이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혹시 학교에서도 그러는 건 아니지?
나 : 알겠어...
어린이들의 표현 방법은 아른들에게 예의 없는 모습으로 비치는지 항상 중간에 태클을 거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힘없는 8살짜리 어린이일 뿐인 것 을, 자리에 앉아 아쉬운 마음에 절제된 동작으로 들썩거리며 한 그릇을 싹 다 비웠다. 맛있게 잘 먹었다.